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아들라보르 왕국의 명예를 세운 것이 아드벨로라면.
시스토 제국의 눈부신 명성을 만들어 낸 건 피에타였다.
마탑이 폭발한 뒤로, 왕국의 대귀족이 된 아드벨로는 자연히 피에타 가문과 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드벨로와 피에타는 제법 친밀한 관계를 이어 갔고. 그 덕에 글로리아는 선대 피에타 백작의 오러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네 아빠는 그것보다 훨씬 정제된 오러를 보여 줬거든. 숙련된 마력과 비슷한 느낌이었어.”
“맞다, 할머니는 본 적 있었지….”
그리운 추억을 떠올린 노아의 눈빛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글로리아는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하지만 노아는 그 말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되었단 듯이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비교하면 어떤 거 같아요?”
“당연히 서투르지.”
“뼈는 때리지 말고요….”
“네 아빠는 정말 강했어.”
직접 대련한 적도 있었지.
글로리아가 기억하는 피에타 백작의 오러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술이었어.”
예술이란 표현도 부족했다.
피에타 자작이 휘두르는 검날에서 뿜어지는 오러는 어지간한 명검보다 아름다웠다.
우아한 푸른색 오러는 피에타 가문의 고고한 명예를 고스란히 닮았으며, 그의 올곧고 정의로운 신념 그 자체였다.
“오러가 퍼질 때, 마치 불순물이 전혀 없는 푸른 다이아가 흩뿌려지는 것 같았지.”
그렇게나 강한 놈이었는데.
“…….”
말을 멈춘 글로리아는 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눌렀다.
‘운도 지지리 없는 녀석.’
그렇게 강하고 대단한 녀석이 죽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놈을 쏙 빼닮은 핏줄이 제 눈앞에 있기에 더욱.
‘이렇게 보니 확실히 닮았어.’
노아는 죽은 피에타 백작을, 제 친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제국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간…….’
과연 어떻게 반응하려나.
시스토 제국이 7년 전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 중 가장 큰 요인으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피에타 가문의 몰락이었다.
피에타 가문은 전쟁을 반대했다.
그들은 제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아들라보르 침략을 대놓고 비난했다. 더 나아가 모든 귀족의 의무인 참전마저 거부했다.
작위까지 포기하면서.
‘제국의 몇 안 되는 정상인들이었지.’
하지만 그 결과는 멸문이었다.
백작 부부는 살해당했고, 그들의 두 딸은 행방불명 상태였다. 하지만 대부분 전쟁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믿고 있다.
그 덕에 노아와 클라레는 새로운 신분으로 무사히 왕국에 숨어들 수 있었다.
“…어떠냐?”
글로리아가 물었다.
“그놈처럼 할 수 있겠어?”
“당장은 못 해.”
그러나 솔직하게 대답하는 노아의 표정은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꾸준히 연습하면 가능할 거야.”
노아는 자신 있었다.
“7년을 기다렸어.”
부모님의 시체를 제국에 두고, 피눈물을 흘리며 왕국으로 넘어와, 무려 7년을 기다렸다.
“제국에서 겪었던 일과 비교하며 훈련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오히려 즐겁게 해낼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런 노아의 감정은 손에 쥔 마스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겨우 잠잠해졌던 오러가 거친 파도처럼 불안하게 출렁거렸다. 풍기는 분위기도 달라졌다.
“살기 넣어라.”
글로리아가 혀를 찼다.
“여기 훈련장은 네 오러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벌써 감정 기복이 그리 심해서 어쩌려는 거냐, 응?”
그러다 훈련장 무너지면 어디서 수련하려고.
“확!”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잔소리한 덕에, 노아는 금세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곤 아예 오러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검집에 도로 들어가는 마스는 여전히 새 검처럼 반짝거렸다.
“어쨌건 한 걸음 전진했구나.”
글로리아가 앞으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짚어 나갔다.
“일단 그간 못 했던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하겠지. 앞으로 네 훈련은 여기서 단독으로 진행할 거다.”
“대원들에겐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건 내 몫이니 너무 걱정 말고.”
이럴 때야말로 성질 더러운 대장의 오명을 이용할 때라며 글로리아가 씩 웃었다.
‘오명은 아닌데…….’
어쨌건 한시름 놓은 노아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다음은 페미나 문제인가?”
글로리아가 물었다.
“페미나는 어떻게 할 거냐?”
피에타 가문의 부부 검은 아내가 수컷검을, 남편이 암컷검을 썼다. 그리고 두 검을 부부가 나눠 썼다.
“애송이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긴 한데…….”
노아는 확실히 답하지 못했다.
레토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도 될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건 그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부모님 시신이 아직 제국에 있어.”
“마스와 페미나는 부모님의 시신을 찾아 주는 단서야.”
“이 이상의 자세한 사정은 아직 말하기 어려워.”
이럴 날이 올 줄 알고 조금씩 단서를 흘리긴 했다.
그러니 노아가 아드벨로의 양녀란 걸 알고도 침착했던 것처럼 반응할지도 모른다.
‘내 바람일 뿐이지만.’
노아는 새삼 레토에게 비밀을 만들지 말라고 화냈던 과거가 부끄러워졌다.
글로리아도 크게 재촉하진 않았다.
사정이 있다곤 해도, 노아는 적국 출신의 귀족이었다. 그 사실을 밝힌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 문제엔 클라레도 얽혀 있다. 제 출신을 모르는 어린 클라레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신중할 수밖에.
“아직 시간은 많아. 찬찬히 생각하자꾸나.”
“응…….”
“그래도 그 애송이라면, 네가 나라를 팔았다고 해도 꼬리 흔들며 따라올 거 같은데?”
능청스러운 농담에 노아가 피식거렸다.
첫 번째 훈련은 그렇게 끝났다.
***
훈련장에서 돌아온 노아는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여, 코딱지들.”
함께 따라온 아드벨로 대장은 곧장 레토를 찾았다.
“우리 애송이는 어디 갔냐?”
“중장님은…….”
아이스 중령이 사령관실을 가리키기도 전에,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레토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대위!”
그는 허둥거리며 노아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디 힘든 데는 없고? 몸은 괜찮아?”
“조금 전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다친 곳은 없습니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보고 있기 역겨웠던 아드벨로 대장이 레토를 발로 퍽퍽 차며 밀어냈다.
“네 놈은 양심도 없냐?”
다른 대원들 때문에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그녀는 레토가 왜 저리 난리인지 알고 있었다.
“…….”
그 속에서 노아는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다.
묶어 올린 금발 탓에 훤히 드러난 붉은 귀만 애처로울 뿐이었다. 갑자기 허리가 욱신거리는 것도 기분 탓이 아니었다.
“뭐, 됐고.”
아드벨로 대장은 실컷 분풀이한 뒤에야 발을 거뒀다.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무, 무엇입니까…?”
레토는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손으로 붙잡은 채 끙끙거려야 했다.
지은 죄도 있을뿐더러, 대장님이 노아의 할머니란 걸 알게 된 뒤론 상당히 얌전해진 상태였다.
아드벨로 대장이 말했다.
“한동안 벨로 대위는 내가 데리고 훈련 좀 시켜 볼까 하네.”
그 말에 대원들이 술렁거렸다.
“이놈들아, 뭘 또 곡해해.”
쓸데없는 오해가 일어나기 전에 대장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폐쇄된 훈련장 알지?”
그 말에 몇몇은 알고 있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그게 뭐냐며 수군거렸다.
레토가 대신 설명했다.
“본부에서도 꽤 깊은 곳에 훈련장이 하나 있지. 지금은 안전 문제 때문에 폐쇄되었는데, 검술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이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왕국의 마지막 오러 마스터가 애용한 검술 훈련장이었어.”
아드벨로 대장은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계속 두기만 하는 게 아까워서, 다시 보수할 계획이거든.”
“거기에 벨로 대위는 왜 데려가는 겁니까?”
“본부 내에서 검술이 가장 뛰어난 게 벨로 대위니까.”
요컨대.
“노동력.”
아드벨로 대장의 얄미운 엄지가 노아를 척 가리켰다.
“내가 설마 특정 군인을 대놓고 편애하겠어?”
그녀는 질투하지 말라며 특함 대원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대원들이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역시 노예로 부린단 거잖습니까!”
“대위님도 어쩔 수 없는 군인이지 말입니다…….”
“어떤 의미론 중장님보다 더 부려먹는 거 같지 않아?”
“대위님만큼 성실한 분도 안 계시는데…….”
애초에 대원들이 걱정한 건, 노아가 대장의 눈에 들어 승진할지 모른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대장님…….”
레토가 이럴 순 없다며 반발했다.
“차라리 절 부려먹으십시오. 벨로 대위만큼 해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군인이 어디 있습니까!”
“…….”
그제야 특함 대원들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깨달은 아드벨로 대장이 버럭 화를 냈다.
“이 새끼들이!”
진짜 한번 노예처럼 굴려 줄까!
특함 사령부실에선 한동안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
다음 날.
플랜시 전 소장이 재판에 넘겨졌단 소식이 전해졌다.
조간신문 1면을 차지한 흑백 사진 속엔 호송차에 오르는 플랜시 전 소장의 초췌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고문 안 한 거 맞아?”
신문을 읽던 노아가 레토와 글로리아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에이, 우리 해군은 그런 짓 안 해.”
“넌 우리가 무슨 야만인인 줄 아니?”
서운하다고 울분을 토하는 두 사람은 노아 몰래 등 뒤로 거짓말의 저주를 피하게 해 주는 손가락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래도 드디어 벌을 받네요.”
아스는 클라레가 남긴 당근을 먹으며 말했다.
“극형은 피하지 못할 거다.”
“할아버지, 극형이 뭐야?”
“아주 무서운 벌이란다. 감옥에서 평생 나오지 못하는 거지.”
어린 클라레를 위해 단어를 순화했지만, 비스가 말한 극형은 다른 게 아니었다.
플랜시 전 소장이 받을 형벌은 딱 하나였다.
“아이고, 공기 한 사람 분이 줄어들겠네.”
그 말을 끝으로, 글로리아는 재판 방청을 위해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에페레나 전 대위하고 가해자 일당들도 이송된다지?”
“이놈들도 며칠 내로 민간법원으로 이송될 거야. 군에서 저지른 범죄라 형은 더 가중될 거고.”
어른들이 어려운 주제로 떠드는 동안.
“학교 갈 준비 끝!”
새하얀 여름 교복으로 갈아입은 클라레는 신발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뭐 신고 싶은 거 있어?”
다가온 노아가 물었다.
“언니.”
클라레가 비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뾰족한 못 박힌 신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