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클라레 벨로는 해군 내에서 아주 유명했다.
웃긴 건 군인들이 클라레의 얼굴이나 이름은 몰라도, 그 아이의 무용담만큼은 하나 정돈 알고 있단 점이었다.
“내가 아는 것 중 하나는….”
평화로운 특함 사령부실.
마레이 1학년생들이 본부 내 해수욕장에서 안전 수영을 배우는 동안, 특함 대원들은 자신들이 아는 클라레의 무용담을 하나씩 꺼냈다.
첫 번째 순서는 레토였다.
“몇 년 전인데, 생도들이 가족들과 만나는 휴게실에서 웬 어린애가 학생들 앞에서 춤을 췄다는 거야.”
그런데 하필 춤이 고기잡이꾼들이 생선이 한가득 잡힌 어망을 끌어 올리는 모습을 흉내 낸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기여차, 어기여차. 막 이런 기합 소리를 내면서 춤추니까, 학교 선생들이 다 나와서 구경했다더라.”
그리고 사탕이나 과자 같은 주전부리를 한 소쿠리나 받아 갔다고 한다.
“내가 이걸 볼트리아 교장한테 들었거든?”
말을 하다 멈춘 레토가 노아를 힐끔거렸다.
“…….”
그러나 노아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아니, 그녀는 이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귀와 입을 닫고 서류 작업에만 몰두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단 듯이.
그런 노아를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레토도 굳이 그 이상 건드리지 않고 제 말을 이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귀에서 그 아기 목소리가, 어기여차 하는 기합 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더라.”
주전자 물 끓는 소리도 어기여차.
마동력차 시동 소리도 어기여차.
라디오 기계 돌아가는 희미한 소리도 어기여차.
“술자리에서 듣기로는 그 아이 춤추는 게 너무 재밌어서, 가족이었던 생도에게 외박 허락을 해 줬다더라.”
“…….”
노아는 끝내 하던 일도 멈추고 두 손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너무 기특하고 창피한 탓이었다.
대신 노아와 한방을 썼던 생도 동기들이 그날을 대신 증언했다.
“그때지? 왜, 유치원에서 배운 거 가르쳐 주겠다고….”
“아스 언니는 사진 찍는다고 바빴고, 노아는 제발 그만하라고 뜯어말리느라 바빴지.”
“우리는 배꼽 잡고 웃었잖아.”
“아미 너 그때 웃다가 살짝 지리지 않았냐?”
“네 이야기 아니야? 화장실 급하게 달려가더니?”
그리운 시절을 추억하는 아미와 셀린의 얼굴은 아련하기만 했다.
“대위님 여동생분은 대단하지 말입니다….”
아직 클라레의 전설을 제대로 모르는 호메스는 얼떨떨했다.
“난 사실 대위를 동정할 처지가 못 되지.”
아이스 중령이 노아를 동정했다.
그에게도 클라레 못지않게 씩씩한 딸이 한 명 있었다. 심지어 그 딸은 클라레와 소꿉친구였고, 지금도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 사이였다.
“저는 아는 게 없지만.”
다음 차례는 뮤트 플라치드 병장이었다.
조용한 성정의 그가 먼저 나서서 말을 하는 건 꽤 드문 일이라, 대원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를 향했다.
“그때, 장군님 전송식 때….”
돌고래 구경하다가 난간에 얼굴이 끼여서 소리치던 클라레를 떠올렸다.
“목소리가 아주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너 괜찮냐?”
얼굴 빨개.
아미는 뒤늦게 노아를 걱정했다.
“전 휴일에 물건 사러 시내 나왔다가, 바닥에 드러누워서 다리를 바람개비처럼 돌리던 모습을 본 적 있습니다.”
“예전에 대위님 서류에 스티커 붙였던 거 기억들 하십니까?”
“유치원 때 해군 본부 견학 와서는 정원 나무에 올라탔잖아.”
“그러고는 혼자 못 내려오니까 언니를 부르며 울었잖습니까.”
“그때 누가 구했더라….”
“지나가던 군종실장님이 올라가 구해 주셨습니다.”
쏟아지는 제보들에 노아는 눈앞이 아찔했다.
모두 즐겁게 떠드는 와중에, 노아만 홀로 쓸쓸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그래도 씩씩한 게 좋잖아.”
실컷 떠든 뒤에야, 레토가 노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자고로 어린이란 그렇게 사고도 치면서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거지. 우리 처제는 잘 자라고 있어.”
안 그래?
레토가 방긋방긋 웃으며 노아에게 물었다.
“닥쳐.”
험악한 거절에 레토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나저나 애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분위기를 환기할 겸, 아이스 중령이 바다에서 열심히 물장구치고 있을 아이들을 걱정했다.
“오늘은 파도도 얌전하니 괜찮지만, 무서워 우는 애들이 간혹 나오잖아.”
“전 제 동생이 애들을 주동해 사고 치진 않을지, 그게 걱정입니다.”
“애들이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 뭐.”
너무 그리 걱정하지 말라며 아이스 중령이 노아를 위로했다.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안전요원으로 아이들 수업에 참여했던 로간이 돌아왔다.
“벨로 대위님.”
살짝 다급한 목소리가 노아를 찾았다. 부르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노아는 다짜고짜 로간의 팔을 붙잡았다.
“클라레야?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한 노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갔다.
“다쳤어?”
“약간의 사고가 있었는데….”
“얼마나 다쳤는데?”
“저기, 잠깐….”
“노아.”
곁으로 다가간 레토가 노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지, 미타스 상사?”
물어보는 레토의 표정이 살짝 긴장된 채였다.
“그게….”
욱신거리는 팔을 서너 번 쓸던 로간이 겨우 말했다.
“클라레 벨로 양이 의무실에 있습니다.”
“많이 다쳤나?”
“그런 건 아닌데….”
노아와 레토의 눈치를 살피던 로간이 솔직하게 털어놨다.
“수영 연습 중에 수중 발레 하겠다며 잠수하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물을 좀 마셨습니다.”
“…….”
“…….”
로간은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은 하지도 않았건만, 충격으로 굳어 버린 두 사람을 보자니 괜히 미안하고 죄송했다.
“…저기.”
아미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웃어도 됩니까?”
예의 바른 부하는 눈치껏 허락을 구했다.
***
아미에게 엎드려뻗쳐를 1분 하라고 명령한 뒤, 노아와 레토는 서둘러 의무실로 향했다.
“많이 놀랐으면 어쩌지….”
“괜찮을 거야.”
“그래도 물을 먹었다잖습니까.”
노아는 가는 내내 클라레를 걱정했다.
“중장님은 걱정도 안 됩니까?”
괜히 예민해진 노아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당연히 걱정되지.”
레토는 진심이었다.
“근데 내가 아는 처제는 고작 다리에 쥐 나서 물 좀 먹었다고 울거나 겁먹진 않을 거 같아서.”
“그렇기야 하지만, 내심 놀랐을 겁니다.”
낯선 곳에서 다칠 뻔한 동생이 저를 찾으며 엉엉 울 것을 생각하니, 노아는 제 눈이 뜨겁게 시렸다.
레토도 더는 괜찮을 거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착한 의무실엔 클라레가 없었다.
“아, 대위님.”
노아를 알아본 의무병이 조금 전에 막 작성한 진료 차트를 넘기며 말했다.
“여동생분 찾으러 오셨습니까?”
“동생은 어디 갔지?”
“조금 전에 담임 선생님이랑 함께 나갔습니다. 사탕도 야무지게 한 봉지나 들고 갔습니다. 친구들이랑 나눠 먹을 거라고!”
심지어 사탕값은 언니 이름 앞으로 외상했단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동생을 발견한 건 해군 본부에서 가장 예쁘기로 소문난 등나무 정자 아래였다.
때마침 여름에 들어서면서 보랏빛 등나무꽃이 점점 지기 시작할 때였다.
“술도 안 마셨는데! 취한 것 같아!”
바로 너에게에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따라 떨어지는 꽃잎 아래서, 금발을 풀어헤친 채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는 아이가 있었다.
“너의 눈빛은 증류수! 깨끗하니까 도수가 82도!”
좋아하는 9인조 여자 가수 ‘두배로’의 여름 노래를 따라 부르는 마레이 학교 1학년.
지나가던 군인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기어코 박수까지 받는 금발의 소녀.
“…….”
노아는 차마 제 여동생이 난리치고 있는 저곳으로 가지 못했다.
황폐해진 푸른 눈동자는 신명 나게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여동생을 원망스레 노려보고 있었다.
“큭, 크윽…!”
레토는 배를 부여잡은 채로 주저앉아 끙끙거렸다.
“아이고 배야…!”
“웃기십니까?”
“…….”
레토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에 침묵을 택했다. 속 터지는 노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클라레의 무대가 너무 웃겼다.
가까스로 호흡을 진정시킨 레토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 진짜 결혼하길 잘한 거 같아.”
저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가족이 되었다니.
“사랑해, 노아.”
“공사 구분하십시오.”
들러붙으려는 남편을 한 팔로 밀어내면서, 노아는 땅이 꺼질 정도로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
같은 시각.
샤프 영지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오른 알버스 오케아누스 장군은 어린 손주에게 자신이 봤던 사돈 댁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말 예쁜 신부였단다.”
“벨로 대위는 수도에서도 유명하니까요.”
유행하는 소설책을 읽으며 쉬던 아이트라가 덧붙였다.
노아가 모델인 해군 홍보물 사진은 수도에서도 유명했다.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아름다운 모습에 홀려 사진을 훔쳐 가는 일도 빈번할 정도였다.
알버스는 국방부 장관이란 점을 이용해, 그 사진을 몰래 구해다가 카리나에게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사실, 카리나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형님은 아주 크니까, 집이 작으면 불편할 거 같아요.”
귀족들이 사는 저택과 비교하면 평민들의 주거 건물은 아주 작고 비좁았다.
그래서 레토가 인형의 집처럼 작고 좁은 곳에서 쭈그리고 잘까, 어린 동생은 늘 걱정이었다.
이에 알버스가 껄껄 웃었다.
“걱정 말거라. 사돈댁은 정말 크거든.”
“우리 집처럼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호수 근처에 있는 여름 별장 정도는….”
꼬르륵.
“…….”
“…….”
알버스와 아이트라가 조용히 카리나를 응시했다.
“으으…!”
황급히 두 팔로 배를 감춘 카리나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 배에서 이렇게 커다란 소리가 나다니, 심지어 그걸 어른들에게 들키다니.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도 들 수 없었다.
“일찍 나오느라 아침을 적게 먹긴 했지.”
조용히 웃음을 삼킨 아이트라가 근처에 있던 하녀를 불렀다.
“여기 기차에서 파는 감자 과자와 오렌지 주스가 인기라더구나.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사 오렴.”
“그래도 돼요?”
마침 기차 구경이 하고 싶었던 카리나는 하녀의 손을 잡고 매점으로 향했다.
“다들 잠시 자리를 비켜 주렴.”
고용인들을 물린 아이트라가 읽던 책을 덮었다.
“…남부에 간첩이 숨어들었다고요?”
“그렇다고 하더구나.”
알버스가 굵직한 다리를 느릿하게 꼬며 대답했다.
“그래서 국왕의 명으로 내려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