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245)

77.

“…어?”

놀라 굳은 노아에게, 클라레는 한 번 더 물었다.

“엄청 뾰족하고 낡은 못이 박힌 신발! 예쁜 새랑 다람쥐들이 내 신발에 올라앉아 쉴 수 없는 거로!”

“그게 무슨 소리야!”

동심과 완전히 멀어진 요구사항에 노아가 기겁했다.

클라레가 워낙 씩씩하고 사고뭉치 같은 면이 있긴 해도,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도 좋아하는 아이였다.

자기가 공주님이 되면 늘 예쁜 새랑 다람쥐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때마다 망할 아티가 동물들한테서 병균 옮는다고 놀리며 겁주는 걸 겨우 수습해서 지켜 온 동심인데…!’

노아가 놀란 만큼, 다른 어른들도 클라레의 발언에 크레 술렁거렸다.

“처제!”

특히, 레토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런 흉측한 건 사춘기가 왔다고 해도 허락할 수 없어요! 우리 처제에겐 앙증맞은 방울과 리본이 더 어울린다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쵸? 그러니 이거 신고 갈까요? 아니면 이 형부가 오늘 오는 길에 또 하나 사서…….”

노아는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얼마 전 아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정도면 아가씨의 지갑이죠? 뭔 선물을 저리 사 온, 어머! 제 것도 사셨어요? 뭘 이런 걸 다!”

뒤에서 저와 아스를 비롯한 가족들이 ‘클라레의 지갑’이라고 놀리는 건 아직 모르는 듯했다.

아니면 알고도 저러거나.

“그치만 형부.”

야무지게 선물은 챙겼으면서, 클라레는 못 박힌 신발을 신고 가야 한다며 고집했다.

“왜 그걸 신어야 하니?”

비스가 물었다.

“그거야 오늘 중요한 수업이 있는걸!”

굳건한 결의가 느껴지는 입술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나쁜 어른을 만날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배운대! 드디어 내 한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그래서 클라레는 못 박힌 신발이 필요했다.

“전에 아스한테 배웠던 기술을 쓸 거야!”

레토를 형부로서 받아들이길 반대하던 시절, 클라레는 등신대 식칼토끼 인형의 가랑이를 발로 차는 필살기를 익혔었다.

“해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냥은 안 돼! 뭔가 뾰족한 게 있어야 해!”

“…….”

“…….”

그 말에 다들 아스를 돌아봤다.

가족들의 ‘네가 원흉이었어?’라는 원망 어린 시선을 느낀 아스는 아무것도 모른단 듯이 빵긋 웃었다.

“다들 출근하셔야죠?”

아스가 무적의 주문을 발휘했다.

***

“모르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여러분께 다가오면?”

“도와주지 않아요!”

“그런데도 다가오면?”

“싫다고 소리치고 도망가요!”

선생님의 질문에 마레이 1학년 학생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

그 속에서 클라레 혼자 뚱했다.

“쟤 왜 그래?”

센샤가 옆에 있던 보르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오늘도 단정하게 가르마를 넘긴 안경 낀 소년은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필살기를 자랑하지 못해서 저러는 거야.”

“오늘 호신술을 안 배워서 속상하대.”

리리가 조금 더 설명을 보태었다.

“클라레.”

세레니가 클라레의 손등을 살살 눌렀다. 밤송이가 연상되는 짧은 머리의 소년이 소곤거렸다.

“나중에 필살기 보여 줘.”

“응…….”

다정한 친구의 배려심 덕에 클라레의 마음이 살짝 풀렸다.

“여러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한 번 더 설명했다.

“어른은 아이보다 훨씬 크고, 강하고, 힘도 세요. 그런 어른이 자기를 도와달라며 아이들을 데려가는 건 위험한 일이죠.”

“선생님.”

어떤 아이가 손을 들었다.

“근데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때는 어떡해요?”

“나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아이들의 물음에 선생님이 잠시 고민한 뒤에 대답했다.

“그럴 때는 주위에 어른이 없는지 살피고, 그분들께 도와달라고 부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오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지간한 어른들은 어린아이에게 도와달라고 먼저 접근하지 않아요.”

“간첩은요?”

클라레가 손을 들고 물었다.

“…가, 간첩?”

지금은 유괴 예방 교육 중인데?

너무 훅 뛰어 버린 주제에 선생님이 머뭇거렸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고 설명했다.

“간첩은 훨씬 더 위험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선생님은 간첩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을 알려 주기로 했다.

“간첩은 정말 위험한 사람이에요. 가까이 가서도 안 되고, 만약에 만나더라도 무조건 도망쳐야 해요.”

그리고 반드시 경찰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야무지게 당부했다.

“경찰 전화번호는 몇 번?”

“112!”

“그러면 해군 전화번호는?”

“어? 어어?”

“해군 번호가 뭐지?”

“힝, 모르는데…!”

선생님의 장난에 아이들이 곤란해하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08에!”

하지만 딱 한 명.

“0909! 7751!”

씩씩하게 정답을 외치는 학생이 있었다.

“우리 언니랑 형부가 일하는 특함 사령부 번호예요!”

“…….”

“할머니 사무실 번호도 알고 있는데요, 그건 함부로 말하면 감옥 가서 썩은 수프만 먹는다고…….”

“여러분!”

선생님이 냉큼 끼어들었다.

“사실, 오늘 호신술을 가르쳐 주실 선생님이 와 있답니다?”

“호신술!”

“와아!”

“이 시간을 기다렸어요!”

클라레를 비롯한 아이들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한숨 돌린 선생님은 식은땀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스는 클라레를 데리러 갔다.

“아스 언니다!”

“안녕하세요!”

“클라레 데리러 왔어요?”

“누나 안녕하세요.”

같이 나온 클라레의 친구들이 아스에게 쪼르르 다가가 인사했다. 아스는 병아리들을 보는 것만 같아 마냥 흐뭇했다.

“아스, 오늘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어.”

“바로 놀러 가시는 거예요?”

“우리 집 밑에 있는 공원에서 놀 거야!”

“그러면 우리 비밀 대원들이 드실 간식을 준비해야겠네요.”

나중에 만나자고 약속한 뒤, 클라레는 아스의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언덕 위 저택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슬슬 아가씨 혼자 등교시키는 연습을 해 볼까….’

하지만 간첩이 남부에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아직 어린 아가씨를 홀로 다니게 하는 건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감출 순 없지.”

“아마 며칠 내로 공문이 내려갈 거다.”

“국왕과 논의 중이거든.”

아스는 어서 간첩들이 잡히길, 그리고 제발 저의 아가씨와 아이들에게 어떤 위험한 일도 생기질 않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정 아니면 내가 잡아 볼까?’

간첩 포상금이 얼마인지 생각하는 사이에 언덕 위 집에 도착했다.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클라레는 식칼토끼 보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손수건이랑 반창고 챙겼죠?”

“응.”

“마실 물은?”

“아스가 이제 줘야지!”

클라레는 조그만 물병을 받아 가방에 쏙 넣었다.

“아스, 오늘 간식은 뭐야?”

“푸딩을 만들까 해요.”

“힝, 사랑해!”

결혼해 줘!

클라레가 아스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저도 사랑해요!”

오붓한 사랑 고백을 뒤로하고, 클라레는 친구들과 놀다 오겠다며 나갔다.

“조심히 놀다 오세요!”

“네에!”

***

[저희 열차는 마지막 종착역인 샤프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선 두고 가시는 짐이 없는지…….]

수도에서부터 출발한 급행열차가 드디어 종착역에 도착했다.

기차가 멈추자, 오랜 시간 동안 기차 안에서만 머물러야 했던 사람들이 시끌벅적 떠들며 내렸다.

인파 속엔 오케아누스 가족도 있었다.

“으응…….”

아직 잠이 덜 깬 카리나는 아이트라의 손을 꼭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작은 꼬맹이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지켜보던 알버스가 아이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듬직한 품에 안긴 카리나는 빠르게 잠들었다.

기차역을 나오니, 자신들을 마중 나온 차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샤프 영지에 있는 오케아누스 별장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였다.

“너희 둘이 먼저 가거라.”

알버스는 뒷좌석에 카리나를 눕히며 말했다.

“같이 안 가시게요?”

아이트라는 오랜 이동으로 피곤이 쌓였을 아버지를 걱정했다. 그러나 알버스는 코웃음만 쳤다.

“해군 시절에는 이보다 더 오래 자리를 비웠어. 너도 알잖냐.”

“그래도 이젠 나이가….”

“그러니까 네 아빠는 아직도 현역이라고!”

알버스가 투덜거렸다.

“걱정 마라. 나도 당장 뭘 하겠다는 게 아니니까.”

그저 샤프 영지의 번화가를 한번 둘러볼 생각이었다. 간첩을 잡기 위한 준비운동과 비슷했다.

“이곳 현장을 직접 눈으로 파악해 두려고. 그리고 요즘 무슨 사건은 없는지 알아봐야 할 거 아니야.”

“알겠어요.”

그래도 너무 무리는 마시란 잔소리를 덧붙이며, 아이트라는 카리나와 함께 차를 타고 출발했다.

홀로 남은 알버스는 기차역 앞에 서서 광장을 쭉 훑어봤다.

‘수도만큼이나 번화한 곳이로군.’

샤프 영지가 번성하게 된 건 마탑이 폭발한 이후였다.

당시 이곳을 다스리던 귀족이 작위를 반납하기 전에 아드벨로에게 제 땅을 넘겼었다.

샤프의 흡수한 아드벨로는 이곳에 있던 무역항을 크게 늘렸고, 기차가 발명되었을 땐 철도를 깔아 교통 편의를 향상시켰다.

‘그러니 간첩들에겐 샤프 영지만큼 숨기 좋은 곳은 없지.’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수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샤프 영지다. 마음먹고 숨었다면 찾는 데 시간이 소요될 거다.

거기다 바다가 지척이니 언제든 밀항이 가능하고, 경제가 발달한 곳이니 자금 조달도 어렵지 않을 터.

“…같잖기는.”

쯧.

알버스는 간첩들이 머리를 굴리는 게 마땅찮았다.

일단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백발을 풀어헤치고 다니는 거구의 사내는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받았다.

‘음, 너무 대놓고 다니나…?’

이러다가 괜히 주목받아 간첩들이 수상하게 여기고 더욱 숨어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알버스는 안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했다.

‘이제 안 들키겠지?’

알버스는 만족했다.

“…….”

“…….”

자유분방한 백발과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거구.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깡패인가?”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알버스는 사람들의 이목을 더욱 사로잡았다.

그것도 나쁜 의미로.

그렇게 저 혼자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돌아다니던 중.

“음?”

어딘가 낯익은 장소가 보였다.

“여긴…….”

결혼한 레토를 몰래 보러 왔을 적,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봤던 서점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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