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짹짹.
부지런한 아침 새들이 창틀에 모여 창문 너머를 구경했다.
그러곤 톡톡, 부리로 유리창을 쪼았다.
“우웅….”
슬슬 잠에서 깨려는 듯 클라레가 칭얼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험난한 잠꼬대 탓에 이불은 일찌감치 발치까지 밀려났고, 잠들 때는 꼬옥 안고 있던 식칼토끼는 바닥에 홀로 쓸쓸하게 떨어져 있었다.
“하아암…!”
이내 잠에서 깬 클라레가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머나, 깨우지도 않았는데 혼자 일어나셨네요?”
때마침 방에 들어온 아스가 기특하다며 클라레를 꼬옥 안아 줬다.
“잘 주무셨어요?”
“응….”
“그러면 기지개 쭉 켜 볼까요?”
아스는 침대에 다시 눕힌 클라레의 팔다리를 조물조물 만지며 위아래로 시원하게 늘여 줬다.
“으어어어….”
“으이구, 아직 어린 분이 할머니 소리나 내고.”
“그치만 시원한걸…!”
기지개를 켜면서 완벽하게 잠에서 깬 클라레는 혼자서 세수하고, 자느라 뻗친 머리도 빗질로 슥슥 정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식당으로 내려간 클라레는 먼저 와 식사 중이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우리 똥강아지도 잘 잤어?”
“오늘은 클라레가 먼저 일어났구나?”
글로리아와 비스가 다정히 인사했다.
“녀석, 어제 노아한테 혼났다며?”
“반성하고 있어. 혼날 만했거든.”
“얘 좀 보게? 뭘 그렇게 잘했다고 덤덤히 말해?”
글로리아의 짓궂은 놀림에 클라레가 볼을 부풀리며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 연연하면 멋없어! 우리는 항상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하여튼 입만 살아서.”
“앞으로는 조심하자꾸나. 바다는 위험하니까.”
“응. 알았어, 할아버지.”
반성할 줄 아는 클라레가 포크를 들었다.
갓 구운 팬케이크에 노른자가 살짝 익은 달걀, 가장 좋아하는 링곤베리 잼과 신선한 샐러드, 아침에 배달 온 우유까지.
어린 아가씨의 성장을 고려해 아스가 만든 아침 식사였다.
“근데 언니랑 형부는?”
입에 팬케이크를 가득 넣어 우물거리던 클라레가 물었다.
식탁에는 아직 주인이 없는 빈자리가 2개 있었다.
“아직도 안 일어나셨나….”
식당 문밖을 힐끔거리던 아스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슬슬 깨우러 가 볼까요?”
“냅둬.”
방해하면 못 쓴다며 글로리아가 음흉하게 웃었다.
“신혼이잖아. 즐길 때라고. 괜히 올라갔다가 험한 꼴 본다?”
그 말에 아스는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반면 비스는 눈꼬리를 처연히 떨어뜨렸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신혼생활이 조금, 아니, 사실은 무척이나 속상했다.
“다들 일어나셨군요.”
때마침 레토가 부스스한 몰골로 식당에 들어왔다.
“안녕히들 주무셨습니까?”
“형부 안녕!”
“처제도 좋은 아침.”
아직 잠이 덜 깬 그는 진하게 우린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너 혼자 일어났냐?”
글로리아가 다 읽은 신문을 레토에게 내밀며 물었다.
“아니요, 노아도 일어났습니다.”
신문을 건네받은 레토는 오만상을 썼다. 홍차가 너무 쓴 탓이었다.
“일어나긴 일찍 일어났는데, 잘 깨지 못하더군요.”
“이상할 정도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니, 지칠 법도 하지.”
글로리아가 심드렁히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니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토는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웬 쟁반 하나를 들고 왔다. 그러곤 그 위에 음식들을 척척 담았다.
“처형, 오늘은 위에 올라가서 먹을게요.”
식당을 나선 레토는 다시 계단을 올라 노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 아픈 거야?”
클라레 혼자 걱정했다.
“아프긴 무슨.”
코웃음을 친 글로리아는 중간에 멈췄던 식사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신혼이라 혈기가 왕성하구만.”
“아스.”
클라레가 입가에 잼을 묻힌 채로 말했다.
“혈기가 앙상하다는 게 뭐야?”
“바로 지금의 저를 뜻하는 말이에요.”
“으음….”
클라레가 눈을 갸름하게 접은 채로 아스를 빤히 바라봤다.
“…실수로 썩은 사과 먹고 퉤퉤 침 뱉을 때랑 똑같은 얼굴이야. 아스 지금 얼굴이 너무 썩었어.”
“바로 그거예요….”
“혈기가 앙상하면 큰일이구만.”
그렇게 되기 싫은 클라레는 열심히 음식을 먹어 댔다.
“이런.”
끝내 수저를 놓은 비스를 다독이며, 글로리아는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늘 노아 훈련 시키려고 했는데…….”
***
아드벨로 대장은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훈련장 하나를 임시 개방했다.
그러나 말이 임시 개방이지, 훈련장 사용을 허가받은 사람은 노아 벨로 단 한 사람뿐이었다.
심지어 이 사실은 극비로 붙여졌다.
“여긴 원래 샤프 영지를 다스렸던 귀족의 검술 훈련장이었어.”
훈련장 안으로 들어선 아드벨로 대장이 말했다.
마탑이 폭발한 뒤로 수많은 귀족이 멸문했는데, 그 중엔 이곳 샤프 영지를 다스리던 귀족도 포함되었다.
“샤프 가문은 아드벨로의 가신이어서, 우리한테 영지를 넘기고 큰 보상금을 받는 걸로 무사히 피해를 넘겼지.”
그리고 지금은 아드벨로와 함께 조선 쪽에서 커다란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역사에 따르면, 왕국에 기록된 마지막 오러 마스터가 샤프 가문 출신이라고 하더구나.”
“아수르 피에타.”
훈련장 정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연무대 위에 올라선 노아가 대답했다. 허리춤에 채워진 검을 만지작거리면서.
“제 고조할머니 되시는 분이 샤프 영지로 시집오셨습니다.”
“그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오러 마스터로 기록되었지.”
그리고 그 아들의 오러를 감당하기 위해 지어진 검술 훈련장에, 노아가 서 있었다.
“인연이란 참 기구한 게야.”
연무대 위로 올라온 아드벨로 대장이 노아를 보며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피에타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자가 지은 이곳 훈련장에, 피에타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가 서 있다니.”
“제 여동생은 어디 갔습니까?”
“걘 마탑 이어야지.”
노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아드벨로 대장은 감개무량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며, 마치 한 편의 비극처럼 외쳤다.
“주책은.”
그러나 노아 역시 조금 북받친 상태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핏줄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그럴 일은 다신 없을 거라 여겼다.
시스토 제국의 명예로운 가문이었던 피에타는 몰락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핏줄은 저와 클라레뿐이었다.
“감상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떠든 건 대장님 혼자였습니다.”
“여기선 할머니라고 불러도 돼.”
말도 편하게 하고.
아드벨로 대장은 노아의 허리에 달린 붉은색 검집을 바라봤다.
“한번 꺼내 봐.”
노아가 마스를 뽑아 들었다.
낡았다 못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검.
“사용할 수 있겠어?”
글로리아가 물었다.
노아는 대답 대신, 손에 쥔 검에 자신의 힘을 천천히 불어넣었다.
개인 함선을 발동할 때처럼 순도 높은 방대한 양의 마력이 여유롭게 검을 휘감았다. 하지만 이가 다 빠진 검은 편식이라도 하듯 마력을 튕겨냈다.
그때.
노아는 제 마력의 성질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순하게 흐르던 마력은 단숨에 거칠어졌다.
통제되지 않는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뻗쳐 나가는 마력은 훈련장 여기저기에 부딪혔다. 마력이 지나간 자리엔 금이 가거나 커다란 홈이 생겼다.
“윽…!”
자신의 힘인데도 통제가 힘들었는지, 노아의 이마 위로 땀방울 하나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거칠게 휘몰아치던 마력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이제 마력이 아니었다.
마력이라기엔 너무 거칠고, 난폭하며, 조금만 방심해도 주변을 금세 파괴해 버리는 날 선 기운.
검은 그제야 그 거친 기운을 맛있게 흡수했다.
“와우.”
글로리아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이 튀어나왔다.
‘장관이군.’
그녀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위대한 순간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이건 좀 힘든데…….’
감탄만 하며 바라보기엔 조금씩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글로리아는 마력으로 두꺼운 보호막을 펼쳤다.
물론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 노아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확실히 대단한 힘이야.’
이쯤 되니 글로리아도 조금 질리려 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리며, 오싹한 전율이 몸을 휘감고 숨통을 죄어 끝내 기절시켜 버릴 듯한 위험한 힘.
‘한땐 마법사보다 명성을 떨쳤었다는…….’
과거.
마법이 전지전능하단 착각에 빠져 우월주의에 흠뻑 취했던 마법사들이 세상에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때 수백의 마법사들을 진압한 게 단 세 명의 오러 마스터였고, 그중에서 가장 강했던 이가 바로 피에타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제압할 때 썼던 검도 바로 저 부부검 중 하나였다.
“할머니.”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글로리아가 노아를 바라봤다.
“다 했어요.”
홀로 태연한 노아가 허공에다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연무대에 휘두른 모양 그대로 기다란 홈이 생겼다.
“어….”
움찔한 노아가 아까보다 조심히 검을 내렸다.
“오랜만이라서 힘 조절이 안 되네.”
“그 정도야 뭐.”
글로리아는 별일 아니라며 태연히 넘겼다.
“원래 여긴 그렇게 부러지라고 만든 곳이니까.”
“그래도 덕분에 무사히 끝났어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듯 광택이 도는 검선, 시퍼렇게 번뜩이는 검날, 검 중앙에 새겨진 뚜렷한 음각까지.
노아의 손에 들린 검은 더 이상 다 낡아빠진 검이 아니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피에타 가문의 부부검 중 하나.
“이게 마스의 진짜 모습이에요.”
이름을 부르자, 검날에서 시퍼런 기운이 연기처럼 술렁거렸다. 조금 전 잔뜩 머금은 노아의 오러였다.
“다가가도 되겠니?”
“응, 괜찮아요.”
“아까 오러를 내보낼 땐 섬뜩했다, 야.”
죽는 줄 알았다며 글로리아가 엄살을 부리자, 노아가 미안하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마력을 오러로 변환한 게 오랜만이라서 그래. 무려 7년 만이라고요.”
“그래도 실수 한 번 안 하고 잘 해냈네.”
노아를 칭찬한 글로리아는 어느 가설 하나를 언급했다.
“마력과 오러, 두 힘의 근원이 같단 가설은 잊을 만하면 제기되었지만, 항상 빛을 못 보고 폐기됐었지.”
이유는 단순했다.
두 힘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원은 같아도 두 힘은 성질이 워낙 상반됐다.
가능성은 존재했지만 실험은 늘 실패하고, 마력과 오러를 둘 다 쓸 수 있는 사례 역시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오러로 바꾸는 건, 피에타 가문의 피로만 이어지는 재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