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자, 잠깐……!”
하사가 서둘러 물러나려 했지만, 노아의 손이 더 빨랐다.
소매를 걷어 올리자 햇볕에 적당히 그을린 갈색의 탄탄한 팔이 드러났다.
여기까지라면 성실히 단련하는 군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사의 피부를 본 노아와 셀린의 표정은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너!”
셀린이 윽박지르듯 소리치는 동시에 하사가 노아의 손에서 제 팔을 빼냈다. 그리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
“…….”
그 모습을 노아와 셀린은 끝까지 지켜봤다.
“이름 외웠나, 보르 중위?”
“예.”
“촬영은 나 혼자 할 테니, 그댄 당장 중장님께 가서 상황 보고하게. 그리고 치티아 중위에게 조사 부탁하고.”
“예, 대위님.”
셀린이 서둘러 사령부실로 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은 노아는 조금 전 하사가 도망치듯 달려갔던 방향 쪽을 눈에 잠시 담았다가 몸을 돌렸다.
‘정말 돌아 버리겠군.’
건장한 팔에 남은 울긋불긋한 멍 자국.
‘…색깔이 전부 달랐어.’
격분하려는 감정을 빠르게 가라앉히려 하며, 노아는 원래 가려던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이 힘이 들어간 주먹이 분에 겨워 흔들리는 것까진 감추지 못했다.
결국 그날 촬영은 노아의 손바닥에 난 손톱 자국을 가리기 위해 장갑을 낀 채로 진행되었다.
***
“하아, 하아…….”
한참을 달려 벗어난 뒤에야, 알라크 트로피아 하사는 달리느라 가빠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
젊은 하사는 그제야 들춰진 제 팔뚝 소매를 발견했다.
제 팔을 본 하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기에 노출된 저의 팔뚝엔 색과 크기가 다른 멍이 군데군데 있었다. 전부 다른 날에 당했단 뜻이었다.
이 더운 날에 그가 긴소매를 입고 다니면서도 차마 팔을 걷어 올리지 못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봤겠지?”
소매를 다시 내리는 하사의 표정은 굳은 채였다.
벨로 대위가 그 남자와 대치했고, 엄청난 망신을 줬단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 탓에 어제 온종일 예민했던 남자는 저를 더욱 집요하게 괴롭혔다.
솔직히 고소하긴 했다.
그래도 역시 그 남자를 자극하지 말아 주길 바랐다.
‘하지만 어쩌면…….’
헛된 희망이 피어나려던 찰나.
“야.”
무자비한 음색이 꽃을 짓밟는 야만인의 걸음처럼 다가왔다.
“…에페레나 대위님.”
트로피아 하사가 아무 일도 없단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아주 군기가 빠졌지? 살판 났냐?”
“…….”
“어딜 감히 상관 눈을 똑바로 보지? X발, 아주 그냥 내가 만만하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순식간에 무기력해진 그의 목소리는 그저 복종의 대꾸만을 내뱉었다.
때마침 그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커다란 구름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에페레나 대위는 그런 하사를 보며 아주 재미있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리 와라.”
***
그날 오후, 오케아누스 중장은 참모총장의 권한을 임시 발동하여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서둘러 회의실로 모인 군 관계자들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해군의 젊은 2인자는 성격이 삐뚤어졌기로 유명하지만, 그렇게까지 권위를 내세우는 편은 아니었다.
아드벨로 대장이 자리를 비운 지금도 어지간히 심각한 사항이 아니면 모든 사항을 자율적으로 맡겼다.
그런 점에서는 아드벨로 대장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인간이 지금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
“…….”
어린 상사에게 나름의 자존심을 지켜 보려고 당당히 들어왔던 고위급 장교들은 그의 살벌한 기세에 짓눌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리켄 에페레나.”
레토는 오늘 회의의 주제를 찢어 죽이듯 발음했다.
“내가 이 이름을 왜 불렀는지 알겠나?”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장교들은 어리둥절했다.
“…….”
반면 그 이름을 아는 몇은 눈을 질끈 감거나 더더욱 고개를 숙이며 레토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
어떻게든 분을 삭이려는 레토의 목소리는 맹수의 경고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일 못 하는 거? 사람이 어찌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겠어. 못 하면 가르치면 되는 거 아닌가.”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레토는 그것도 참을 수 있었다.
못 알아들으면 한 번 더 차근히 설명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또 설명하면 된다.
물론 몇 번을 알려 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적성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니 능력을 키우고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면 그만이었다.
“실수도 괜찮다. 둔해도 괜찮다. 느려도 괜찮다.”
그건 죄가 아니다.
“군인 자체가 적성이 아니라면 다른 직업을 권유하면 돼.”
해군은 전역 군인들의 재취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인가?”
레토가 물었다.
“아닙니다.”
장교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베네딕토 실장이 은근히 말했다.
“우리에게 패배한 제국은 바다 건너에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든 다시 전쟁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금 느린 아군을 다독여 성장시키는 것이 저희의 의무입니다.”
또 다른 장교가 이어 말했다. 그녀는 르테아 키르 의무실장이었다.
“바로 그거야.”
레토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제대로 된 군인 구실 하도록 지도하고 가르치는 게 우리들의 의무다.”
레토가 말하는 정론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 소양일 뿐이었다.
조금 차분해진 레토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그의 분노가 다시 들끓는 건 금방이었다.
“아군을 괴롭힌다?”
쾅!
주먹으로 내려친 회의 테이블 모서리에 두꺼운 금이 갔다.
주먹을 떼기 무섭게 금 간 모양대로 나무 파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함께하는 동료를?”
그것도 자기보다 계급이 낮은 부관을?
“만약 전시 상황이라면…….”
레토는 자신이 부서트린 테이블을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노려보며 짓씹듯 내뱉었다.
“그 새끼를 적군보다 먼저 죽여야 해.”
군 내부 기강을 흩트리는 건 느려터진 아군도, 이해가 늦은 부하도 아니다.
동료의 인간성을 무시하는 부적응자들이야말로 군의 해악이고 반드시 멸종시켜야 할 기생충이었다.
“리켄 에페레나 대위에 대한 불만 사항이 계속 올라오는 중이었는데, 오늘 기어코…….”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든 것이었다. 그래도 레토는 숨을 한 번 크게 내뱉은 뒤에 억지로 말을 이었다.
“제 부관에게 폭력을 휘두른단 의심 신고까지 들어왔다.”
그의 분노는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살을 아리는 고요한 노여움은 자리에 있는 장교들의 숨을 천천히 조였다.
그 속에서 유일하다시피 평온한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성호를 그었다.
부디 제 상관이신 오케아누스 중장님께 마음의 평화가 오길.
그리고 에페레나 대위에겐 천벌이 내려지길.
“이 새끼를 본부로 차출한 새끼 누구야.”
인사 참모 부장인 코멘 소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안 죽일 테니까 변명부터 해 보게.”
“…….”
“내 입으로 떠들면 그땐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거야.”
내가 직접 처형자가 되는 꼴이 보고 싶으면 한번 입 다물어 보라며 레토가 다정히 설득했다.
그제야 코멘 소장이 변명 아닌 변명을 말했다.
“…에페레나 대위는 석 달 전에 본부 공보 정훈실로 발령되어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전에는?”
“제7함대 사령부에 있었습니다.”
레토는 기가 막혔다.
제7함대는 자신이 사령관으로 역임하는 작전사령부 예하 부대 중 하나다.
오케아누스 영지보다 조금 더 서쪽에 위치한 이곳은 레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제독이 보직 중이었다.
‘하필 그 인간의 밑에서 저런 놈이 나왔다라…….’
제7함대에 부임한 제독을 떠올린 레토는 놀랍지도 않았다.
“추천서도 있었고, 기록된 내용 역시 나쁘지 않았습니다. 평정 또한 타 군인에 비하여 월등히 좋았…….”
“내가 아는 것과 다르군.”
더 들을 필요도 없단 듯이 끼어든 레토의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아미가 직접 조사해 올린 보고를 들려줬다.
“이전 부대에서도 최근 제기된 문제들로 말이 많았더군. 하지만 꼭 마지막에 가서 조사가 흐지부지되었고.”
그런데도 공식 기록에는 단 한 건도 남아 있지 았았다.
괴롭힘에 시달린 피해자들만 다른 곳으로 도망치듯 발령되었고, 오히려 몇몇은 가해자로 몰려 불명예제대를 당했다.
“나만 이게 어이없나?”
레토가 장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사건을 은폐한 거로도 모자라 왜곡까지?”
군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미는 고작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알아냈다.
“내가 지금 당장 그 새끼를 찢어발기지 않은 게 대단하지 않나?”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무겁고 끔찍한 침묵만이 회의실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지금은 침묵이 유일한 정답이었다.
만약 대답이라도 했다간, 단단히 화가 난 레토가 자신들을 저 테이블처럼 부서트릴 게 뻔했다.
정신을, 말이다.
“…….”
얼굴 가죽 두꺼운 베네딕토 군종실장조차 저 혼자 팔자 좋게 성호를 긋거나 애먼 기도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딴 게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코멘 인사 참모장.”
“예, 중장님.”
대답하는 코멘 소장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그러나 그 기저엔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에페레네 대위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그때 받은 기록들 전부 나한테 가져와. 하나도 남김없이.”
“예.”
“그리고 에르와쇼 감찰실장.”
“예, 중장님.”
매끄러운 콧수염이 눈에 띄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군사 경찰에 연락해 수사대를 꾸리도록.”
레토는 압수 수색을 즉각 수행하라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