78.
클라레와 친구들은 사실 비밀 조직의 일원이었다.
샤프 영지를 수호하는 비밀 조직의 주 임무는 쓰레기 줍기, 공원 잡초 뽑기, 학교 숙제하기 등이었다.
그리고 이따금 특별 조직원인 아스의 간식을 먹고 품평하는 일도 했다.
아스가 만들어 주는 간식은 항상 맛있었기 때문에 최고 평가를 받았다.
“오늘의 회의 주제는 샤프 영지의 안전이다.”
공원에 모인 아이들은 정자에 신발 벗고 모여 앉아 정기 회의를 진행했다.
비밀 조직의 대원이자 대장인 클라레가 회의를 진행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나쁜 어른들에게 샤프 영지를 지키는 거지. 이건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대장.”
센샤가 손을 들었다.
“뭔가, 센샤 조직원?”
“그래서 오늘 아스 언니의 간식은 뭐야?”
“바로 푸딩이다.”
와아! 조직원들이 환호했다.
“그러니 푸딩을 먹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
오늘 조직원들의 임무는 공원 쓰레기 줍기였다.
아이들은 각자 챙겨 온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공원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주워 담았다.
“오늘은 쓰레기가 별로 없네?”
“다들 착실하게 쓰레기통에 버리나 봐.”
“얘들아! 여기에 누가 쓰레기 버렸어!”
“와, 깡통이다!”
“깡통은 재활용으로 버려야 해.”
몇 개 안 되는 쓰레기를 야무지게 분리수거까지 한 아이들은 곧 공원을 우다다 뛰어다녔다.
“으아아! 얼음!”
“이익! 잡을 수 있었는데!”
“보르는 파슬리니까 잡혀도 봐주는 거지?”
“누가 얼음 깨 줘!”
“기다려. 갈게!”
얼마 전 발목을 다쳐서 제대로 뛰지 못하는 보르가 얼음으로 멈춘 친구들을 풀어 줬다.
“땡!”
“와아, 자유다!”
“보르가 땡 해 줬어!”
공원을 활보하며 뛰어다니느라 정신없던 클라레가 멈칫했다.
“잡았다!”
술래였던 센샤가 클라레의 등을 때렸다.
“너 술래! 이번에는 네 차례야.”
“잠깐만, 그럴 때가 아니야아…….”
심각한 목소리로 친구들을 모은 클라레가 벤치를 가리켰다.
분명 아무도 없었던 벤치였는데, 그곳에 웬 백발의 거대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상한 할아버지가 있어…….”
아이들은 겁에 질린 다람쥐처럼 한데 뭉쳐, 머리를 맞댄 채로 회의에 들어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 같은데?”
“여기 공원에는 할아버지랑 할머니들만 오잖아.”
“근데 저 사람도 할아버지 같지 않아?”
“하지만 몸이 엄청 큰데?”
우리 아빠보다 큰 거 같아.
낯선 남자를 힐끔거리던 센샤가 힉, 하고 몸서리를 쳤다.
“봤어! 여기를 봤어!”
벤치에 앉은 정체불명의 남자는 시커먼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분명 아이들을 향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선글라스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
아이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야…….”
보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유괴 아냐?”
마침 학교에서 유괴 예방 교육까지 받았던 터라, 아이들의 추리는 점점 그쪽으로 향했다.
“이상한 어른들이 저렇게 애들 노려보고 하잖아.”
보르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그랬는데, 저런 나쁜 어른들은 어린애들을 이용해 돈을 요구한다고 했어.”
클라레가 이에 가세했다.
“이씨, 우리 집 돈 없는데.”
센샤는 제집 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들었는데, 집 살 때 대출 끌어다 써서 빚밖에 없댔어. 아빠가 그래서 매일 복권 사잖아.”
“우리 집도 그래. 아빠가 도박으로 재산 꼴아박고, 엄마가 이혼 소송으로 변호사 써서 별로 없어…….”
앙증맞은 리리의 목소리가 차디찬 현실을 냉정히 밝혔다.
“우리 아빠도 가게 대출…….”
세레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심각한 상황이구나.”
조직원들의 재정 문제를 진지하게 듣던 클라레가 결단을 내렸다.
“일단 공원을 나가자.”
다행히 공원 바로 위에 클라레의 집이 있었다.
“아스한테 말해서, 공원에 이상한 사람 있다고…….”
대피령을 내리는 클라레의 머리 위로 어두컴컴한 그늘이 졌다.
“얘들아.”
굵직한 목소리가 아이들을 불렀다.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란 아이들이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덩달아 놀란 알버스가 머쓱한 헛기침을 토했다.
“어흠, 그, 이상한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그는 앞으로 있을 일을 위해 샤프 영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중, 사돈댁 근처까지 와 버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돈댁에 한번 들러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공원에서 친구들과 노는 클라레를 발견했다.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다.”
우선, 알버스는 자신의 결백부터 주장했다.
“…….”
“…….”
하지만 아이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거대한 체구, 나부끼는 백발, 섬뜩한 선글라스, 땅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굵은 목소리.
거기다 한쪽 볼에 상처까지 있으니.
아이들이 겁을 먹기엔 충분한 외형이었다.
정작 알버스는 자신이 그런 외모를 타고났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린이에게 인기 있는 푸근한 인상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선생님이 낯선 사람이랑 말하지 말랬어요.”
슬쩍 나온 클라레가 친구들을 방어하듯 앞에 섰다.
그 모습에 알버스는 사돈아가씨가 아주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의리 있는 성격이란 걸 짐작했다.
무척 호감이 생겼다.
“정말이란다. 사실 난 네 손님이거든.”
“소, 손님?”
깜짝 놀란 클라레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너희 언니가 결혼하던 날에 본 적 있지. 춤을 아주 잘 추더구나. 너희가 춤추는 것도 봤고.”
그 말에 아이들의 경계심이 살짝 풀렸다.
알버스가 그런 아이들을 한 명씩 둘러봤다.
낯이 익다 싶더니, 마을회관에서 클라레와 같이 춤을 추던 아이들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쓰레기를 주워 공원을 청소하는 것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문 착한 아이들이구나.”
알버스의 칭찬에 아이들의 굳었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알버스는 뭐든 퍼 주고 싶은 훈훈한 할아버지 마음으로 말했다. 이 조그만 것들을 보고 있자니 제 손주들이 떠올랐다.
“내 너희한테 맛있는 걸 사 주고 싶구나.”
맛있는 거?
솔깃한 아이들이 슬금슬금 알버스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면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
클라레는 아예 알버스의 손을 덥석 잡고 헤벌쭉 웃었다.
“요 녀석들 봐라!”
넉살 피우는 모습에 알버스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에 아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꺄르르 웃었다.
“할아버지 꼭 사자 같아요!”
클라레가 대단하다며 손뼉까지 쳤다.
“우리 아가씨가 보는 눈이 있군! 내 별명이 사자란다!”
“왜요? 머리 풀어서요?”
알버스는 아이들과 함께 공원을 나섰다.
“머리도 하얗고, 그렇게 풀고 있으니까 꼭 흰 사자 같아요!”
클라레의 말에 알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눈꼬리 끝을 부드럽게 휘었다.
“내 손주도 그렇게 말했었지.”
만약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면, 아이들이 ‘저 할아버지 생각보다 엄청 잘생겼어!’라고 감탄할 정도로 근사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알버스가 선글라스를 벗을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할아버지도 손주가 있어요?”
“두 명이나 있단다. 하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너희와 동갑이란다.”
자신을 하얀 사자 같다고 말한 건 큰 손자 쪽이었다.
“그 녀석은 어릴 적에 너희보다 훨씬 작았어.”
비쩍 마르고 잊을 만하면 잔병치레하던 아이였다.
겁도 많고, 주위를 지나치게 살피며 주눅만 잔뜩 들어 있던 불쌍한 아이.
“하지만 음식을 골고루 먹고, 운동도 아주 열심히 해서 지금은 누구보다 크고 강한 해군이 되었단다.”
와아, 아이들이 감탄했다.
“그 아이는 나처럼 되고 싶어 했지.”
살짝 젠체하는 알버스의 음성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내가 꼭 사자처럼 생겼다면서,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했단다. 그 녀석은 내가 키운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구나아.”
클라레가 코를 후비며 대답했다.
***
가게에 도착한 알버스는 아이들 수대로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난 딸기 맛!”
“사장님, 저는 바닐라 주세요!”
“초콜릿 맛 있어요?”
알버스는 냉동 진열대 앞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주문받던 사장님은 알버스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시했다.
“얘, 세레니.”
그는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얌전히 먹던 세레니를 불렀다.
“저 사람은 누구니?”
“클라레 손님이래요.”
“어?”
사장이 이번엔 입가에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덕지덕지 붙인 클라레를 몰래 불렀다.
“사장님! 아이스크림 너무 맛있어요!”
“고맙구나. 그런데 저 사람이 네 손님이야?”
“네.”
“무슨 손님인데?”
“울 언니 결혼할 때 저를 봤대요.”
“…….”
당시 마을회관에서 열린 2차 연회에 참석했었던 가게 사장이 사태를 파악했다.
‘유괴범이구나!’
그때 마을회관에 저런 남자는 없었다. 봤다면 분명 기억했을 거다. 저렇게나 인상이 강렬한 존재를 어떻게 잊을까.
“…….”
사장은 슬그머니 쪽지에다가 뭘 적었다. 그리고 그걸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전달했다.
쪽지를 본 직원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꼼짝 마라!”
“당신을 유괴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가게에 들이닥친 경찰들이 알버스를 제압했다.
“얘들아, 이리로 오렴!”
그 틈에 가게 사장이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알버스가 허둥거렸다.
“내가 무슨 유괴범이야!”
“자세한 사정은 경찰서에서 듣도록 하지.”
“이, 무슨!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무려 해군 대장 출신의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것도 아들라보르 국군 의전서열 1위였다.
어딜 가도 대접만 받던 알버스에겐 이렇게 바닥에 엎어진 채 등 뒤로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상황은 꿈에서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그때, 클라레가 어른들을 뿌리치고 나타났다.
“아가!”
나의 무고를 주장해 주려고?
알버스가 감격 어린 눈으로 클라레를 바라봤다.
하지만 클라레는 그의 믿음을 야무지게 배신했다.
“역시 나쁜 사람이었구나! 아이스크림에 속았던 내가 바보였어! 난 이제 어른을 믿지 못하는 아이로 자라게 될 거야!”
“사돈아가씨! 그런 거 아니야!”
“경찰 아저씨. 저 나쁜 사람이, 우리가 공원에서 놀고 있는데…….”
야무진 클라레는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다.
이를 듣는 경찰들의 표정은 점점 혐오스럽게 번졌다.
나이도 점잖게 먹은 영감쟁이가 애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다니.
“…….”
억울해진 알버스는 이제 말도 제대로 뱉지 못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