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245)

63.

“…음?”

레토는 우선,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우리 강아지! 우리 예쁜 강아지! 우쭈쭈쭈!”

“꺄아아! 할머니가 내 볼 먹는다아!”

“냠냠냠! 우쭈쭈, 우쭈쭈쭈!”

“하하! 간지러워!”

분명 할머니와 손녀의 소담한 웃음소리인데, 레토는 왜 저 웃음에서 지옥이 연상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이런, 할머니한테만 뽀뽀해 줄 거야?”

“할아버지도 해 줄게!”

“할아버지도 보고 싶었지? 이 할아비는 우리 예쁜 공주님 보고 싶어서 엉엉 울기도 했는데…….”

“울면 안 돼. 그러면 할머니가 또 할아버지 귀엽다고 괴롭힐걸?”

“당연하지. 울면 이 할미가 막 괴롭혀서 더 울릴 거야.”

사랑스러운 손녀딸과의 재회를 즐겁게 마친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

눈이 마주친 레토가 이번엔 의아한 숨소리와 함께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했다.

두 눈은 헛것을 무시하기 위해 질끈 감았다.

“노아, 내 신부님.”

“네, 신랑님.”

노아가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끊임없이 현실을 부정하는 남편이 안타까우면서도 살짝 바보 같아 귀여웠다.

평소 같으면 레토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신랑님이라고 불러 줬어? 그렇게 나랑 결혼한 게 좋았어? 우리 또 결혼할까?’라고 들러붙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레토는 그럴 정신머리가 없었다.

“병원에 한번 다녀와 봐야겠어. 네 말마따나 귀랑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거 같아.”

“내가 늘 그럴 거 같았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자기야.”

노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처음 뵙지? 우리 할머니랑 할아버지야.”

“우리 할머니는 대장이지롱!”

가까이 다가온 클라레가 씩 웃으며 레토의 손을 잡고 할머니 앞으로 데려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점점 가까워질수록, 레토는 끊임없이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고.

아닐 거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할머니와의, 그토록 고대했던 할머님과의 만남이 드디어 성사되었는데.

그랬는데.

“네가 내 손녀사위구나.”

사악한 웃음소리가 레토의 정신을 아찔하게 흔들었다.

“이렇게 인사하는 건 처음 같은데.”

“…….”

“늙은이가 내민 손이 무안해지려 하는데?”

레토는 제 앞에 내밀어진 주름 진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결혼한 이후로 언제나 행복이 충만했던 붉은 눈동자가 처음으로 바싹 메말라 갔다.

마치 오늘 아침, 아드벨로 대장과 춤을 췄을 때처럼.

“…할머님.”

레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요청했다.

“그 손으로, 제 목을 쳐서 기절시켜 주시겠습니까?”

“그렇겐 안 되지.”

할머니는 그토록 마주하고 싶었던 손녀사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형부.”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클라레가 물었다.

“울어?”

“전 원래 잘 울지 않는 사람인데…….”

레토가 촉촉이 젖은 붉은 눈동자를 슬프게 휘었다.

“오늘은, 어쩐지 울고 싶군요…….”

“왜? 할머니 봐서 기분 안 좋아?”

“그게 아니라.”

할머니가 인자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 할미를 만나서 너무 감동해서 우는 거야.”

“울 형부, 의외로 마음이 여리구나.”

“…흑.”

끝내 감정을 주체 못 한 레토가 비어 있는 반대쪽 팔뚝에 두 눈을 숨겼다. 옷자락이 촉촉이 젖어 드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만나서 반갑군.”

장유유서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할머니가 먼저 이름을 밝혔다.

“글로리아 아드벨로라 하네.”

할머니의 성함은 레토가 늘 할망구라 욕했던 그의 상관과 이름이 똑같았다.

***

글로리아 아드벨로.

그녀의 존재는 신화와 다름없었다.

마탑을 폭발시킨 아드벨로 가문의 전대 가주이자, 아들라보르 국군 의전서열 2위이며, 개인 함선을 최초로 개발한 발명가.

그리고 특수 함선 사령부를 창설한 2인 중 한 명이었다.

또 다른 창설자는 레토 오케아누스 중장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손녀들에게 뭐 하나라도 더 손에 쥐여 주고 싶은 평범한 할머니일 뿐이었다.

“와아, 예쁘다……!”

“이쁘지? 클렌스 왕국에서 사 온 별사탕이야.”

글로리아는 순항하는 틈틈이 사다 모은 것들을 클라레에게 선물했다. 그것 말고도 준비한 선물이 지금 현관 홀에 산더미였다.

“별이라서 예쁜 거였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클라레의 동그란 눈이 반짝거렸다.

뽕, 하고 뚜껑을 연 클라레가 앙증맞은 별사탕을 가족들에게 하나씩 나눠 줬다.

“언니!”

마침 거실에 들어온 노아에게도 클라레는 사탕을 줬다.

“할머니한테 별사탕 받았어?”

“응! 할머니가 이거 말고도 엄청 선물 줬다?”

“왜 너 혼자 내려와?”

글로리아가 노아의 허전한 옆을 가리키며 물었다.

“애송이는?”

“할머니, 여기서까지 그렇게 부르지 마요.”

별사탕을 입에 넣은 채로 말하는 노아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그 모습에 글로리아가 가소롭단 듯이 키득거렸다.

“저게 결혼했다고 벌써 남편 편을 드네.”

“지금은 편 좀 들어 주고 싶어요.”

노아는 조금 전에 침대에 눕히고 온 레토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충격이었나…….”

“형부 아파?”

“먹은 게 좀 얹혔나 봐.”

레토는 조금 전 먹은 저녁 식사를 전부 게워 내고 드러누웠다.

아드벨로 대장이 제 할머니란 걸 알면 충격이야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힘들어할 줄은 몰랐다.

“미안하게, 진짜…….”

“그러게 일찌감치 말씀 좀 하시지.”

타박하는 아스 역시, 레토가 저리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저게 그간 내 속을 썩였던 걸 생각해 봐.”

그때를 생각하면 노아는 아직도 자다가 욱해서 레토의 목을 조를까 고민할 정도였다.

“…그래도 자는 모습 보면 또 애틋하고 귀엽고 그래.”

잠든 남편을 떠올린 노아가 수줍게 자랑했다.

“…….”

아스는 처음으로 독립이 간절해졌다.

“역시 신혼은 신혼이구만.”

“나도 그 마음 안다. 잠자는 모습이 예쁘면 다 용서가 돼.”

듣고 있던 글로리아가 킥킥거리며 남편을 바라봤다. 조용히 차를 마시던 비스가 수줍게 웃었다.

“…뭐, 일단 그놈이랑은 내일 대화하고.”

글로리아가 오랜만에 가족회의를 열었다.

“아티가 왔다지?”

주제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테네브레가 된 장손, 아우스테르 아드벨로였다.

이름이 언급되기 무섭게 아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근데 클라레.”

여태 조용히 있던 비스가 클라레에게 물었다.

“언니 결혼식 사진, 혹시 볼 수 있을까?”

“응! 근데 엄청 많은데?”

“그러면 클라레가 가장 잘 찍힌 거로 몇 장 골라서 보여 줄래? 우리 강아지는 예술 감각이 뛰어나서 기대되는구나.”

“뭐, 내가 좀 예술이지!”

할아버지 칭찬에 헤벌쭉 웃으며, 클라레가 냉큼 방으로 올라갔다.

“그럼 제가 따라가 볼게요.”

아스가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비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웃음을 지운 싸늘한 모습이었다.

“…망아지가 왔단 것도 문제지만, 그 녀석이 하필 테네브레로 모습을 드러낸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중장님도 그 점을 염려하셨어요.”

“예상가는 바가 없진 않지.”

글로리아와 비스의 생각도 레토와 일치했다.

“군 내 반역자를 찾으려는 거겠지.”

충분히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다. 요 몇 달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이 전부 군과 연관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건 다른 쪽이었다.

“해군 쪽을 의심하는 걸까요?”

비스의 목소리엔 염려가 가득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라곤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글로리아 역시 동의했다.

젊은 국왕은 현명하다.

그리고 약삭스럽다.

테네브레를 남부에 보낸 걸 단순하게 생각해선 안 됐다.

반역자를 찾으려는 의도야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동엔 또 다른 진의도 숨어 있었다.

“…견제하려는 게야.”

비웃음을 머금은 글로리아는 젊은 국왕의 행동이 같잖았다.

“노아.”

글로리아가 노아에게 물었다.

“아드벨로가 왜 테네브레를 증오하는지 알고 있지?”

“네.”

고개를 끄덕인 노아가 대답했다.

“아드벨로는 100년 전 아들라보르 왕국을 최강으로 만들었죠. 그래서 역대 국왕들은 아드벨로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테네브레를 만들었지.”

테네브레가 국왕의 개라고 불리는 이유.

아드벨로 가문이 테네브레를 혐오한다는 소문.

모든 것의 근원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망할 놈들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아드벨로의 기밀을 빼앗으려고 테네브레를 이용했지.”

아드벨로는 약소국을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주변 강대국을 무릎 꿇게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안겨 줬으며, 수많은 기술을 기꺼이 나라를 위해 베풀었다.

하나 그 베풂에 돌아온 대가는 아드벨로를 향한 질투와 두려움.

그리고 탐욕스러운 배신이었다.

“아들라보르 왕실은 테네브레를 보내 아드벨로의 기밀을 빼내려 했어. 그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리고 오빠가 테네브레가 되었고요.”

“국왕이 테네브레를 남부에 보낸 것까진 이해할 수 있어. 우릴 견제하려는 의도 역시 같잖지만, 거기까지도 납득하마.”

하지만 굳이 아드벨로 출신의 요원을 보낸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 망할 녀석은 도대체 왜 테네브레가 되었는가.

그걸 알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티를 잡아서…….”

글로리아가 비장히 중얼거렸다.

“쥐 잡듯 패야겠구나.”

오빠는 정말 죽겠네.

노아는 일찌감치 망할 오빠의 안식을 기도하며 성호를 그었다.

***

거하게 체하고, 토하고, 끝내 열까지 나서 밤새 앓아누운 레토는 다음 날 아침에야 겨우 정신 차리고 일어났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출근을 위해서였다.

“악몽을 꾼 거 같아…….”

몸을 가까스로 추스른 레토는 잠시 침대 위에 앉아 점점 선명해지는 어제저녁을 떠올렸다.

기분 좋게 퇴근했는데, 집에서 웬 마귀가 저보고 손녀사위라고 부르는 끔찍한 환각과 환청을 경험했다.

“무서웠어…….”

하룻밤 사이에 초췌하고 유약해진 레토가 노아의 손을 꼭 쥔 채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노아가 자유로운 반대쪽 손으로 레토의 뺨을 살살 문지르듯 쓰다듬었다.

“몸은 좀 괜찮아?”

“응…….”

레토는 입꼬리를 살짝 내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노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노아…….”

“응.”

“밑에, 대장님 있어?”

“…응.”

“울어도 될까……?”

“할머니가 더 놀릴걸?”

레토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방을 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