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었네.”
바라보는 레토는 제 마음이 다 아팠다.
사실 그도 클라레가 바다에서 장난을 친 게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다행히 노아가 야무지게 혼을 냈고, 클라레도 반성한 듯했다. 자신이 굳이 또 나서서 주의를 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대신에 저는 칭찬을 해 주기로 했다.
“잘못한 걸 반성할 줄도 알고, 우리 처제는 정말 훌륭하네요.”
“아주 장하죠.”
아스도 칭찬을 거들었다.
“자기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다고요. 그런데 우리 아가씨는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를 지닌 거예요.”
그전 아무나 못 하는 일이라고 아스가 말했다.
클라레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곤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할 줄 아는 아이니까….”
평소보다 풀 죽은 목소리였지만, 대답은 평소의 클라레처럼 기 세고 씩씩한 답변이었다.
“하여튼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덕분에 노아의 마음도 한결 풀렸다.
“이제 내릴까?”
“으으응.”
좀 더 안길래.
클라레가 어리광을 부리며 노아의 품에 더욱 몸을 파고들었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언니, 자장가 불러 줘.”
침대에 누운 클라레가 제 옆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노아는 기꺼이 몸을 뉘었다.
“토닥토닥 해 줘.”
노아는 클라레의 등을 느리게 토닥거렸다.
“뭐 불러 줄까?”
“그거! 꿈에 아저씨랑 아줌마 나오는 거.”
클라레는 좋아하는 식칼토끼 인형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이는 꿈나라로 여행 갈 준비를 마쳤다.
“그럼 잘 자. 좋은 꿈 꾸고.”
노아는 자장가를 부르기 전에 미리 인사를 나눴다.
“언니도 잘 자.”
“언니가 우리 클라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거 알지?”
“나도 언니가 젤 좋아….”
낯간지러운 고백과 뽀뽀를 주고받은 뒤, 노아는 잔잔한 곡조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제국어로 된 노랫말은 요람에 누운 아기가 잠드는 과정을 묘사하는 내용이었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어떤 악몽도 다가오지 못할 거란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꿈속에서도 우린 널 지켜 줄 거란다.”
자장가를 두 번 정도 부르니, 색색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몸을 살짝 떨어트리니 입을 살짝 벌린 채 잠든 클라레가 보였다.
노아는 클라레가 깨지 않도록 몸을 조심히 일으켰다.
“잠들었어?”
방으로 돌아가니,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레토가 아내를 반겼다.
이번에는 노아가 그의 품에 안겨 푹 쉴 차례였다.
“처제가 오늘은 금방 잠들었네.”
“아까 그렇게 울었잖아. 게다가 그 난리를 치고 왔으니 자기도 피곤했겠지.”
“처제가 우는 건 처음 봤어.”
“네가 나 대신 혼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사랑만 잔뜩 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아이의 인생을 망치게 될 거야.”
노아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눕자마자 앓는 소리가 으으, 하고 새어 나왔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야지.”
“피곤해….”
노아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여러모로 지친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럼 가만히 있어.”
내가 해 줄게.
레토는 노아의 실내화를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힌 뒤, 머리칼을 빗질하고 침대에 눕혀 이불까지 덮어 줬다.
상냥한 친절을 묵묵히 받던 노아가 제 옆에 누운 레토를 신기하단 듯이 바라봤다.
“솔직히 건드릴 줄 알았어.”
“지금이라도 옷을 벗어야 하나?”
“오늘은 그냥 자자.”
노아는 이불을 덮은 채로 몸을 꾸물거리며 레토의 품에 안겼다.
아쉬운 마음이었던 레토는 생각지도 못한 귀여움에 웃음을 푸스스 흘렸다.
“동생이 언니를 빼닮았네.”
어쩜 이리 둘 다 귀여울 수 있지?
레토는 그대로 노아를 끌어안았다. 가슴을 충족시키는 압박감에 노아도 싱긋 웃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놀랐을 줄은 몰랐어.”
팔에 힘을 살짝 푼 레토가 노아의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눈가를 스치는 손바닥이 간지러웠던 노아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도 그랬어.”
노아는 클라레에게 사고가 났단 소리를 들었을 때, 돌아가신 친부모님을 떠올렸다.
“…….”
몸을 살짝 떨어트린 레토가 한 손으로 노아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바닥에 가득 차는 얼굴이 유달리 야위어 보였다.
“부모님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
노아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자신들은 안 죽는다고 했어.”
하지만 부모님은 결국 돌아가셨다. 그리고 노아에게 남은 건 갓난아기였던 클라레뿐이었다.
“클라레가 죽으면, 난 정말 살 자신이 없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레토는 흔해 빠진 위로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심만큼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노아는 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가 괜히 해군이 아니겠어?”
클라레를 비롯한 아이들이, 오늘처럼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다가 눈물 쏙 빠지도록 혼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되도록.
그렇게 평화를 지켜내는 게 자신들 해군의 일이었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레토는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한 노아를 칭찬했다.
“…칭찬받으니 기분은 좋네.”
휘둥그레졌던 푸른 눈동자가 사르르 흘러내리듯 휘어졌다.
레토는 그런 노아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뭐에 홀린 것처럼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쪽쪽 맞췄다.
빈틈 하나 없는 뽀뽀 연사에 노아가 끝내 웃으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런데 여보.”
마지막으로 이마에 뽀뽀를 진하게 하던 레토가 물었다.
“난 칭찬 안 해 줘?”
칭얼거리는 말투엔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나도 처제 사랑하고 예뻐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너무 처제한테만 애정을 쏟은 거 아니야?”
레토가 입술을 삐죽이며 커다란 덩치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요즘 못 들었고.”
“아니, 뭘 새삼….”
“새삼이 아니지. 노아 네가 그랬잖아.”
제발 말 좀 하라고.
반성하고 배울 줄 아는 남편은 이제 사랑 표현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부족함도 조금 느꼈다.
“우리 아직 신혼이야. 눈만 마주쳐도 후끈거려야 한다고.”
“…….”
“그런데 나만 신혼이야? 설마 결혼했으니까 관심 없어? 어항에 넣은 물고기라고 쳐다도 안 봐?”
우는 소리를 내며 칭얼거리던 레토가 슬쩍 노아를 힐끔거렸다.
‘……?’
이렇게 까불었는데도 반응 하나 없다니.
이쯤 되자 레토는 조금 무서워지려 했다.
‘화났나?’
관심 좀 끌어 보려고 일부러 짓궂게 말한 거였다.
그러면 노아가 적당히 하라며 제 엉덩이를 꼬집거나 가볍게 토닥여 주길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그럴 마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걱정되는 마음에 클라레를 혼내다가 울리기까지 했고, 본인도 피곤하다 했으니 그럴 마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적당히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아니야.”
힘없이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뭔 소리인가 싶어 상체를 살짝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노아가 레토의 상의 옷자락을 한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자기변호에 레토는 멍하니 눈만 끔뻑거렸다.
“너도 알잖아. 내 말투가 딱딱하고 정 없는 거. 표정도 싹싹한 편도 아니고. 그래서 네가 처음에 나 봤을 때 그랬잖아. 왜 그렇게 지루해 보이냐고.”
개새끼였네, 내가.
레토는 아내 되실 분도 몰라보고 입방정을 떨던 과거의 자신을 조용히 욕했다.
그러던 중.
“…….”
그의 눈에 붉은 귀가 보였다.
“근데 나, 너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네가 날 슬프게 했을 때도 묵묵히 옆에 있었던 거야.”
아.
노아가 정말 피곤하구나.
그리고 사람은 술에만 취하는 게 아니라, 피곤함에 취해도 이런 진담을 내뱉을 수 있었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레토는 우선 눈에 띄지 않도록 심호흡을 길고 느리게 반복했다.
안 그랬다간 제 심장이 광분해 터지려는 소리가 전부 들킬 거 같았다.
‘어떻게 얘는 하루도 안 예쁠 때가 없지?’
고해 아닌 고해를 듣고 알았다. 아무래도 노아는 제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토는 도리어 그 모습에 반했다.
저 무심한 얼굴로도 다채로운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고, 조곤조곤 발음을 신중히 내뱉는 목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게다가 레토는 알고 있다.
노아가 저에게만 보여 주는 수줍은 미소, 가끔 저를 유혹하려고 용기 낼 때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
레토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 버렸다.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 벌써 숨이 가빠지고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심호흡이 아무 소용이 없네.’
조금 전 인내가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빠르게 인정한 레토는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어….”
제 등을 감싼 팔이 스르륵 풀리자, 당황한 노아가 어디 가냐고 물으려고 했다.
“…어?”
하지만 질문은 앞 음절만 황망하게 끊어지듯 나왔다.
“우리 신부님.”
몸을 일으킨 레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노아를 사이에 둔 채로 지탱하듯 놓여 있었고, 두 다리 또한 창살처럼 노아의 다리를 가두고 있었다.
“사람이 그러면 안 됩니다.”
점잖게 타이르는 레토의 얼굴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피곤하다고 해서 참고 넘어가려는데, 왜 사람을 이렇게 부추기는지.”
“내가 뭘 했다고….”
억울해진 노아가 움찔했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켜진 침대 옆 수면등의 은은한 불빛에 반사된 붉은 눈동자가 흉포하게 번뜩였다.
마주친 붉은 눈이 하늘 위 달님처럼 부드럽게 휘었지만, 그 속에 잠재된 의지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심상찮은 기류를 느낀 노아가 슬그머니 백기를 들었다.
“우리, 오늘은 그냥 자기로 한 거 아냐?”
“그러려고 했는데….”
콩, 하고 이마를 붙인 레토는 음흉한 본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야, 나 아까 피곤하다고….”
“우리 여보는 가만히 있어.”
커다란 손이 도둑질하듯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다 할 테니까.”
그 와중에 상냥한 남편은 아내에게 약속했다.
“최고의 아침을 맞이하게 해 줄게.”
아침에 새가 짹짹 지저귀는 소리를 자명종 삼아 깨워 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어둠 속 유일한 불빛이었던 수면등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