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아이고, 우리 손녀사위.”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비단 가운을 걸친 글로리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몸은 좀 괜찮나?”
“노아, 나 임신한 거 같아.”
갑자기 속이 울렁거린다며 레토가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내 겁쟁이가 또 이상한 소릴 하네…….”
“형부, 많이 아파? 힘들면 내 머리에 손 올리고 기대!”
“작은 부군은 이걸로 드세요. 속이 좀 편안해질 거예요.”
커다란 덩치를 비실거리는 레토 주위로 손녀들이 몰려들었다.
“…….”
그 모습을 신기하단 듯이 지켜보던 글로리아는 연하게 우린 홍차를 한 모금 넘겼다.
“우리 손녀사위가 인기가 많네?”
“성격이 되바라진 놈은 아니었잖습니까.”
노릇노릇하게 구운 토스트에 버터와 잼을 넓게 펴 바르던 비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손에 들린 토스트는 글로리아의 빈 접시 위에 올려졌다.
“음…….”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토스트를 한 입 크게 베어 문 글로리아의 볼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때, 레토가 글로리아와 비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주무시는 데 불편하신 점은 없었습니까? 어젯밤은 바람이 선선해서 두 분의 머리맡을 어지럽게 하지 않…….”
“아이씨…….”
느글거리는 아침 문안에 글로리아가 바로 질색했다.
“너 미쳤냐?”
“할머니! 나쁜 말 쓰면 안 돼!”
소시지를 열심히 씹던 클라레가 깜짝 놀라며 경고했다.
“손녀사위야. 너 잠깐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된 거 같은데?”
바로 사전적 어휘로 풀어 말한 글로라아는 그걸로도 모자라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곤 호방하게 숨을 내뱉었다.
“…술 탔어?”
노아가 빈 찻잔에 코를 킁킁거렸다.
다행히 멀쩡한 홍차였다.
“손녀사위야.”
그제야 글로리아의 목소리가 한결 다정해졌다. 표정도 다소 온화해졌다.
“그냥 평소대로 하거라. 난 격식 차리고 허례허식, 이런 걸 아주 지양한단다.”
“어제 환영식을 생각하면 형식 차리고 본인의 입지를 치켜세우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레토가 어제 아침, 존경해 마지않는 대장님과 춤을 추던 순간을 환상처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건 흔히들 착각하는 것 중 하나지.”
글로리아는 제 빈 찻잔을 힐끔거렸다. 그 모습에 아스가 한 잔 더 따르려 하자, 글로리아가 손으로 물렸다.
“난 그저 권력을 좋아할 뿐이란다. 내 발밑에서 버둥거리는 너희를 보는 게 나의 행복이고 기쁨이지.”
“…….”
“…….”
고작 그딴 이유로 우릴 갈궜단 말이야?
레토만이 아니라, 이번엔 노아도 표정을 굳혔다.
“그렇다고 내가 널 일부러 괴롭힌다고 착각하진 마라?”
혹여 레토가 이상한 오해라도 할까, 글로리아가 서둘러 덧붙여 말했다.
“난 널 꽤 좋아해.”
“…….”
레토는 불신의 시선으로 글로리아를 응시했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그간 경험한 것이 있었다.
차라리 금융 상품 팔려고 듣기 좋은 말로 속삭이는 은행 직원들을 믿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차라리 사기꾼을 믿겠단 거 같은데…….”
기가 막힌 글로리아가 말했다.
“우리 손녀랑 맞선 한번 보라고 권했던 거, 기억 안 나냐?”
“…아.”
그제야 레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그리고 대뜸 아쉬워했다.
“…맞선 한번 볼걸.”
“이 자식아, 버스 지나갔어.”
“지금이라도 보면 안 됩니까? 아내에겐 비밀로…….”
“야.”
끝내 노아가 레토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여보, 미안해. 하지만 대장님 손녀라면 무척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거 아냐.”
“그렇긴 해도 이젠 안 되지!”
시끌벅적한 아침 식탁을 빤히 구경하던 클라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강아지, 다 먹었어?”
비스가 조금 더 먹으라며 권했다.
“그건 아니고오…….”
에휴.
클라레가 애늙은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쩜 저리 철이 없을까, 싶어서.”
“클라레의 어깨가 무겁구나.”
“역시 할아버지는 아는구나? 할머니가 괜히 나한테 가장의 임무를 물려주고 간 게 아니야…….”
이 집에서 정신 똑바로 차린 사람은 나밖에 없어.
곤란하다며 피곤해하던 클라레는 슬그머니 골라낸 당근을 노아의 접시에 하나씩 옮겼다.
들키지 않으려고 샐러드 아래에 숨기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평화롭네.”
비스는 드디어 집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
“모셔다 드릴까요, 할머님?”
“너 작작 해라.”
“가시는 길에 무슨 사고라도 당할까 걱정입니다. 소중하신 몸에 조그만 생채기라도 나면, 제 마음엔 그보다 더 큰…….”
“더 큰 생채기를 내가 직접 만들기 전에 빨리 가라고!”
지극정성인 손녀사위의 시중을 뿌리친 글로리아는 나중에 따로 가겠다며 둘을 먼저 보냈다.
덕분에 노아는 아침부터 지쳤다.
“피곤해…….”
“도착할 때까지 눈 좀 붙여.”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노아가 제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며 투덜거렸다.
제가 한 거라곤 아침에 남편과 할머니의 대화를 들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고작 그것만으로 오늘치 기력을 전부 다 소진해 버렸다.
평소 퇴근할 때보다 더 피곤했다.
반면 레토는 보는 사람이 기분 나쁠 정도로 쌩쌩해졌다.
“…너 어제, 아프지 않았어?”
기가 막혔다.
분명 어젯밤엔 먹은 것도 전부 게워내고 식은땀 흘리며 아파했던 놈이, 지금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멋들어진 표정으로 운전 중이었다.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소풍 가는 아이만큼 들떠 있었다.
“어제의 아픔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어.”
레토가 검은색 단추를 누르며 말했다.
마동력차 천장이 뒤로 천천히 접혀가며 푸른 하늘이 비쳤다.
“뭔 소리야?”
노아는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에 도로 검은색 단추를 눌렀다.
“노아, 내 신부님.”
레토가 잘 생각해 보라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할망구, 아니, 할머님 성격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우리 할머닌데?”
“그 전에 내 상사잖아.”
레토는 아드벨로 대장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녀에게 가장 시달린 인간 중 한 명이 바로 저였으니까.
“할머님이 나란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했으니까 손녀랑 계속 맞선 좀 보라고 들볶았던 게 아닐까?”
성격 더럽기로 레토보다 유명한 글로리아가 소중한 손녀에게 애먼 남자를 소개할 리가 없었다.
“그만큼 내가 할머님 눈에도 번듯하고 괜찮은 손녀사위로 보였단 소리잖아.”
“…….”
감탄한 노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물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입술만 뻐끔거리며 헛숨을 연거푸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곤 이내 체념한 듯이 웃어 버렸다.
“정말…….”
슬쩍 뻗은 손은 레토의 드러난 이마를 살살 문질렀다.
둥그렇고 반듯한 이마가 손바닥에 감기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성격까지 이리 긍정적일 수 있나.”
“뭘 또 그렇게까지 칭찬해…….”
수줍어진 레토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넌 이게 칭찬 같냐?’
어처구니가 없는 건 잠깐이었다.
“…그래, 그런가 보다.”
노아도 결국엔 즐겁게 웃었다. 어쨌건 그가 저리도 기뻐하니, 그거면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내심 고마운 것도 있었다.
“내가 아드벨로인 건 별로 놀라지 않네?”
“아드벨로인 건 놀랐는데, 귀족일지 모른단 의심은 몇 번 했거든.”
해군 영역으로 들어선 붉은 애마가 속도를 조금씩 줄였다.
곧 본부 기지를 지키는 입구가 보였다. 경비병들에게 암호를 대고 들어선 레토는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저택 위치도 그렇고, 외관이나 내부 구조가 딱 귀족 저택 축소판이었거든.”
“고작 그걸로?”
“거기다…….”
하얀 선 안에 완벽하게 주차하고 시동을 끈 레토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풀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레토는 운전대에 상체를 기대듯 숙인 채로 노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행동, 가끔 보면 정말 잘 배운 귀족 영애 같아.”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꼭 토끼처럼 귀여웠던 레토가 어깨를 잘게 들썩거렸다.
그러곤 팔을 뻗어 노아의 날개뼈 사이를 톡, 건드렸다.
“특히 자세가.”
그리고 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허리가 늘 곧게 섰어.”
손이 끝에 가서 멈췄을 때, 노아는 흠칫거리면서도 붉어진 얼굴로 저를 노려봤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담은 그의 붉은 눈동자엔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난 네가 아드벨로든 아니든, 상관없어.”
“…….”
“설마 내가 오케아누스라서 좋아했어?”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네가 누구인들, 나는 아무 상관 없어.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그냥 널 사랑하는 거야.”
“내가 간첩이어도?”
순간 적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가볍게 대꾸하려던 레토는 내심 놀랐다. 그냥 비유인 줄 알았는데, 저를 바라보는 노아의 시선이 한없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랑해.”
레토는 솔직히 대답했다.
“반역자로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널 사랑할 거야.”
***
노아와 레토가 출근하고 얼마 안 되어, 아드벨로 대장과 비서실장도 출근했다.
“회의 X나 싫어.”
아드벨로 대장은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투덜거렸다.
“저희도 드디어 대장님이 오셨구나, 싶습니다.”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허허 웃었다.
본부 총회의에 오랜만에 참석한 아드벨로 대장이 그간 저 없는 동안 본부를 지킨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너희가 딴짓 안 하고 숨만 잘 쉬어도 군은 유지가 돼.”
그다음은 격려였다.
“근데 도대체 뭘 했길래 이 지경이 된 거지? 이러고도 월급 받아 처먹는 게 안 미안해? 난 너희가 받을 퇴직 연금 생각하면 우리 가문에서 내는 세금이 아까워 미치겠다고!”
마지막엔 조금 더 힘내자며 모두의 의지를 단결시켰다.
“또 한 번 더 이래 봐라.”
회귀시켜 버린다?
“신생아 때처럼 자지러지게 울게 만들어 주마.”
회의를 신속히 끝낸 아드벨로 대장은 곧장 이동했다.
뒤에 나온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감동에 겨워 훌쩍이며 격한 단어를 쓰든 말든, 그 속에서 레토 혼자 싱글벙글이었다.
“역시 대장님이다, 그치?”
“…제정신이십니까?”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기겁했다.
그 사이, 아드벨로 대장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본부에서도 출입이 통제된 어느 건물의 지하.
건물의 실 명칭은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군인들이 보통 ‘검은 건물’이라 부르는 그곳.
“오랜만이군.”
아드벨로 대장이 절 기다리고 있던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나, 플랜시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