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감히, 건방지게.
“…….”
플랜시 소장은 해군의 대장을 눈앞에 두고도 인사 한마디 없었다.
그저 낡은 의자에 다리 힘 풀린 것처럼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고 두 팔을 뒤로 돌린 채였다.
너그러운 마음씨의 아드벨로 대장은 딱히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척했다.
“어디 보자,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언제였더라?”
“순항 전, 본부 내 진급 예정자 교육을 논하기 위해 만나셨습니다.”
비서실장이 대신 말했다.
“당시 진급 예상자로 노아 벨로 대위가 언급되었습니다. 추천, 평정, 모든 면에서 최우수를 차지했던 군인입니다.”
“비서실장, 난 너한테 안 물어봤는데?”
“죄송합니다.”
순순히 사과한 비서실장이 변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저자가 쉬이 대답하진 않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것도 그렇군.”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린 아드벨로 대장은 다시 플랜시 소장을 노려봤다.
“…그러게 왜 그랬어.”
안타까운 목소리가 과거의 아군을 나무랐다.
“왜 그딴 짓을 해서 모든 것을 망가트렸어.”
“…….”
“그대의 가족은 도망을 치듯 남부를 떠났어. 갚아야 할 빚도 생겼지. 입이 마르도록 자랑한 딸은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돈을 번다더라.”
“…….”
“스읍…….”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드벨로 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족 이야기가 안 먹히는군.’
짐작은 했지만, 막상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안타까웠다.
눈앞에 있는 저 쓰레기가 아니라, 저것도 남편이고 아빠라고 여전히 걱정하는 그의 가족들이.
‘애초에 가족을 생각하는 놈이었다면 이딴 짓을 할 리가 없지.’
플랜시 전 소장에게 가족이란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보장해 주고 자신을 포장해 줄 수단에 불과했다.
아내에게 헌신하고 자식을 챙기는 다정한 아버지.
저 문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저를 보며 저 포장된 문구를 떠올려 주길 바란 거다.
“…프레드 렐리.”
결국, 아드벨로 대장이 이름들을 읊기 시작했다.
“바리우스 포르크, 에밀 뷔고, 아울르 고르디안…….”
어떻게 외웠는지도 신기할 정도로 수많은 이름이 노래 가사처럼 막힘없이 나왔다.
그러나 플랜시 전 소장은 어떤 이름에도 반응이 없었다.
“…….”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포박된 채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쓰레기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아드벨로 대장이 또 다른 이름을 말했다.
“…디모네 닉스.”
그때.
“…….”
아주 미세하지만, 아드벨로 대장의 눈에 확실하게 보였다.
플랜시 전 소장의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이 X 같은 쓰레기 새끼가……!”
그제야 참지 않고 제 성질을 드러낸 아드벨로 대장이 플랜시 소장의 목을 잡고 그대로 벽에 밀쳤다.
“커헉!”
의자에 묶인 채로 끌려간 남자는 콜록거리면서 몸을 달달 떨었다.
“날 아주 만만하게 봤구나?”
“크, 크윽……!”
“그래….”
플랜시 전 소장의 목을 쥔 아드벨로 대장의 손등에 핏줄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왔다.
“그래서 그놈이 개새끼를 남부로 푼 거였어.”
분노로 타오르는 초록 눈동자와 마주한 조국의 배반자는 겁에 질린 채로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했다.
“…비서실장.”
더러운 쓰레기를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친 아드벨로 대장이 손을 내밀었다.
비서실장은 미리 준비해 둔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세심히 닦았다.
“오케아누스 후작에게 연락하게.”
***
“…락소 씨?”
점심 식사를 마치고 소화를 시킬 겸 산책 중이던 노아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오, 벨로 양.”
민간인 방문증을 가슴에 단 락소가 손을 흔들며 싱긋 웃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뵙네요.”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결혼식 때 남편의 들러리를 서 줬던 락소는 연애 시절에도 몇 번 만나 셋이서 함께 술을 몇 번 마신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과 늘 잘 지내 주시는 것도 감사하고요.”
“와, 레토 그 자식이 남편이라 불리다니!”
락소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며 과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그 말에 노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 역시 누군가에게 레토를 ‘남편’이라 호칭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군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돈 받으러 왔습니다.”
락소가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가리켰다.
“해군 장교들이 종종 제 가게에 와서 회식하거든요. 그때 쌓아 두는 영수증을 오늘 처리하려고 왔습니다.”
“늘 바쁘시네요.”
“술장사가 바빠서 뭐 좋나요.”
“어디로 가시나요?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특함 사령부실입니다. 레토 이름으로 단 영수증이거든요.”
둘은 사령부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사령부실엔 레토 혼자만 덩그러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왜 둘이 같이 들어와?”
“밖에서 만났습니다. 술값 청구하러 오셨답니다.”
“그때처럼 휴게실에서 기다릴까?”
락소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는 레토를 배려했다.
“…점심, 굶으셨습니까?”
노아가 물었다.
자신이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책상에 앉아 있었던 레토는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앉은 그대로 미동도 않고 계속 일을 했단 뜻이었다.
“간단하게 먹었어.”
“책상 위에 버려진 곡물 과자 봉투를 말씀하시는 거면, 그건 식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린 그걸 비상식량이라고 부른다지.”
그래도 걱정해 주는 마음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락소 만나고 오면 샌드위치라도 사 먹을게.”
“알겠습니다.”
그제야 한숨 던 노아가 아차, 했다.
“…차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서라.”
탕비실로 가려던 노아를 말린 레토가 피식거렸다.
그제야 서류에서 고개를 뗀 그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군이 싫어서 전역한 놈에게 군 음식을 왜 줘.”
“…….”
두 눈을 멀뚱히 끔뻑거리던 노아가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락소는 레토와 사관학교 동기로, 4년 정도 군에서 일하다가 전역하고 술집을 차렸다고 했었다.
“태생적으로 군이랑 안 어울리는 녀석이었거든.”
그런 녀석이 4년이나 악착같이 버틴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며 레토가 드물게 칭찬했다.
“그런데도 군인이 되셨군요.”
“집안 사정 때문이라나, 뭐라나.”
“그럼 중장님은 왜 군인을 선택하셨습니까?”
“갑자기?”
때마침 마지막 서류 결재를 마친 레토가 희미하게 웃었다.
노아는 순순히 이유를 말했다.
“저는 중장님 쪽이 더 궁금합니다.”
“이유가 무척 마음에 드는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레토가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근육이 이완되면서 나오는 신음이 그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려 줬다.
레토가 팔을 내리며 말했다.
“나도 일단은 집안 때문이려나?”
오케아누스는 유명한 무인 가문이었다. 지금도 그 가문 출신의 영웅들이 동화책으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존경하던 사람이 군인이었거든.”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너도 아는 분일걸?”
군인 중에 이분을 모르면 간첩이라며 레토가 자신 있게 이름을 말했다.
“장군님.”
“…돌고래 말이야?”
깜짝 놀란 노아가 여기가 직장인 것도 잊어버리고 반말로 되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레토가 웃음을 삼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돌고래 장군님도 존경하지만, 애초에 그 이름을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따온 거야.”
“아…….”
“이제 알았어?”
“오케아누스 장군님…….”
멍청한 착각으로 얼굴을 붉힌 노아가 정답을 중얼거렸다.
레토는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그분을 존경했거든. 그래서 자연히 나도 저분처럼 군인이 되고 싶어졌고.”
존경하는 장군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레토는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노아가 넌지시 물었다.
“…있잖아.”
이왕 공사 구분 잊게 된 거, 노아는 이상하게 시기가 안 맞아서 묻지 못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오케아누스 후작님한테서 편지가 왔어.”
“…….”
“우리 신혼여행 중에 도착했대.”
“…그랬구나.”
레토가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
편지 내용에 대해 더 물어볼 줄 알았던 노아는 꽤 당황했다.
한 번 크게 혼난 뒤로는 안 보이던 레토의 나쁜 버릇이 다시 나타났다. 저 겁쟁이가 또 입을 다물고 침묵을 선택했다.
“레토.”
하지만 노아는 이제 저 겁쟁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혼식에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러니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어.”
또 혼자 이상한 착각에 빠지기 전에 후딱 진실을 말하는 것.
“난 한 번 만나 뵙고 싶어.”
“그냥 내가 따로 연락…….”
“멋대로 판단하지 마. 내가 만나 뵙고 싶은 거니까.”
“…….”
“아니면 내가 그분들과 만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제대로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레토가 노아를 힐끔거렸다.
노아는 처음부터 계속 레토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눈이 마주치는 건 당연했다.
“레토.”
노아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싸우면 내가 이겨.”
“…….”
“그래도 현역에 젊기까지 한 내가 승산이 있지 않겠어?”
그러니 걱정 말라며, 노아가 레토의 벌어진 턱을 친절히 닫아 줬다.
***
“와아, 케이크!”
학교에서 돌아온 클라레는 간식으로 나온 새하얀 크림 범벅인 케이크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도, 복숭아 케이크예요.”
“아스는 날 무척 사랑하나 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답니다.”
“힝,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린이야!”
포크로 케이크의 뾰족한 끝을 호쾌하게 자르니, 폭신한 빵 사이로 과육이 듬뿍 들어 있는 복숭아 잼이 주르륵 흘렀다.
클라레의 입에서도 침이 주르륵 흘렀다.
클라레가 케이크를 야무지게 먹는 사이, 아스는 부엌에서 남은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옮겼다.
두 조각은 퇴근하고 돌아올 노아와 레토의 몫.
한 조각은 제 몫.
‘큰 주인님이랑 큰 부군께서 드실 위스키 파운드 케이크는 냉장고에서 식히는 중이고…….’
그럼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은 누구의 몫일까?
“아스으으.”
말끝을 늘리며 다가온 클라레가 빈 접시와 포크를 가져왔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어 줘서 감사합니다.”
“또 먹어도 돼?”
“안 돼요.”
단호한 거절에 입술을 삐죽이던 클라레의 눈에 낯익은 갈색 병이 들어왔다.
“어라?”
클라레가 그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머니가 준 마취제.”
“조금 전에 이 케이크에 발라 뒀답니다?”
깜짝 놀란 클라레를 내버려 둔 채, 아스는 케이크를 들고 야외 발코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