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간지러워!”
“하여튼 요 귀여운 꿀꿀이!”
“나는 귀여운 아기 돼지!”
그때.
“…….”
슬그머니 나타난 레토가 다정한 자매를 부러운 시선으로 훔쳐봤다.
“나도 끼워 주라. 둘만 다정하고 질투 나.”
“형부! 나 어부바!”
“가만히 좀 있어 봐.”
노아가 클라레를 넘겨주니, 레토는 능숙하게 클라레를 제 등에 업었다.
팔을 뒤로 돌려 아이의 허벅지를 안정적으로 받친 자세가 이젠 익숙하다 못해 지적할 곳 없이 완벽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레토가 물었다.
“전화가 왔어.”
“친구? 치티아 중사?”
“시댁에서.”
몸을 둥기둥기 흔들던 레토가 멈칫했다.
“형부! 계속 둥기둥기 해야지!”
안정적인 흔들림이 멈추자, 등에 업힌 클라레가 승마하듯 두 발로 레토의 허리를 가격했다.
“컥!”
묵직한 통증에 레토는 그대로 몸을 앞으로 고꾸라트렸다.
***
예기치 못한 사고로 중단된 대화는 다음 날 출근 중에 이어졌다.
“후작님이 오신다고?”
소식을 들은 레토는 놀란 것도 잠깐, 곧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시기가 절묘하네.”
“그렇지? 전화 따로 안 드려도 되겠어.”
그런데 창문 좀 열어도 돼?
노아가 점점 더워지는 날씨를 못 이겨 손부채질했다. 레토도 마찬가지였는지 앞쪽 창문을 살짝 내렸다.
달리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스쳐 가는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후더분하던 차량 내부를 빠르게 식혔다.
한결 편안해진 노아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좀 죄송하네….”
노아는 오케아누스 후작을 향한 일방적인 악감정을 어느 정도 배제한 상태였다.
그래서 결혼한 아들 보러 먼길 내려오는 후작과 장군님께 간첩 몰래 잡게 도와달라고 청하는 게 새삼 미안했다.
“…….”
아니, 새삼도 아니지.
노아가 다시 생각해 봤다.
“…너무 몰염치한 짓 같아.”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해.”
사실, 노아보다 더 미안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바로 레토였다.
연락도 잘 안 하는 판국에 이럴 때만 도와달라고 연락하려니 후안무치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그래도 레토가 이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장군님은 의협심을 지니신 정의로운 강자셔.”
어릴 적부터 지켜본 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백사자는 이런 일을 알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터였다.
“반드시 응해 주실 거라고 믿어.”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노아는 아직 오케아누스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저렇게까지 긍정적으로 믿지는 못했다.
하지만 레토는 믿었다.
“믿어 줘서 고마워.”
룸미러에 비친 레토의 눈웃음이 화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족분들 이야기 해 봐.”
노아가 슬그머니 물어봤다.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하나는 시댁 식구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레토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노아는 일부러 오케아누스를 ‘가족분들’이라고 지칭했다.
‘싫어하는 게 아닌 건 분명한데….’
저의 사랑스러운 겁쟁이는 오케아누스를 존경하지만, 지나치게 굽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 레토의 대답 여부에 따라 오케아누스를 어떻게 대할지 판단하기로 했다.
예의는 당연히 지킬 생각이나, 얼마만큼 거리를 둬야 할지 정도는 미리 고려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아주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다.
“일단 후작님이랑, 장군님….”
레토는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제 가족 구성원을 읊었다.
“그리고 카리나.”
“카리나?”
처음 듣는 이름을 노아가 따라 되물었다.
“내 동생.”
“동생이 있었어?”
깜짝 놀라던 노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맞아, 후계가 따로 있었지.’
오케아누스 후작에게 양자가 둘 있는데, 그중 두 번째 자식을 후계자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후계를 잇는 둘째는 오케아누스 피가 이어진 방계 출신이었다.
그 탓에 레토는 오케아누스의 성을 받았음에도 완벽한 귀족 대우를 받지 못했다.
지난번 가혹 행위 사건 때만 해도, 레토가 평민과 결혼했으니 다 떨어진 신발끈이라며 무시하던 가해자들의 태도가 그 예였다.
‘…그나저나, 동생이라고 하는구나.’
그것도 저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클라레와 놀아 줄 때마다 볼 수 있는 함박웃음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지만, 상대를 소중히 여긴다는 진심만큼은 똑같았다.
“동생 이야기 좀 해 봐.”
노아가 물으니, 레토는 기다렸단 듯이 자랑했다.
“귀엽고 착한 아이야.”
동생을 자랑하는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마음씨가 곱고 여려서, 어릴 적부터 고용인들한테 예쁨을 많이 받았어. 머리도 좋아서 나보다 동물 이름도 훨씬 많이 알고 있어.”
그의 자랑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한 번은 휴가 때 수도 저택에 들렀는데, 병아리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말할 때마다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살짝 수다스러워진 목소리에선 동생을 향한 애정과 대견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레토를 바라보는 노아도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다행이네.’
그가 제 가족을 사랑하고, 사랑받은 것 같아서.
‘알면서 왜 그리 저자세인진 모르겠지만….’
한시름 놓은 노아가 레토의 귓불을 살살 만졌다.
부드러운 접촉에 자랑을 멈춘 레토가 싱긋거리더니 슬쩍 고개를 노아 쪽으로 기울였다. 더 만져 달란 뜻이었다.
노아는 기꺼이 레토를 쓰다듬어 줬다.
“그런데 동생 분은 몇 살이야?”
“처제랑 동갑이야.”
“어머.”
이젠 노아도 어린 도련님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해군 기지 영역에 접어든 레토가 아쉬움을 감추며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오늘이었나? 처제가 해군에 오는 날이?”
“어….”
순식간에 침울해진 노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 도련님 생각에 살짝 들떴던 마음이, 왈가닥 여동생을 떠올리기 무섭게 체한 것처럼 답답해졌다.
“넌 갑자기 또 왜 그래. 걱정돼서 그래?”
붉은 애마는 해군 본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상관과 부관이 되어 공사 구분하기 전, 둘은 잠시 주차장에서 대화를 마저 이어 갔다.
“오늘 마레이 1학년들 안전 수영 배우러 오는 날이잖아.”
샤프 영지는 바다가 지척인 만큼 해양 인명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곳 중 하나였다.
그 탓에 마레이 학교는 아예 정규 과정에 ‘안전 수영’이란 과목을 만들어 넣었다.
클라레는 오늘 그 수업을 들으러 해군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매년 하는 교육이고, 안전사고 한 번 없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안전띠를 푼 노아는 손바닥으로 가슴 언저리를 살살 쓸었다. 벌써 위장병이 도는 기분이었다.
“너도 알지?”
노아가 비장히 물었다.
“클라레의 전설 말이야.”
“아….”
그제야 레토도 살짝 아픈 표정을 지었다.
노아는 예언했다.
“오늘, 그 전설이 갱신될 거 같아.”
***
마레이 학교는 정규 과정으로 ‘안전 수영’이란 과목을 개설했다.
봄, 가을, 겨울에는 다양한 재난 및 사고 현장에서 몸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고, 여름에는 수영을 배운다.
속도를 겨루는 스포츠 수영 대신에, 바다에서 조난당했을 때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수영 수업 때는 일상복을 입을 때가 많았다.
오늘이 바로 그랬다.
“선생님, 물고기 볼 수 있어요?”
“난 돌고래가 보고 싶은데!”
“선생님! 클라레가 바닷물 먹으려고 해요!”
“먹는 거 아니에요! 간만 본 거예요!”
야외 수업으로 잔뜩 들뜬 1학년 아이들은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끊임없이 떠들었다.
짝! 짝! 짝!
선생님이 손뼉을 크게 쳤다.
“친구들, 우리들은 몇 학년?”
“마레이! 1학년!”
“선생님이 말할 땐?”
“조용히! 집중!”
선생님이 선창하자, 아이들이 따라 씩씩하게 후창했다.
이젠 제법 아이들을 잘 통솔하게 된 선생님에게선 꽤 노련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금부터 군인분들께서 수영을 가르쳐 주실 거예요.”
선생님은 수영 수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군인 선생님 따라 준비운동을 한 뒤에, 배를 타고 저기까지 갈 거예요.”
해변에서 살짝 떨어진 바다 위에 양식장처럼 생긴 수영장이 있었다. 어린이들의 평균 키를 고려하여 만든 훈련장이었다.
설명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군인이 나타났다.
“필승!”
“마레이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멋들어진 경례와 함께 군인들이 소속을 밝혔다.
“저는 해군 본부 예하 특수 함선 사령부 소속, 로간 미타스 상사입니다.”
“마찬가지로 특수 함선 사령부 소속, 메델라 사나 하사입니다. 마레이 학생을 만나 영광입니다.”
와아!
아이들이 박수로 열렬히 환영했다.
“군인이다!”
“역시 해군은 엄청 멋져!”
“나도 크면 군인 될 거야!”
아이들의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호의에 두 군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그게 아이들이지 않은가.
“특함! 특함이면!”
그때, 웬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수영하기 편안하게 금발을 동그랗게 올려 묶은 예쁘장한 여자아이였다.
“네, 친구분.”
뭐가 궁금하십니까?
로간이 다정한 미소로 물었다.
‘근데 누굴 좀 닮았는데?’
바로 조금 전에 부대에서 봤던 누군가와 소름 돋게 닮은 아이가 질문했다.
“선생님은 울 형부 따까리 맞죠?”
“…….”
미소 짓던 로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몇 번째 따까리예요? 둘 다 울 형부랑 언니 따까리 맞죠?”
옆에 있던 보르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야, 선생님들이 클라레네 형부 아저씨 따까리래.”
“따까리가 뭐야?”
“어른들은 부하를 그렇게 불러. 울 할머니가 가르쳐 줬어.”
클라라가 으스대며 아는 척했다.
“근데 형부 아저씨가 누구야?”
“클라레네 언니의 남편이래.”
“나 누군지 알아. 빨간 차 모는 잘생긴 오빠!”
“엄마가 그랬는데, 그 오빠는 얼굴도 잘생겼는데 몸도 좋고 돈도 잘 벌어서 아주 금상첨화라고 했어.”
“확실히 그런 남자는 찾기 힘들지. 울 엄마도 결혼식 때 갔다가, 아빠 얼굴 보고 화냈잖아.”
호기심 많은 마레이 1학년들은 자기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으며 수런수런 떠들었다.
“…….”
“…….”
아이들의 대화는 생각 이상으로 수준 높았다.
로간과 메델라는 차마 끼어들지도 못한 채, 허탈한 심정으로 학생들의 이야기 주제가 ‘결혼 자금은 언제부터 모아야 하는가?’로 흘러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
“상사님….”
메델라가 넌지시 물었다.
“아까 그 금발 여자애….”
“네 추측이 맞을 거야.”
로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말로만 들었던 해군의 전설을 영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