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사랑스럽기는 개뿔.”
아스는 끝내 그의 안면에 주먹을 날리고, 정강이를 발로 세게 차며 밀쳐 냈다.
정작 아티는 얻어맞으면서도 즐겁단 듯이 킥킥 웃었다.
“어휴…….”
징글징글하다, 진짜.
노아와 레토는 쓰러진 아티를 일으켜 세웠다. 안 그러면 아스가 그를 정말로 죽일 거 같았기 때문이다.
“오, 내 방이네.”
의자에 도로 포박된 아티는 완전히 변해 버린 제 방을 느릿하게 둘러봤다.
“이젠 제 방입니다.”
“여기서 노아랑 같이 자나?”
“…….”
레토는 대답 대신에 아티의 팔을 뒤로 돌려 밧줄로 꽁꽁 묶었다.
아야야, 하고 엄살 부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토는 더욱 힘줘 밧줄을 강하게 옥죄었다.
“할머니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노아가 제발 부탁한다며 당부했다.
“이제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마.”
순순히 묶인 아티는 나름 협조적이었다.
목이 마르니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요구를 했을 땐 기어코 노아에게 욕을 먹었지만, 물 한 잔 먹여 주니 나름 잠잠해졌다.
“그런데 넌 남편 앞에서도 욕을 그렇게 하냐?”
물론 그 잠잠함은 1분도 못 넘겼다.
“이것 봐, 매제.”
아티가 레토에게 고자질했다.
“노아가 저래 봬도 입이 상당히 험해.”
“그게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남편 재미없네?”
“너보단 재밌으니 신경 꺼.”
“사랑받고 사네, 우리 매제.”
“형님 눈에도 그리 보이십니까? 부끄럽네요.”
“넌 뭐 좋다고 얼굴 붉히면서 형님이라 불러!”
분위기 파악하라며 노아가 으르렁거렸다.
잠시 후, 글로리아와 비스가 도착했다.
“아스는?”
글로리아는 가장 먼저 아스를 살폈다.
“아가, 괜찮니?”
“전 괜찮습니다.”
“잡아 둔다고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오히려 저녁 식사 준비를 제대로 못 해서…….
“그건 신경 쓰지 마렴.”
글로리아의 말에 비스가 가지고 온 것을 들어 보였다.
밀짚으로 엮은 나들이 바구니 안에 포장된 음식들이 한가득이었다.
“이럴 줄 알고 사 왔어.”
“…….”
“네가 힘들 거 같았거든. 클라레랑 먼저 먹고 있으려무나.”
기운 없는 아스를 꼭 안아 준 글로리아가 그 이마에 다정히 입술을 맞췄다.
한결 마음이 풀린 아스가 클라레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발레나 냄새가 나!”
“큰 주인님이랑 큰 부군께서 사 오셨어요. 발레나 피자랑 파스타에요.”
“인형은? 식칼토끼 인형 있어?”
두 사람이 먼저 저녁을 드는 동안, 글로리아는 비스와 함께 레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자에 묶인 장손을 보자마자.
“…이 새끼가!”
글로리아는 그간의 걱정을 두 다리에 담아, 화려한 공중차기를 선보였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진 아티는 그때 처음으로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스에게 맞을 때 실실 웃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무슨 자격으로 여길 기어들어 와!”
“할머니, 아직 죽이면 안 돼!”
“고정하십시오! 들을 건 듣고 죽이셔야지요!”
노아와 레토는 아티를 진짜 죽이려고 하는 글로리아를 가까스로 뜯어말렸다.
“으으, 할머니 여전히 강하네…….”
“녀석, 밥은 먹고 다니냐?”
비스가 관절을 잔뜩 굽혀 가며 아티와 눈을 마주했다.
“그래도 잘 지낸 거 같아 다행이구나.”
“할아버지도 건강해 보여서 기뻐요.”
의자에 묶인 채 쓰러진 아티는 그 와중에 비스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에 글로리아는 속이 더 타들어 갔다.
***
한결 진정한 뒤에야, 글로리아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쨌건 무탈한 거 같구나.”
“지금은 별로 안 무탈해…….”
아티는 글로리아에게 얻어맞은 복부의 통증을 가까스로 참아 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가짜로 아파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글로리아가 물었다.
“개새끼가 되어서 다시 남부로 기어들어 온 이유가 뭐야?”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을 거야.”
“…….”
“응, 바로 그거.”
아티가 눈웃음을 싱긋 지어 보였다.
“간첩이 내려왔어.”
레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잠시 등을 보였다. 노아 또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기가 막힌 현 시국을 비탄했다.
“몇이나 내려왔습니까?”
레토가 애써 차분히 물었다.
“일곱.”
그중 두 명은 추적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남은 다섯은 어지간하면 생포해서 데려가야 해.”
“그게 국왕이 지시한 의무냐?”
글로리아가 주머니에 있던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알싸한 허브 향이 나는 꿀사탕이었다.
지금부터 들을 내용을 짐작건대, 미리 당 섭취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혹시 몰라 비스의 입에도 하나 까서 넣어 줬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육군 고위급 장교에 반역자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자가 지난번 이적 사건의 주동자인 플랜시 전 소장과 전 델라트 경을 유혹했음을 확인했다.
“현재 추정되는 용의자는 셋인데, 테네브레는 그 중…….”
“됐다.”
말하지 마.
글로리아가 아티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그딴 거 관심 없단다.”
감정을 절제한 글로리아의 얼굴은 한없이 싸늘했다.
“할머니?”
예상 못 한 상황에 노아는 꽤 당황했다. 레토 역시 의아하단 듯이 글로리아를 바라봤다.
그러나 글로리아의 결정은 변함없었다. 불필요한 정보를 거절하는 목소리는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내부 반역자를 잡는 건 너희가 할 일이지, 우리 해군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니란다.”
글로리아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해군은 이미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단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믿어 온 남부의 평화를 지키고, 해상 방어선을 수호하는 지고한 역할.
그것이 해군의 명예로운 책임이었다.
테네브레와 공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단 것이, 글로리아가 해군의 일인자로서 내리는 단호한 결정이었다.
“할머니…….”
“…….”
노아와 레토가 감동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비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아내의 편이었다.
“그러니 애먼 짓은 하지 말거라, 테네브레.”
“이젠 손자 취급도 안 해 주네?”
서글프다며 아티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딴 걸 바랐다면 개 따위는 되지 말았어야지.”
“그건 또 그러네.”
아티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거절당한 것치곤, 무척이나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라면 그럴 줄 알았어.”
마치 글로리아가 그러길 바란 것처럼.
“하지만 대장님.”
레토는 이곳이 집인 것도 잊은 채, 글로리아를 직함으로 불렀다.
그만큼 글로리아의 박력에 사로잡혔단 뜻이었다.
“숨어든 간첩은 잡아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남부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들입니다.”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테네브레에 도움 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간첩이 남부에 숨어들었단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이걸 대놓고 공론화하지 못한다는 건데…….”
말하다가 짜증이 훅 올라온 글로리아가 아티를 노려봤다.
눈빛은 저 망할 장손의 머리 가죽을 뜯어 무두질을 15번 정도 하고 남을 정도로 살벌했다.
아티는 묶인 채로 어깨를 으쓱한 탓에 어설픈 꼴이 되었다.
“그랬다간 일이 너무 커지잖아요.”
아티가 말했다.
“국왕은 이번 일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해요. 간첩이 남부에 있단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피니치 폭발 사건?”
여태 묵묵히 듣고 있던 노아가 말했다.
“혹시 작년 가을에 있었던 피니치 구역 사건이 간첩이랑 연관된 거야?”
“눈치챘어?”
아티가 과장되게 놀라는 척했다.
그에 노아가 어처구니없단 듯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가 날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는지는 알겠다.”
“오히려 반대야. 너무 늦게 눈치챘잖아.”
대꾸할 가치도 못 느낀 노아는 레토에게 물었다.
“아까 보니 이 모든 대화를 짐작하고 있던 눈치였는데…….”
“…….”
“부대에서 날이 섰던 것도, 이 때문이었어?”
“응.”
레토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라고 짧게 대답한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레토가 보여 줬던 모습이 전부 이해되었다.
“맘고생 심했겠네.”
노아의 투박한 한 마디에 레토는 큰 위로를 받았다.
“이놈들아.”
딱딱!
그새 둘만의 세계에 빠지려는 손녀 부부의 눈앞에, 글로리아가 손가락을 거세게 튕겼다.
“사이좋은 건 나중에 해라.”
중요한 건 그 간첩을 어떻게 잡느냐는 거였다.
“테네브레가 왔단 건, 국왕은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야.”
이에 대해선 글로리아를 비롯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의했다.
피니치 구역 사건은 한 번은 반드시 거론되어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육군에 숨어 있단 반역자를 체포할 준비가 안 된 모양이야.”
“아직 증거가 없어요. 그래서 간첩을 생포할 필요가 있고요.”
아티는 여기에 말을 더 이어 붙였다.
“게다가 섣불리 문제를 제기했다간 다시 전쟁을 주장하는 미친놈들이 설칠지도 모르니까.”
“…….”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 모두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기에 알고 있었다.
“…전쟁은 안 됩니다.”
레토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주장했다.
글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역시 우리도 눈에 띄지 않고 그것들을 추적해야 하는데…….”
“해군에 지금 그럴 병력이 있습니까?”
“아니, 이건 해군 단위로 해선 안 돼.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갈지도 모르는…….”
글로리아와 비스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심각하게 논하던 찰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레토가 말했다.
“저에게 대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 것치곤 네 얼굴이 영 별로다만?”
미간을 찡그리며 팔짱을 낀 글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레토가 순순히 긍정했다.
“사실, 좀 떨떠름하긴 합니다.”
“가능성이 희박한 방법이냐?”
“그렇다기보다는…….”
말을 하다 만 레토가 노아를 힐끔거렸다. 눈이 마주친 노아가 눈을 멀뚱히 끔뻑거렸다.
“왜?”
레토가 물었다.
“오케아누스 후작님께 편지 보냈지?”
***
며칠 후.
수도 내 오케아누스 저택에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어머니.”
한참 서류와 씨름하고 있던 아이트라 오케아누스 후작이 절 부르는 어린 목소리에 안경을 벗었다.
고개를 드니, 제 집무실 앞에서 쭈뼛거리는 어린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카리나.”
서류 작업으로 지쳤던 아이트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카리나가 말했다.
“형수님이 보낸 편지가 왔어요.”
그 말에 아이트라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