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245)

55.

긴급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날 오후에 수사대가 꾸려졌다.

수사대는 에페레나 대위를 즉각 체포, 영창에 가뒀다.

사무실에서 제 할 일을 부관들에게 떠넘기며 농땡이를 피우던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에페레나 대위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전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냥 훈육 차원이었다고요!”

“대위님.”

그를 이곳까지 끌고 온 군사 경찰 중 한 명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잘 알고 계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X발, 뭐라는 거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에페레나 자작 가문의 후계자라고! 내가 얼마나 귀하게……!”

“그러니까.”

창살에서 몸을 한 발짝 떨어트린 군사 경찰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러나 비틀어진 채 올라간 입꼬리엔 경멸이 가득했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린 것처럼.

“그 훈육 차원으로, 뭘 하신 겁니까?”

“…….”

“그리고 해군은 신분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해군에선 오로지 시간과 경력으로 쌓아 올리는 군사 계급이 전부였다.

“조금 전 발언은 조사 보고서에 올라갈 겁니다.”

“너 이 새끼가……!”

악에 받친 에페레나 대위가 창살을 붙들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 미동조차 없는 창살에 머리를 대고 듣기도 거북한 욕설을 마구 쏟아 냈다.

그러나 지켜보는 군사 경찰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중장님의 명입니다. 잘 감시하십시오.”

할 일을 마친 군사 경찰들이 영창을 나왔다.

“…사감이 좀 섞이신 것 같습니다.”

동행했던 후임이 그제야 물었다.

조금 전에 에페레나 대위에게 노골적으로 경멸을 보였던 선임이 머쓱하게 웃었다.

제대로 된 표정을 지은 그는 상당히 선한 인상이었다.

“사실 그 새끼 때문에 내 친구가 퇴역했거든.”

“아…….”

차마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던 후임은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땅만 바라봤다.

선임은 그런 후임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괜찮아. 다행히 더 좋은 곳에 취직해서 주말엔 남들처럼 쉬면서 살아.”

“하지만 억울하실 거 아닙니까.”

“당연하지…….”

가끔 술을 기울일 때면 울먹이는 친구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수사에 거는 기대가 컸다.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해.”

조금 전에 본 에페레나 대위에겐 진심 어린 사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는 마지막까지 반성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부디 그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억울했던 피해자가 한을 풀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당연히 이래야 하지만, 가끔은 그 당연한 일이 너무 어려웠다.

***

“후우…….”

노아는 이게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네.”

옆에서 같이 서류를 살피던 아미도 덩달아 욕을 퍼부었다.

“이딴 새끼한테 내 세금을 썼다고? 이런 건 하늘에 계신 어머님도 가래침 뱉고 꺼지라 할 판이야!”

“이번엔 네 맘이 내 맘이다…….”

둘은 밤을 지새우며 제7함대에서 압수해 온 서류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레토가 수사대를 꾸리자마자 한 일은 제7함대를 압수 수색해 인사 및 감찰 기록을 전부 가져오게 하는 일이었다.

여기엔 의무실 기록도 포함이었다.

예고 없는 방문에 놀란 제7함대는 속수무책으로 서류를 빼앗겼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군사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그쪽 관계자들의 얼굴이 속된 말로 X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X도 아깝다, 진짜…….”

갑자기 잡힌 야근에도 아미가 군말 없이 참여했던 건, 평소 쌓인 게 많았던 에페레나 대위에게 한 방 먹이겠단 사심 때문이었다.

하나 지금은 그 사심을 잠시 지워야 했다.

“피해자가 못 해도 다섯 명. 최소 다섯 명이야.”

“전역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노아가 자신이 찾은 의심 정황들을 확인하며 물었다. 이쪽은 지금 3명 정도 있었다.

“여기 2명 더 있어.”

“그러면 얼추 10명.”

그리고 조직적으로 은폐된 정황으로 볼 때.

“제7함대 함대장을 포함…….”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아까부터 잠자코 있던 레토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말해.”

기대하는 바도 없었던 레토는 휙휙 허공에 젓던 손으로 내려온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아예 여기서 자고 갈 예정이라 씻고 온 상태였다.

노아와 아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아미가 말했다.

“…제7함대 함대장을 포함하여 장교급 8명이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을 은폐하려고 조작한 서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증언하는 쪽, 그리고 그 증언이 적힌 서류를 결재한 쪽.

“내일 날 밝자마자 그 8명의 동선을 확인하고 수상한 만남이나 공통적으로 접촉하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하도록.”

“예, 중장님.”

“벨로 대위는 서류에 적힌 피해자 중 전역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넣게.”

지금이라도 처벌을 원한다면 고소 절차를 도와주겠다고 전달하라 했다. 노아가 굳은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 잘못인 거 같아…….”

아미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자기 수영복 차림에 심취해서 변태 짓 하다 쫓겨난다고 내기할걸.”

괜히 영창 갈 거 같다고 입방정을 떨어서 일이 이렇게 된 건 아닌지, 아미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

그렇지 않다고 다독이려던 노아는 위로하지 않아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 진짜…….”

레토는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벅벅 쓸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처제한테 사과하고 같이 놀려고 했는데.”

“사과라…….”

아미가 피식거렸다.

“과연 이 새끼들은 사과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없겠지.”

노아가 대놓고 빈정거렸다.

“그럴 정신머리가 있는 것들이라면,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지도 않았어.”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아미는 이해가 안 갔다.

당일에 긴급 압수 수색한 서류만으로 파악된 가혹 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유치하다면 유치하고, 잔인하다면 정말 잔인했다.

‘고작 저 서류 몇 장만으로도 이만큼이 나왔는데…….’

피해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심각할까.

친구끼리 치는 장난에도 정도가 있다.

그런데 서열이 중시되는 군내에서 이런 가혹 행위를 저지른다는 건, 상대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살인 행위나 다름없었다.

“왜 그런지 알아?”

레토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지 못하는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 것도 없어.”

레토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뭘 하면 즐겁고 행복하지?”

“재밌는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책을 살 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늦잠 실컷 자고 일어날 때나, 신성청이 엿 먹고 있을 때면…….”

“…….”

“…….”

“뭐, 그럴 수도 있지?”

개인의 신앙은 자유라며 아미가 떳떳이 말했다.

“…어쨌든 바로 그거야.”

레토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별 게 아니었다.

“우린 우리 스스로 만족을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에페레나 대위 같은 놈은 그러지 못해.”

“그냥 자기가 귀족이라고 믿고 설치는 게 아니란 소리입니까?”

“그렇게 따지면 내가 가장 쓰레기처럼 굴었어야지.”

“…….”

연애할 때 그러지 않았던가?

아미는 노아에게 얼추 들었던 두 사람의 연애 시절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눈치껏 입 다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사실, 레토는 대귀족치고는 정말 얌전한 편이었다.

“이런 새끼는 누군가를 짓밟아야만 삶이 즐거운 거야.”

타인을 깔보고, 무시하고, 괴롭히거나 때려야만 제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열등감마저 높았다.

“그런 놈들은 보통…….”

레토의 손이 바닥을 짚었다.

“실제로는 여기밖에 안 돼.”

바닥에 닿았던 손이 그의 머리 위까지 솟구쳤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높이 올라 뻗은 손을 본 노아와 아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비웃었다.

“보통은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거나, 그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하는데…….”

“에페레나 대위는 그러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손을 도로 치운 레토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조금 전 노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능력과 실력도 없는 게, 꼴에 우월해지고는 싶으니 저보다 잘났지만 성실한 남을 깎아내리는 거야.”

***

다음 날 아침.

“아침 먹었어? 응, 못 가서 미안해. 언니도 우리 클라레가 너무 보고 싶지…….”

당직실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난 노아는 곧장 집으로 전화했다.

[오늘 올 때 선물 안 사 오면, 나 계속 삐칠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어린 동생의 투정은 아침부터 씩씩했다. 동그란 볼을 씰룩이며 투덜대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알았어, 저녁에 꼭 가도록 할게.”

학교 잘 다녀오고, 사랑해.

수화기 너머로 뽀뽀 소리를 나누며 노아는 전화를 끊었다.

“들으셨습니까?”

노아가 어느새 제 뒤에 선 레토에게 말했다.

“오늘은 꼭 집으로 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중장님의 처제가 삐쳐서 일주일 동안 말도 안 할 겁니다.”

“그건 안 돼…….”

울상을 지은 레토는 뒤에서 노아를 끌어안았다. 노아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도닥거렸다.

“내가 그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클라레처럼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치만 징징거리고 싶어…….”

위로 좀 해 달라며 레토가 노아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팽창하는 흉근이 등을 통해 선명하게 느껴졌다.

부끄러워진 노아는 애써 침착하게 몸을 돌렸다.

“오늘 피해자들에게 연락할 겁니다.”

“제7함대 관련자들도 데려올 거야. 취조 후에 임시로 보직 해임하고 영창에 가둘 예정이고.”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까요?”

“꼬리 자르기는 충분히 예상되는데…….”

그러나 레토는 고작 꼬리 따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곪은 상처는 전부 도려내야 새 살이 나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노아는 존경과 사랑을 담아 상관에게 입을 맞췄다.

“…공사 구분하자더니?”

레토가 금세 떨어진 입술을 아쉬워하며 혀로 제 입술을 살짝 핥았다.

“아쉬우면 돌려주십시오.”

“근무 중이니까 어쩔 수 없지.”

돌려줘야 하지 않겠나.

레토는 능청을 부리며 다시 입을 맞췄다.

사령부실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 있었다.

“중사, 달리스 베르나르. 오케아누스 중장님의 명으로 창설된 수사대에 임시 배속되었습니다.”

“밤새 수고가 많았어.”

“아닙니다. 피해자들을 구명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줄 수 있어 영광입니다.”

베르나르 중사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온 이유는?”

“제7함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베르나르 중사가 가지고 온 건 썩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어제의 예고 없는 압수 수색이 억울하며, 사소한 오해로 일이 커지는 것은 해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소환 명령에 응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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