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지금 그러니까.”
잠시 말을 멈추라 한 레토는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사령부실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침묵에 빠졌다. 몇몇은 아예 턱관절이라도 빠졌는지 입을 다물지조차 못했다.
“내 명을 따르지 않겠다?”
“…죄송합니다.”
그저 가해 측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뿐인데, 베르나르 중사는 자신이 큰 죄를 짓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다행히 레토는 크게 화를 내진 않았다.
“아니, 뭐. 그대가 잘못한 것도 아니지.”
“…….”
“아닌 건 아는데…….”
하긴, 예상했던 바라 놀랍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상했던 그 이상으로 변명한 건 제법 놀라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명령 불복종을 기꺼이 하겠단 이유는 뭘까?”
“시간을 벌려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노아가 양해를 구하고 끼어들었다.
“오늘 본부로 소환하지 않으면, 내일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강제 소환이 가능하단 걸 저들이 모르진 않을 겁니다.”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받을 것을 알고도 본부로 오지 않았다는 건, 분명 꿍꿍이가 있단 뜻이었다.
“일리 있군.”
레토 역시 이에 동의했다.
“그놈들도 자기들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거야…….”
그러니 명령 불복종으로 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안에 어떻게든 자신들의 죄를 감추려는 수작을 부릴 게 분명했다.
레토는 잠시 제7함대의 위치를 떠올렸다.
“오케아누스 영지 근방인데…….”
그러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 잠시 자리 좀…….”
그 틈에 노아도 밖으로 나왔다.
사령부실 분위기 탓인지 유달리 어수선한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바깥에 설치된 낡은 공중전화였다.
노아는 거기에 낡은 동전을 몇 개 넣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신음이 들린 후.
“…여보세요, 엄마?”
노아는 수화기 너머로 인사하는 제니 벨로에게 물었다.
“혹시 에페레나 자작이라고 알아?”
이어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걘 또 뭐니?]
***
오케아누스 영지는 마탑이 폭발하기 이전부터 왕국에서 가장 번성한 해안 도시 중 하나다.
지금은 아드벨로가 관리하는 샤프 영지에 그 위상을 잠시 빼앗겼다고 하나, 오랫동안 바다를 지켜 왔다는 명예만큼은 아드벨로도 한 수 접을 정도였다.
그 증거로 오케아누스 영지엔 해군의 씨앗을 기르는 사관 학교가 있고, 근방 해안에는 제7함대가 위치했다.
오늘 그곳 제7함대에서 오케아누스 영지로 외출을 나왔다.
제법 많은 인원수였는데, 그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자아, 마셔! 마시라고!”
“너희가 여기에 언제 또 와 보겠어?”
술집이 떠나가라 외치는 쪽과.
“…….”
“…….”
그저 군기가 바짝 들어간 자세로 눈치만 살피는 쪽.
“아이고, 왜 이리들 기가 죽었어.”
한참 술을 권하던 선임 중 한 명이 힘이 바짝 들어간 후임 한 명의 손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술잔을 강제로 쥐게 한 뒤, 손수 술을 따라줬다.
“마셔. 쭉쭉 마시라고!”
“그간 오해도 있었던 거 같은데, 이렇게 술 한 잔으로 잊으면서 푸는 거지.”
하지만 술잔을 채우는 술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끝내 잔을 전부 채우고 넘친 술은 잔을 쥔 군인의 손을 적시고 떨어져 바지 무릎에까지 스며들었다.
“내가 너 사랑하는 만큼 따랐다!”
“…….”
혼자 만족한 선임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술잔을 받은 군인은 차마 그걸 마시지도, 그렇다고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을 닦지도 못했다.
“으음, 왜 안 마시냐?”
“혹시 우리가 우습게 보이나?”
“지금 선임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무시하는 거야?”
“이것들이 뭘 믿고 이러지?”
“여기가 밖이라고 자신감이라도 생긴 거냐?”
“아아,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결국 진심 어린 성의란 건 이런 거였다.
“X발 새끼들아.”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거칠게 놓은 선임이 말했다.
“너네 이제 군 생활 안 해? 안 하려고?”
“앞으로도 열심히 우리랑 마주하고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계속 이렇게 꿍해 있을래?”
치칙, 하고 누군가가 담뱃불을 지폈다.
희뿌연 연기가 채 공중으로 오르기도 전에, 담뱃불은 겁을 먹은 군인들의 무릎 사이로 떨어졌다.
“물론 우리도 사람이니까 실수 좀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응?”
선임이 일부러 보란 듯이 소파를 지졌다.
동그랗게 탄 자국이 화려한 무늬의 소파 가죽에 흉측하게 남았다.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기가 바짝 죽은 후임들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선임들은 킬킬거리며 자신들끼리 술을 들이켰다.
후임들은 결국 한 잔도 제대로 들이켜지 못했다.
그러던 중, 선임들이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아, 진짜 돈 아깝게……!”
“어차피 몇 대 갈기면 알아서 기어갈 찌질이들인데.”
담배를 피우자마자 욕부터 쏟아졌다.
“어차피 저것들, 지금 보니까 아무 말도 못 하게 생겼어.”
“그니까 말입니다. 아아, 애먼 돈 날리는 거 아닙니까…….”
“야, 그래도 이게 다 성의라고.”
우린 할 만큼 했어.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며 딱 그 수준에 맞는 저열하고 역겨운 대화를 나눴다.
“그래도 사령관님이 돈 주신다잖아.”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선임이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던지며 신발로 벅벅 비비듯 짓이겼다.
“이번에만 잘 넘기자고.”
에페레나 가문이 이번에 아드벨로와 진행하는 군수 무기 개발 계약이 무사히 성사만 된다면 다 끝나는 일이었다.
“오늘 사령관님이 에페레나 자작을 만나러 갔어.”
지금 진행되는 거래만 성사되면, 이번 사건은 가볍게 끝날 거다.
그리고 특함을 뛰어넘는 특수부대로 재편될지도 모른다.
“개인 함선보다 더 대단한 걸 만든다지?”
“그것만 만들어지면 저희도 특함처럼…….”
“우리도 이름 떨치는 거지. 망할 특함 새끼들, 그 기고만장한 목도 꽤 꺾일 거고.”
“그나저나 내일은 어찌 될는지…….”
누군가가 은근히 걱정되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또 다른 누군가가 애써 아무렇지 않단 듯이 말했다.
“우린 아무 일도 없었어.”
그저 사소한 오해가 왜곡된 것뿐이고, 그 오해도 오늘 이 술자리에서 다 풀어냈으니까.
“오케아누스 중장이 뭐 힘이라도 쓸까?”
아드벨로 대장이라도 있으면 몰라, 그 젊은 중장은 이제 끈 다 떨어진 끄나풀이나 마찬가지였다.
“피도 안 통하는 양자 새끼가 얼마 전에 평민이랑 결혼까지 했으니, 이젠 더 이상 귀족이 아니잖아.”
“그래도 성씨는 아직 오케아누스 아닙니까?”
“그래서 뭐? 후계자는 그 밑에 있는 어린놈이 잇는다며.”
오케아누스 후작에겐 양자로 들인 아들만 둘이었다.
그중 한 명이 레토고, 다른 한 명은 방계 출신 중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년이라고.
떠들 것 다 떠들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뭐야?”
안에 있던 후임들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일행 분들이십니까?”
종업원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사장님께서 나라 지키는 군인들께 무료 안주를 제공하라고 하셔서, 드시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러 왔습니다.”
“오오, 그래요?”
선임들이 히히거리며 주문했다.
“무엇이든 시키세요.”
종업원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
“에페레나? 아아, 잠깐만….”
“그래! 네 아빠가 엄청 욕했던 인간이야.”
“엄마도 이제 기억난다. 개인 함선을 뛰어넘는 무기를 만들자고 계속 연락하는데…….”
“말이 쉽지, 돈은 뭐 누가 대 줄 건데? 개인 함선도 결국 우리 집 돈 들여서 만드는 거잖아.”
“그런데 그쪽은 우리가 자기랑 계약하는 것처럼 군다니까?”
“응? 아아, 그 사업은 다른 곳이랑 계약할 예정이야. 그것도 뭐 공동은 아니고 투자를 받는 쪽이지만…….”
노아는 제니 벨로와 통화하며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믿는 구석이 이거였군.’
그것도 아주 어마어마한 착각으로 만들어진, 존재하지도 않는 벽돌로 쌓아 올린 투명한 성벽이 그들의 믿는 구석이었다.
“…….”
노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런 걸 착각할 수 있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100년 전 마탑이 폭발하며 수많은 귀족이 몰락했다.
그러니 현재 살아남은 귀족들은 시대상의 흐름을 빠르게 받아들이며 변화를 추구하는 눈치와 생존력을 지녔다.
에페레나 자작도 그중 한 명일 테고.
거기다 그는 아드벨로와 연줄이 있을 정도다. 어지간한 눈치와 머리는 지니고 있단 뜻이었다.
‘어쩌면…….’
불현듯 떠오른 추측들이 몇 가지 있었다.
“엄마,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이야…….”
노아는 다시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현 군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조금 전 떠올렸던 추측을 말했다.
[그래. 이상하긴 하구나.]
노아의 추측에 동의한 제니 벨로는 알아보고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후우…….”
공중 전화기에서 나온 노아는 다시 사령부실로 향했다.
“클라레가 또 화내려나.”
오늘도 집에 일찍 들어가긴 그른 듯했다.
***
다음 날.
소환 명령에 불응했던 제7함대 관계자들이 본부에 도착했다.
출발할 땐 나름 당당했던 그들의 태도도, 친히 마중 나온 레토와 군사 경찰들을 마주하기 무섭게 주춤거렸다.
레토는 저를 보며 긴장한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젠 인사도 없다?”
그 말에 뒤늦게 경례를 갖췄으나, 레토는 보지도 않았다.
“내가 너희들을 어찌할 줄 알지?”
“중장님. 이건 오해십니다.”
“뭐가? 내 명령에 불복종한 게?”
“저희의 사정은 듣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한쪽의 이야기만 들은 채로 편파적인…….”
“그러지 않으려고 내가 어제 그대들을 소환했던 건데.”
“…….”
더는 들어 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레토가 뒤에 있던 군사 경찰들에게 말했다.
“데리고 가.”
빙그레 짓던 눈웃음은 한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레토는 저들을 임시 보직 해임하고 영창에 가뒀다.
그들의 은색 계급장에 검은색 천이 붙여지며 가려졌다.
그들은 일순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순순히 받아들였다.
영창에 갇힌 이들은 곧 한 명씩 이동했다.
“여러분들은 이쪽입니다.”
안내하던 군인은 피해자들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앞서 취조실로 간 가해자들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분위기가 편안한 방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밖이 환하게 보이는 창문이었다. 잘 가꿔진 외부 정원 너머로 바다도 조그맣게 보였다.
그 방에는 미리 온 사람들이 있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네.”
정갈한 검은색 신관복을 입은 남자가 먼저 인사했다. 그에게선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눌 베네딕토 군종실장이네.”
그리고 군종실장 옆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한 명은 군복을 입었고, 다른 두 사람은 사복 차림이었다.
“우선 차부터 들겠나?”
군종실장은 제 손으로 직접 차를 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