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에페레나 대위 및 제7함대의 부대 내 가혹 행위 사실이 알려졌다.
본부 내에선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바깥 부대에서도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신문 기자들도 냄새를 맡고 움직임을 보였다.
“벌써 사흘째라며?”
제3함대 대원들이 부둣가를 청소하면서 최근 뜨거운 주제에 대해 떠들었다.
“오늘 드디어 청문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하여튼 군대 망신은 다 시키는구만.”
“누구 말씀입니까?”
“당연히 제7함대 새끼들이지!”
밧줄을 돌돌 말아 정리하던 선임이 욕을 짧게 뱉으며 투덜거렸다.
“가혹 행위를 해 놓고도 사건을 은폐했다는 게 말이 되냐? 그게 사람 새끼가 할 짓이냐?”
“하긴, 그건 정말…….”
후임 중 한 명이 한숨을 푹 내쉬며 뜰망으로 바다에 뜬 나뭇가지와 이파리 같은 부유물들을 건져 냈다.
“듣기로는 피해자들이 억울하게 불명예 제대까지 했다던데…….”
“그런데 아직 가해자 새끼들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단다. 증거는 다 모였는데.”
얼추 진행 사정을 전해 들은 선임이 치를 떨었다.
“우린 진짜 복 받은 거야.”
선임의 말에 후임들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우리도 훈련 빡센데…….’
‘갈굴 땐 겁나 갈구면서…….’
제3함대도 훈련이 힘들기로 유명했다. 아니, 애초에 안 힘든 군대가 없었다. 그런데 뭔 복을 받았단 말인지.
그때, 선임이 말했다.
“적어도 우리 사령관님은 저런 짓은 안 하잖아.”
부대 내 최고 사령관이 주도하여 범죄를 못 본 척하고 은폐를 주도한다니.
듣기만 해도 어이없는 상황이 바로 이웃 부대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제야 후임들이 격렬히 긍정했다.
저 말을 들으니 우리 부대는 그래도 복을 좀 받은 거 같았다.
“사령관님도 이번 일로 얼마나 격분했다고. 언젠가 크게 사고 한번 칠 줄 알았다면서 만날 때마다 욕하신다고.”
“그런데 말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어린 후임이 조심히 손을 들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오, 우리 막내.”
뭐든 물어보라며 선임이 씩 웃었다.
“그 사람들은, 도대체 뭘 믿고 그런 겁니까?”
제2함대는 오케아누스 중장이 역임 중인 작전사령부 예하 부대다.
거기다 지금 오케아누스 중장은 해군 내 최고 수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소환 명령에 불응하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걸까.
“제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갑니다.”
다른 건 몰라도 위계를 중시하는 군에서 상관의 명에 불응하는 건 정말 큰 잘못이었다.
“…에페레나 때문이라잖아.”
선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에 아드벨로랑 무슨 신무기 개발에 들어간다는데, 그걸 제7함대에서도 참여할 거라고 하나 봐.”
“개인 함선처럼 말입니까?”
“말은 그렇다는데…….”
부모님이 마탑에 근무하는 선임으로선 영 믿기 어려운 소문이었다.
최근 일이 있어서 물어봤더니 부모님은 금시초문이라고, 도리어 뭔 소리냐며 되물으셨다.
“그치만 그렇게 따지면 중장님은 오케아누스 가문의…….”
“양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피도 안 섞인 양자가 이제 평민과 결혼까지 했으니, 평민으로 격하될 게 뻔해서 저리 구는 거라고.
“군에서 그런 일이 있다고?”
누군가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이고, 군이 어찌 돌아가는 거냐!”
“그러니까 말이야.”
“이러니 내가 잠시라도 못 떠나는 거야.”
“그나저나 이 새낀 뭔데 말이 짧…….”
뒤를 휙 돌아본 선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게 말이다?”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를 자유롭게 풀어 헤친 여인이 재밌단 듯이 싱긋 웃었다.
반달처럼 휜 눈꼬리에 세월이 느껴지는 주름이 고아하게 파였다.
“네 놈 새끼는 뭔데 말이 짧지?”
“대, 대장……!”
“오냐, 대장님이다.”
“시, 실례했습니다!”
필승!
하룻강아지처럼 귀여운 군인들이 예를 갖춰 경례했다.
“귀여운 것들.”
경례를 받은 아드벨로 대장이 편히 있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정말로 편히 쉬었다간 저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말이다.”
아드벨로 대장이 물었다.
“아까 그 이야기는 도대체 뭘까나?”
이리 와 보라는 손짓이 불량배처럼 껄렁거렸다.
“한번 털어들 봐.”
***
“…이거 정말인가?”
노아가 구해 온 증거 자료를 살피던 레토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잠시 후 열릴 청문회에서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될 자료였다.
“아시지 않습니까.”
증거를 구해 온 노아는 여느 때처럼 덤덤할 뿐이었다.
“제 부모님이 마탑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근무 중입니다. 물어보니 의심스러운 상황이 보인다며 알아보신 후에 이를 전해 주셨습니다.”
“중장님, 만약 이게 정말이라면…….”
레토의 옆에서 자료를 힐끔 훔쳐보던 피스트 준위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약이 아니야.”
자료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난 레토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마탑주의 도장까지 찍힌 공문이야. 이건 진짜고, 아마 이 내용대로라면…….”
“곧 신문과 라디오 뉴스에서 대서특필할 겁니다.”
노아의 대답에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마탑주 손등에 입술을 맞추고 싶긴 처음이군.”
그래도 용서해 줄 거지?
레토가 노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희미하게 웃어 보인 노아는 기꺼이 봐주겠다며 넓은 아량을 자랑했다.
“사람 마음이 저렇게 바다처럼 넓기도 어려운데.”
레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신부님을 안타까이 바라봤다.
그 모습이 제 짝을 보고도 다가가지 못해 낑낑거리는 개랑 똑같았다.
“…그러니 자기가 안 차이고 결혼한 거지.”
사내 연애에 진절머리가 난 아미가 악의를 담아 중얼거렸다.
“중장님.”
때마침 레토가 아미에게 엎드려 뻗치라고 벌을 주려던 찰나, 아이스 중령이 그를 찾아왔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다녀올 테니 다들 얌전히들 있어. 치티아 중위 넌 5초 정도 엎드려 뻗치고.”
엎드려 뻗친 아미를 제외한 특함 대원들이 레토를 배웅했다.
그의 뒤를 따라 노아와 피스트 준위가 관련 자료를 챙겨 나섰다.
아이스 중령도 같이 이동하면서 회의실 상황을 전달했다.
“에페레나 자작이 도착했습니다.”
“가해자 측 증인으로 참석한다고?”
“제 아들과 가해자들은 죄가 없다고 증언할 예정이랍니다.”
“세상 어찌 돌아가는 건지…….”
피스트 준위가 세상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찼다.
“내 생각에 그 부자 둘은 평생 배부르게 살 거야.”
욕을 실컷 먹으니 굶주릴 틈이 없을 거니까.
레토가 진심으로 그들 부자의 굶주림 없는 미래를 기도했다.
“…가해자 부모가 증인으로 참석이 가능합니까?”
이해가 가지 않은 노아가 물었다.
“안 된다는 규정은 없지.”
정식 재판이었다면 절대 증인 채택이 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지금부터 열릴 청문회는 가해자들의 가혹 행위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레토를 비롯한 본부 측 제독들은 이번 청문회를 통해 어떤 처분을 내릴지 결정할 예정이었다.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지.”
모두가 뻔뻔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자신들의 당장 이 순간이 중요한 열등감 덩어리들에겐 어떤 상식도 통하지 않을 거다.
“이쯤 되니 그 아버지란 놈 얼굴이 궁금하군.”
레토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슬슬 재밌어지려고 했다.
“우리 에페레나 대위는 개념을 질질 싸고 다녀서 아버지가 기저귀 채우고 젖 물려야 하는 아기인가 보다.”
“아비 젖 같은 놈이지 말입니다.”
“…….”
“…….”
레토와 아이스 중령, 피스트 준위 세 사람 다 노아의 혼잣말에 절실히 공감했다.
하지만 어감에 조금 문제가 있어서 대놓고 공감하진 못했다.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레토가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경례를 받으며 자리에 앉은 레토는 제 앞에 놓인 서류 겉표지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거짓 가혹 행위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한 청문회’…….”
표지에 적힌 글귀를 읽는 레토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일단은 내가 청문회 위원장으로서 중립을 지켜야 하거든?”
“버리겠습니다.”
“전부 버려라.”
노아가 자리에 있는 서류들을 전부 수거해 갔다.
대부분은 얼른 가져가란 듯이 몸을 비켜 주거나 직접 서류를 집어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몇몇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노아는 그들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며, 빈 종이 상자 안에 수거한 서류들을 버렸다.
“저 짓거릴 한 새끼는 나중에 따로 색출하도록 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기를 기다린 레토가 의사봉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 청문회의 진짜 이름을 알렸다.
“지금부터 해군 본부 및 제7함대 부대에서 자행되었다고 의심되는 가혹 행위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시작한다.”
의사봉이 내리쳐졌다.
***
“대장님!”
“아드벨로 대장님 오셨습니까!”
“필승! 대장님께 인사드립니다.”
청문회로 어수선한 와중, 예고 없는 아드벨로 대장의 등장에 본부는 다른 의미로 어수선해졌다.
“오냐, 너희 대장님 오셨다아아.”
아드벨로 대장은 청승맞은 노래처럼 말끝을 길게 늘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저를 보며 벌벌 기는 부하들을 보는 게 참 즐거웠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특함 사령부였다.
대장님 방문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특함 대원들이 다들 벌떡 일어났다.
“오냐, 오냐.”
제게 서둘러 인사하는 대원들에게 편히 앉으라고 지시하며, 아드벨로 대장은 사령부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벽 옆에 있는 사령관실 문을 벌컥 열었다.
“저, 대장님.”
아미가 총총 다가갔다.
“혹시 중장님을 찾으십니까?”
“그럼 내가 여기서 갈굴 새끼가 그 애송이 말고 또 있겠냐?”
텅 빈 사령관실을 두리번거린 아드벨로 대장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청문회가 열린다고?”
“예. 중장님께서 청문회 위원장으로 그곳에 참석 중입니다.”
사령관실 문을 닫고 나온 아드벨로 대장은 주인 없는 책상 2개를 발견했다.
그중 가까이 있던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앉았다.
노아의 자리였다.
“어디서 하는데?”
“본관 제1 회의실입니다.”
팔짱을 끼고 듣던 아드벨로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한데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