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할망구가 뭐래?”
레토는 사령부실로 돌아온 노아를 붙들고 걱정을 쏟아 댔다.
“너한테 뭐 괜한 소리 한 건 아니지?”
“선물이라고 별사탕 받아 왔습니다.”
노아가 제 두 손에 들린 묵직한 종이봉투를 손수 얼굴 앞에까지 들어 보이며 말했다.
“…별사탕?”
별사탕이란 말에 대원들이 술렁거렸다.
“술이 아니었어?”
“아니면 고기라든가…….”
“별사탕이 뭐야, 별사탕이…….”
생각한 것보다 선물이 별로였던 탓에 대원들이 투덜거렸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는 현역 군인들이라 실망이 더욱 컸다.
“한 병 가격이 100피나라고 합니다.”
그 말에 다들 입을 싹 다물고 선물을 하나씩 챙겨 갔다.
“그래도 훈련하고 와서 힘들 때 하나씩 먹으면 되겠네.”
“몇 개 남은 거 있으면 하나 더 챙겨 가도 되나? 우리 마누라도 이런 거 좋아하거든.”
“이거 소분해서 팔면…….”
비싼 값이 곧 사용 방법이었다.
왜 이 주먹만 한 별사탕 유리병이 그 정도나 하는지 모르겠으나, 대원들은 알아서 선물을 어디에 쓸 건지 정했다.
레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제 줘야지.”
제 몫을 따로 챙긴 레토는 노아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진짜 별말 안 했어?”
“남편이 잘해 주냐고 해서, 나름 잘 산다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좀 잘하긴 하지.”
“하여튼 조금만 치켜세워도…….”
바로 기어오른다니까.
노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몫의 별사탕을 챙겼다. 제 것은 아스랑 반반 나눌 생각이었다.
“…노아.”
어느새 뒤로 슬쩍 다가온 레토가 귓가를 간질이듯 속삭였다.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 노아의 눈에 세상 어느 때보다 진지한 레토의 표정이 들어왔다.
“혹시 하는 마음에 말하는데…….”
레토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 할망구 손녀랑 맞선 안 봤어.”
“…어?”
생뚱맞은 소리에 노아가 멍청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레토는 혼자 또 뭘 착각했는지, 저의 떳떳함을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진짜야. 난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만나거나 그런 적 없어.”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아미가 투덜거렸다.
“아이 씨, 왜 내 옆에서 닭털 날리고 난리야.”
“재밌을 거 같은데 좀 놔둬.”
요 재미난 걸 왜 말리냐며 셀린이 아미를 말렸다.
레토는 말을 이었다.
“나 진짜 너 하나밖에 안 봤어. 내가 널 많이 힘들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 만나거나 하진 않았어.”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믿어 주는 거지? 할망구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너 하나뿐이야.”
“알았으니까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정 못 믿겠으면 오늘 밤에…….”
“그만하라고!”
듣다못한 노아가 공사 구분도 잊은 채 그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감히 부관이 상관에게 대항하는 꼴임에도, 누구 한 명 노아를 탓하거나 말리지 않았다.
“…응?”
그때, 아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러고는 기묘한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부부의 닭살 대화를 듣고 있자니, 어딘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설마…….’
아직도 말을 안 했나?
***
노아를 돌려보낸 뒤, 다음 호출은 당연히 레토였다.
그간 자신이 부재중인 동안 해군 내에서 있었던 일들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자리 비운 지 고작 3개월밖에 안 됐는데, 그새를 못 참고 사고가 연달아 일어났다고?”
“그중 하나는 대장님이 저한테 버리고 간 거 아닙니까…….”
“말대꾸하지 마라.”
“…….”
레토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나저나 에페레나 이 쓰레기는 어쩌다 여기 온 거야?”
“전 제7함대 사령관이 에페레나 자작 측에 뇌물을…….”
“너 내가 입 다물라고 했지?”
“…….”
“그런데 뇌물 받은 건 아직 발표를 안 했나?”
“…….”
“이게 대답을 안 해?”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
아드벨로 대장이 레토와 열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 안건은 서류로 정리해서 이틀 내로 넘기게. 그리고 여기 훈련장은 오늘 방문해서 살펴볼 예정인데, 흐음, 그건 급한 사항이니 점심 이후에 곧장…….”
비서실장은 실질적인 업무 파악에 들어갔다.
나눴던 업무를 다시 인계받고, 그간 고생한 군인들을 치하하며 앞으로도 힘내자고 도닥였다.
“실장님……!”
“보고 싶었습니다!”
“귀환을 환영합니다!”
“으아아앙!”
저쪽에서 1인자와 2인자가 으르렁거리는 동안, 비서실 식구들만큼은 애틋하고 따스한 재회를 나눴다.
해군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
딱 한 사람 빼고.
“10년은 늙은 거 같아…….”
붉은 애마를 모는 레토는 그 말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누가 저를 붙잡을세라, 레토는 퇴근 시간이 딱 되자마자 냅다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아이스 중령은 이제야 대장님이 돌아온 것이 실감 난다며 기뻐했다.
“10년이나 늙은 것치곤 너무 예쁘게 늙었어.”
“노아…….”
감동한 레토는 다시 기운을 냈다.
노아는 제 신랑이 너무 순진한 것 같았다. 고작 저를 예뻐하는 말에 저리 또 기운을 내다니.
“그래도 대장님 오니까 좋지?”
“좋긴, 무슨.”
레토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남 괴롭히는 데 도가 튼 할망구 같으니…….”
“너도 똑같아.”
노아는 레토의 남을 비꼬고 속 거하게 긁는 말버릇이 누구에게서 옮았는지 한 번 더 상기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그와 더욱 가까워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이런 색다른 발견도 가능하게 됐다.
“…뭐가 즐거워서 웃어?”
소리 없이 키득거리는 아내를 본 레토가 실없단 듯이 따라 웃었다.
기어를 잡고 있던 손을 슬쩍 내밀자, 노아가 꼭 쥐며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온종일 상관에게 시달렸던 레토는 화창한 아침 날씨처럼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지금 기분이라면 하늘도 날 수 있을 거 같아.”
“이 차로 하늘을 날면 바로 천국행이야…….”
“천국 한번 가 볼까?”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라…….”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달린 덕에, 붉은 애마는 언덕 위 벨로 저택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형부!”
차 소리를 듣고 일찌감치 저택 밖에까지 나와 있던 클라레가 폴짝폴짝 뛰며 둘을 반겼다.
“처제!”
서둘러 한쪽 무릎을 꿇은 레토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형부우우!”
클라레가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달려오더니.
“…옆에 있는 울 언니!”
노아의 다리에 폭삭 안겼다.
안아서 번쩍 들어 안아 빙글빙글 돌 준비를 하고 있었던 레토는 단단히 충격받은 얼굴로 클라레를 돌아봤다.
“헤헤, 속았대요!”
“클라레, 형부 놀리면 안 돼.”
마음이 여려서 상처를 잘 입는 사람이라고 노아가 설명했다.
“…사랑의 힘이란.”
현관문 앞에서 전부 듣고 있었던 아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젠 노아의 콩깍지가 대단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치만 형부는 놀리는 맛이 좀 있는 거 같아.”
“놀리면 안 돼요.”
“네에.”
마음씨 착한 클라레는 다시 레토의 품에 안겼다.
“형부, 높이 안아서 빙글빙글 해 주세요!”
“싫어요. 삐쳐서 안 할 겁니다.”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것치곤, 레토의 몸은 이미 벌써 클라레와 재미나게 놀아 주고 있었다.
“꺄아! 꺄아아!”
그 사이 집에 먼저 들어온 노아는 아스에게 중요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뭐?”
“점심 때 전화 받았어요. 여기로 오신다고 해요.”
“어이구…….”
“근데 작은 부군께 설명했어요?”
“아니?”
“어머나…….”
퍽 곤란해하면서도 아스의 얼굴엔 곧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슬쩍 비쳤다.
그건 노아도 마찬가지였다.
“레토.”
클라레를 안은 채로 들어온 레토에게 노아가 말했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가 오실 거래.”
“할머님이?”
“나도 방금 들었어.”
“맞다! 오늘 할머니랑 할아버지 온다고 했어.”
“할아버님도 계셨어?”
이럴 때가 아니라며 레토가 클라레를 내려놓고는 서둘러 씻으러 갔다.
군에서 씻는 것처럼 재빨리 먼지를 털고 나온 그는 노아에게 자문까지 구해 가며 옷을 갈아입었다.
“처제, 머리는 넘기는 게 좋을까요?”
“안 넘긴 것도 멋있는데.”
“할머님은 어떤 걸 좋아할까요?”
“안 넘긴 거.”
클라레는 특별히 할머니의 취향도 알려 줬다.
“할머니는 잘생기고 젊은 남자를 좋아해.”
“그게 바로 저군요.”
“할머니는 형부 꽤 좋아할 거 같아. 옛날에 할아버지 사진 봤는데, 형부랑 조금 닮은 거 같아.”
사진 가져와서 보여 주겠다며 클라레가 잠시 제 방으로 간 사이, 그 틈에 레토가 노아에게 물었다.
“할아버님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들었어.”
그래서 돌아가신 줄 알았다며 레토가 조심히 말했다.
“일부러 말 안 한 건 아니고…….”
단어를 한참 고른 노아가 대답했다.
“워낙 조용하신 데다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지내시는 분이라 그래. 보면 알아.”
“존재감이 없어서 말하는 걸 잊었단 뜻이잖아.”
“큰 주인님이 워낙 강렬한 분이셔서 그래요.”
어느새 나타난 아스도 만나면 알 거라고 어설피 웃었다.
“…의미는 알 것 같습니다.”
여태 들은 것만 해도 얼굴도 모르는 할머님의 일면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어지간히 성격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레토는 자신 있었다.
“난 이미 최악의 할머니를 상관으로 뒀다고.”
어떤 할머니가 오더라도 자신이 있었다.
“…….”
아스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오븐에 넣은 요리 확인하러 간다며 후다닥 도망쳤다.
“응…….”
노아는 그저 긍정할 뿐이었다.
“형부, 형부!”
때마침 나타난 클라레가 액자 하나를 들고 왔다.
“이거 우리 할아버지야.”
“여기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예요, 해야지.”
“그거나 이거나!”
클라레와 노아가 투닥투닥 떠드는 사이, 레토는 액자 속 오래된 사진에 담긴 젊은 미남을 구경했다.
“…와.”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미남이었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존재감이 없다고?”
“할머니가 엄청 강력해. 할머니는 대장이거든.”
클라레가 자랑했다.
“근데 어디서…….”
레토는 액자 속 젊은 남자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그냥 낯이 익은 게 아니라, 오늘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딩동-.
“할머니!”
초인종 소리에 클라레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따라나선 레토가 긴장된 숨을 훅, 내쉬었다.
“너무 떨리네.”
“긴장하지 마…….”
그러다 후회하는 건 너야.
노아가 진심으로 부탁했다.
현관 홀에 도착하니, 벌써 안으로 들어온 조부모님이 클라레의 열렬한 인사를 받고 있었다.
흐뭇한 풍경에 레토의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하지만 할머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