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책상에서 아예 일어난 아이트라가 소파에 앉으며 카리나를 불렀다.
카리나는 쭈뼛거리면서도 피하지 않고 아이트라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손에 든 은쟁반을 내밀었다.
“남부 해군에서 왔어요. 노아 벨로라는 이름이에요.”
똑똑한 카리나는 형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편지를 전해 줘서 고맙구나.”
아이트라의 감사에 카리나의 얼굴이 수줍게 물들었다.
“하지만 이런 건 고용인들의 일이란다.”
네가 그들의 일을 빼앗으면 안 돼.
소파에 앉은 아이트라는 카리나를 제 옆에 앉히며 나긋하게 설명했다.
“그러면 저들은 일도 안 하고 돈만 축내는 버러지가 된단다?”
“아이에게 무슨 표현을 그리하십니까.”
카리나의 뒤를 따라왔던 집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아이트라가 괜히 변명했다.
“이왕이면 순화된 단어로 써 달라는 뜻입니다.”
“집사, 요즘 계속 기어오르네.”
“가주님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돕는 것 역시, 제가 돈을 받으면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니까요.”
집사는 두툼한 손수건으로 감싼 편지용 칼을 건넸다. 카리나가 들고 오기엔 위험한 물건이라 따로 챙겼다.
봉투를 뜯은 아이트라는 편지지를 꺼냈다.
편지지를 읽는 아이트라의 눈이 좌우로 느리게 움직였다.
거기에 맞춰, 소파에 앉으면서 붕 뜬 카리나의 다리도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형수님이 뭐라고 썼나요?”
카리나가 조심히 물었다.
어린아이가 꼬박꼬박 형수님이라 호칭하는 것이 귀여웠던 아이트라가 싱긋 웃으며 편지지를 내렸다.
“편지를 늦게 답해서 미안하다고 하는구나.”
“그건 괜찮습니다. 해군은 바쁘니까요.”
카리나는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해군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존경하는 형님이 해군 제독으로 있기 때문이다.
“형수님도 형님처럼 특함 대원이시죠?”
“그래. 아주 강하면서 아름다운 사람이라더구나.”
“저도 만나 뵙고 싶어요.”
“그럼 만나러 가 볼까?”
기쁜 제안에 카리나의 눈이 똥그래졌다.
아이트라가 편지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 형수님이 언제든 만나러 와도 된다더구나.”
“와아, 정말이요?”
“할아버지가 오시면 이야기해 볼까?”
백발을 사자 갈기처럼 자유분방하게 풀고 다니는 오케아누스 장군.
그를 떠올린 카리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토라진 목소리를 냈다.
“할아버지는 치사해요.”
그는 얼마 전에 홀로 샤프 영지에 다녀왔었다.
레토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갔던 알버스는 그가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몇 번이고 카리나에게 설명해 줬다.
“삐쳤니?”
“삐, 삐친 건 아니고…….”
“삐쳐도 괜찮단다. 나도 조금 서운했으니까.”
“그쵸? 역시 할아버지가 조금 나빴던 거죠?”
“아주 많이 나빴지.”
두 모자는 눈을 마주하며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퇴근한 알버스를 마중 나간 카리나가 남부에서 온 편지 소식을 전해 줬다.
“형수님이 우리가 보고 싶대요!”
“정말? 진짜로?”
알버스는 커다란 팔에 카리나를 번쩍 안아 든 채로 아이트라를 찾았다.
“며늘아기가 편지를 보냈다며!”
“진정 좀 하세요.”
아이트라가 이야기를 나누던 집사를 보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집에선 목소리를 낮추세요.”
“내 집에서 내가 마음대로 소리도 못 내?”
“카리나 귀에 무리가 갈지 모르잖아요.”
그제야 알버스가 커다란 손으로 제 입을 턱 막았다.
“…큰 꼬맹이는 잘 지낸다냐?”
알버스가 아까보다 신경 써서 목소리를 조용히 낮췄다.
아이트라는 제 품에 넣어 둔 편지를 꺼내 아버지에게 건넸다.
“잘 지내고 있다네요.”
“음, 그럼 다행이구나.”
“어쨌건 아버지만 휴가를 내시면 이번에 좀 길게 남부로 내려가 볼까, 싶은데…….”
아이트라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짧게 고민하던 알버스가 카리나에게 물었다.
“작은 꼬맹이.”
“네, 할아버지.”
“남부에 가고 싶으냐?”
카리나가 똘망똘망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꾹 다문 입술과 말간 볼살엔 형님이 계시는 남부로 당장 달려가고 싶단 마음이 도장처럼 박혀 있었다.
본심을 숨기지 못하는 천진난만함에 백사자가 호탕하게 웃더니 카리나를 바닥에 내려 줬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가서 짐 싸!”
“아버지?”
“할아버지!”
아이트라는 당황했고, 카리나는 환호했다.
“3일 밤만 자면 남부로 갈 수 있게 해 주마.”
“저, 정말요?”
“물론이지! 이 할아버지가, 오케아누스의 백사자가 그 정도도 못 할 거 같으냐?”
알버스는 자신이 얼마 전에 기차를 탔던 경험을 떠올렸다.
“기차를 타고도 샤프 영지까지 무려 이틀이나 걸렸지. 그러니 갈아입을 옷과 간식을 꼭 챙기도록.”
“미리 챙겨도 돼요?”
“할아버지가 나중에 가서 검사할 거다!”
장군님의 호령에 카리나는 서둘러 방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아이트라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기차표가 그렇게 쉽게 구해지나요?”
수도에서 샤프 영지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기차뿐이었다.
특히 어린 카리나와 동행하려면 가장 빠른 급행을 타야 했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틀이 꼬박 걸렸다.
“급행은 아무리 귀족이라도 예약하지 않고는…….”
“자.”
아이트라는 보고도 믿지 못했다.
알버스의 손에는 그 귀한 급행 열차표가 세 장이 들려 있었다.
“특등급 칸 하나를 통째로 빌렸지.”
“아버지!”
“잔소리하기 전에 일단 들어 봐.”
기묘한 웃음이 알버스의 얼굴에 그려졌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복도에 자신들 말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백사자가 한 번 더 주위를 기민하게 살폈다.
“국왕의 밀명이란다.”
신중함이 가미된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았다.
“남부로 당장 내려가라는구나.”
***
아드벨로의 큰 주인이 돌아오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언덕 위 벨로 저택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우선, 가출했던 아티가 붙잡혔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장손은 전 애인한테 얻어맞고, 할머니한테 얻어맞은 뒤에 남부에 간첩이 숨었단 엄청난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 바로 자취를 감췄다.
“형님은 밧줄 푸는 마법이라도 배운 거야?”
레토는 제 방에 덩그러니 남은 의자에 바닥에 뱀 허물처럼 널브러진 밧줄을 가리키며 노아에게 물었다.
“저것도 재능이라면 재능 같은데…….”
“내가 진짜 남사스러워서…….”
노아는 남편 보기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티를 찾지 않았다.
“남부 어디에 쥐새끼마냥 숨어 있겄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란다.”
레토는 아티가 저 모양이 된 이유가, 이토록 너그러운 가정 환경 때문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봤다.
그리고 아스는 깨졌던 그릇을 전부 치우고, 새것으로 진열장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깨진 그릇들은 버리지 않고 창고 구석에 넣어 뒀다.
“깨졌던 그릇, 오빠가 아스한테 선물해 준 거거든.”
클라레는 영문을 모르는 레토에게 비밀이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형부도 아는 척하면 안 돼요. 알았지?”
“알겠습니다. 우리 둘만의 비밀인 거네요.”
“형부 빼고 다 알고 있어서 비밀은 아니야.”
“…음, 또 울 거 같네요.”
아스는 아무 일 없단 듯이 행동했고, 집안 분위기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외에는 자잘한 소식들뿐이었다.
클라레가 시험에서 늘 받는 백 점을 또 받아 온 일.
노아가 차마 버리지 못한 실뜨기를 레토가 발견해 버리면서 후끈하게 달아오른 어느 날의 밤.
글로리아와 비스가 주말 저녁에 정원에서 구워 준 바비큐.
“매일매일 이렇게 맛있으면 좋겠다…….”
고기를 실컷 먹고 배가 볼록 나온 클라레가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즐거운 추억이 될 만큼 잔잔한 하루의 연장이었다.
따르릉-.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따르르릉-.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 한 통이 행복한 일상을 부서트…….”
“불길한 소리 하지 마.”
노아가 어디서 또 못된 걸 배워 와 장난치는 클라레를 가볍게 타박했다.
“내가 받을래, 내가!”
노아보다 먼저 전화기 쪽으로 달려간 클라레가 냉큼 수화기를 잡았다.
“여보세요, 벨로입니다아.”
[어머.]
기세 넘치게 전화를 받은 클라레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당황했다.
“어, 어어, 누구세요?”
[노아 벨로 양의 집이 아닌가요?]
“아니요, 저는 동생입니다. 저는 클…….”
“여보세요.”
노아는 클라레가 자기 이름을 말하기 전에 수화기를 빼앗았다.
내심 안도한 클라레는 노아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채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귀를 쫑긋거렸다.
“전화 바꿨습니다. 누구십니까?”
[노아 벨로 양인가요?]
“그렇습니다. 전화를 거신 분은 누구…….”
[아이트라 오케아누스예요.]
이런 식으로 갑자기 연락해서 죄송하다고 덧붙이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차분하고 정갈했다.
“…….”
이름을 듣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노아는 멍한 시선으로 수화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정신 차리고 수화기에 귀를 가져다 댔다.
[갑자기 이렇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다행인지 몰라도, 아이트라는 자신의 무례를 잘 알고 있었다.
[보낸 편지가 어제 도착했어요. 답해 줘서 고마워요.]
노아가 서둘러 부정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답장을 늦게 보냈죠. 죄송합니다.”
[군인은 늘 바쁜 게 당연한 거예요. 그걸 모르진 않으니 걱정 마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편지에 적은 대로, 한번 만나고 싶어서요.]
아이트라는 며칠 뒤에 샤프 행 열차를 타게 될 거라며 자신들의 예정을 알려 줬다.
[도착하고 나서 또 전화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마중을 나가도 될까요?”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건 조금 힘들 거 같아요. 집에 어린아이가 있거든요. 나중에 따로 다시 연락을 드리죠.]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늦은 밤 살펴 들어가시란 안부 인사를 끝으로 두 사람은 전화를 마쳤다.
“언니, 언니.”
클라레가 노아의 바짓자락을 쥔 손을 흔들었다.
“누구 전화야? 목소리 엄청 예뻤어. 어른 같았어.”
“…….”
“누구였어? 언니 친구.”
“이걸…….”
“잉?”
영문 모를 소리에 클라레가 호기심 많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갸웃갸웃 움직였다.
노아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해야 하나?”
“뭔 소리여?”
“네가 복덩어리 같다고.”
동생을 번쩍 안아 든 노아가 토실토실한 볼살을 입으로 앙, 무는 척하자, 간질간질한 뽀뽀에 클라레가 자지러지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