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45)

67.

락소와 헤어진 레토는 사령부실로 복귀하자마자 피스트 준위를 찾았다.

범상찮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등장에 대원들이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

노아는 날이 잔뜩 선 레토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부르셨습니까?”

레토와 눈이 마주친 피스트 준위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불규칙적으로 번뜩였다.

“내 오후 일정을 전부 취소해.”

“예?”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한 피스트 준위가 다급히 말했다.

“하, 하지만 중장님! 곧 있으면 키르코 준장님이 방문하지 않습니까! 손가락 해적단의 은신처를 수색…….”

“취조실로 데려와.”

레토가 아이스 중령을 찾았다.

“그대가 키르코 준장을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명령을 마친 레토는 피스트 준장과 함께 사령부실을 나섰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던 위압감은 레토가 사라지면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제야 폐부를 찌르는 듯한 압박감에서 벗어난 대원들이 숨을 돌리며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이게 무슨 일이냐…….”

“중장님, 조금 이상했지 말입니다?”

“근데 취조실은 무슨…….”

“다들.”

그때, 아이스 중령이 엄한 목소리로 주의했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도록. 이 시간 이후로 중장님에 대한 헛소문이 조금이라도 들린다면, 난 우리 대원들을 가장 먼저 의심할 거다.”

살벌한 경고에 그제야 대원들이 수다를 멈추고 묵묵히 제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노아는 그 틈에 편지지 한 장을 꺼냈다.

매점에서 파는 투박한 편지지는 꼭 감옥 창살처럼 생겼다고 다들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얀 종이에 시커먼 줄만 죽죽 그어져 있으니, 노아도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다른 데다 쓸까?’

그러나 노아는 곧 편지지 위에 잉크를 흘렸다.

[답장이 늦어 죄송합니다.]

가뜩이나 오케아누스 후작에게 답장을 보낸다는 게 일이 생기면서 늦어졌다. 이젠 편지지를 고를 여유도 사치였다.

‘레토한테도 이미 말해 뒀으니…….’

다만.

“…….”

노아는 조금 전 레토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평소 능글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가 저렇게나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날 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경우도 드물었다.

지난번 가혹 행위 정황이 드러났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화가 났다기보단…….’

아니, 화도 났지.

그 감정의 기저에 깔린 건 분노였다. 하지만 거기서 흘러 나온 감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골치 아프고 야단났다는 모습이었어.’

펜을 쥔 노아의 손가락이 까딱까딱 흔들렸다.

아무래도 군에 무슨 중대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편지?”

옆에 있던 아미가 슬그머니 다가와 편지를 힐끔거렸다.

시선을 눈치챈 노아는 친구의 얼굴을 한 손으로 밀어내며 다 쓴 편지지를 봉투에 넣었다.

“누구한테 쓰는 거야?”

“시댁.”

노아는 봉투를 단단히 풀칠하고 우표를 붙였다.

“…넌 무슨 그런 표정으로 시댁에 편지를 쓰냐.”

아미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꼭 결투장 보내는 것처럼 비장하다, 표정이.”

“심정은 약간 그래.”

오케아누스 후작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심을 풀었을 뿐, 아직 의심을 지운 건 아니었다.

노아에게 시댁은 아직 그런 곳이었다.

***

해군에는 취조실이 두 곳 있었다.

하나는 입구 안내 표지판에 적혀 있는 취조실.

여기서는 징계를 내리기엔 너무 경미한 잘못을 저지른 해군에게 잔소리를 퍼붓거나.

해양 순찰 중에 체포한 불법 어선과 해적들을 취조할 때 쓰인다.

반면 또 다른 취조실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취조실이 또 있느냐고 놀라며 되묻는 군인이 더 많았다.

즉, 두 번째 취조실은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잘 쓰이지 않는 비밀 장소이며.

어지간한 상황에 접근이 가능한 고위 군 관계자들만 드나들 수 있단 뜻이기도 했다.

레토가 지금 향하는 곳은 그중 후자였다.

“당장 시카 리우스, 그 새끼를 여기로…….”

취조실 안으로 들어간 레토는 깜짝 놀랐다.

“아이고, 늦었다.”

“대장님.”

“문 닫고 들어와.”

먼저 와 있던 아드벨로 대장은 평소의 호방한 인상을 완전히 지운 채였다.

감정이 없는 주름 진 얼굴은 흐릿한 조명 탓에 더욱 어두워 보였다.

“술집 꼬맹이한테 들었냐?”

아드벨로 대장의 시선은 조금 전부터 끊임없이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엔 레토가 찾으려 한 시카 리우스가 묶여 있었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의자에 묶여 앉은 그의 입과 턱에 피가 흥건했다.

“고문은 금지입니다.”

곁으로 다가온 레토가 말했다.

“내가 할 것처럼 보이냐?”

“예.”

“해도 안 들키게 할 거야.”

이렇게 대놓고는 안 하지.

아드벨로 대장은 레토에게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내밀었다.

레토는 장갑을 끼며 시카 리우스의 상태를 살폈다.

처음 봤을 때보단 상당히 깨끗한 몰골이었지만, 그때보다 피폐해진 인상은 거의 시체와 비슷했다.

“…뭘 하신 겁니까?”

레토가 시카 리우스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가죽 장갑이 스치는 둔탁한 소리에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반응하는 것을 보니 의식은 있는 듯했다.

“비서실장이 나 피곤하다고 잠깐 대신 심문했지.”

그랬더니 갑자기 혀 깨물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아드벨로 대장이 미간을 험상궂게 찡그렸다.

“아.”

무슨 상황이었는지 대충 짐작이 간 레토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군의 성자라 불리는 비서실장님의 주특기가 바로 심문이란 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어쩐지 대장님 곁에 비서실장께서 안 보인다, 했습니다.”

“피가 너무 튀어서 씻고 옷 갈아입는 중이야.”

“치료는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마법으로 대충 지혈했어.”

나중에 군종실장을 호출해 치료받게 할 예정이란다.

“어쨌건 네가 여기 온 것도, 나랑 같은 이유겠지.”

아드벨로 대장이 시카 리우스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니치 구역의 폭발 사고가 군 내부자의 소행일지 모른단 정황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네가 수상하다고 언질한 평기사가 증언했다지.”

“이 녀석은 증언했습니까?”

“주제 모르고 깝치다가 비서실장이 나선 거 아니겠냐.”

그리고 저 지경이 되었고.

아드벨로 대장이 한심하단 시선으로 시카 리우스를 노려봤다.

“도대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레토가 말했다.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낸들 알겠냐.”

그러나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군이 뒤집어질 거다.”

해군, 육군, 기사단 전부.

마탑이 폭발한 이후로 100년간 나라를 지켜 온 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군사 집단에 큰 변화가 일어날 예정이다.

특히 육군은.

“이번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 엄청난 비난을 받겠지.”

“짐작되는 바가 있으십니까?”

“있긴 있는데…….”

말끝을 흐린 아드벨로 대장이 레토를 힐끔거렸다.

“…좀 확신이 생기면 말해 주마.”

레토는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장 해야 할 일은…….”

“남부로 숨어든 간첩 새끼들을 잡아내는 거지.”

테네브레가 이곳에 왔단 건, 간첩이 남부로 흘러들어 왔단 증거이기도 했다.

남부의 주인은 이 상황이 너무 가소로웠다.

“…들었지?”

레토가 묶여 있는 시카 리우스에게 상냥히 조언했다.

그는 말은 못 할지언정, 조금 전 두 사람의 대화는 전부 들은 상태였다.

“비서실장님과 또 단둘이 있고 싶다면, 굳이 협조 안 해도 돼.”

그 말에 시카 리우스가 재갈을 문 입으로 우우,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다급히 내뱉었다.

그로도 모자라 의자에 묶인 몸을 덜컹거리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한때 남부에서 가장 잔악한 해적으로 불린 시카 리우스, 그가 지금 저 좀 살려 달라며 눈물 콧물 질질 짜며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쯧.”

역겨운 꼴에 레토가 혀를 찼다.

“대장님, 중장님.”

때마침 피스트 준위가 키르코 준장의 도착을 알렸다.

***

“아까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거야?”

퇴근하는 길.

노아는 그제야 레토에게 물었다.

“일이 좀 귀찮게 되어서.”

“기밀이야?”

“기밀이랄지…….”

시내로 접어든 붉은 애마는 이제 익숙해진 언덕길을 부드럽게 올라갔다.

“나중에 할머님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떨까?”

“오늘 할머니가 그럴 정신이 있을지 모르겠네.”

레토가 차 시동을 끄는 사이, 노아가 안전띠를 풀며 중얼거렸다.

“아마 집에 오빠가 있을 거야.”

“아, 맞다.”

차에서 내린 레토가 뒤늦게 알아챘다.

“아티를 잡아서…….”

“쥐 잡듯 패야겠구나.”

어제저녁, 글로리아가 제 손주를 만나고 싶단 의지를 표명했었다.

‘…어제밖에 안 됐어?’

레토는 깜짝 놀랐다.

아드벨로 대장이 복귀한 것이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그녀가 노아의 할머니란 사실을 안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체감상 며칠은 된 거 같았는데.’

왜 이렇게 오래된 일처럼 아련하고 피곤한 걸까.

레토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몸에 쌓인 피로는 얼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일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런 착각을 해 버린 거다.

“피곤하지?”

노아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레토를 살폈다.

“…응.”

걱정해 주는 목소리에 레토가 넙죽 칭얼댔다. 입술을 살짝 내민 채로 입꼬리를 늘어트리곤 슬그머니 노아의 품에 안겼다.

“너무 피곤해. 어깨 빠질 거 같아.”

“빠지면 안 되는데, 어째…….”

노아는 레토의 어깨가 정말로 빠질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절대 부서질 것 같지 않은 듬직한 어깨를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은 꽃잎에 앉는 나비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레토의 가슴을 간질이기엔 충분했다.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노아의 얼굴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꾹꾹 눌렀다.

노아가 간지럽다면서 뒤로 내빼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게 뭔지 알아?”

“나랑 결혼한 거?”

“맞아. 그걸로 내 인생의 모든 실수가 만회될 정도야.”

“하여튼 말은 잘했지.”

“몸으로도 잘해.”

“그랬던가?”

“벌써 까먹었어? 그럼 내가 또 몸으로 보여 줘야겠네.”

집이 바로 코앞이건만, 둘은 문 앞에서 한참을 찰싹 달라붙은 채로 사랑을 속삭였다.

“…뭘 몸으로 보여 줘?”

그리고 순진무구한 클라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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