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자세한 사정은 레토도 알지 못한다.
그저 현재까지 일어난 상황, 여기에 락소가 구해다 준 은밀한 자료, 그리고 재수 없는 국왕의 성격을 조합해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근거를 토대로 낸 합리적 추측이었다.
“국왕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숨은 간첩이나 반동분자를 색출하려는 모양이야.”
신빙성도 충분했다.
“이적 사건 때 죄를 지었던 그 평기사. 수도 외곽에서 마약을 재배하고 제조했었대.”
“와.”
노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며 두 손을 가볍게 들었다. 당연히 진심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마약을 얼마 전에 우리가 소탕했던 해적단을 통해 제국으로 유통했고.”
“이게 그렇게 얽힌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노아가 살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레토는 손을 뻗어 노아의 젖은 입술을 엄지로 살살 닦았다.
“그럼 오빠는 자기 동료랑 그 해적단을 만나러 온 거야?”
“동료만.”
“해적은?”
“그대로 있지.”
다행히 테네브레는 결과가 나오면 알려 달라는 식으로 협조를 요청했다.
수사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면 어쩌나 나름 걱정했던 레토도 여기선 한시름을 놓았다.
“아마 자기들도 저 망망대해를 달려 해적의 은신처를 기습할 능력이 없으니 우리한테 맡긴 거겠지.”
“해적에게 당했다고 성당을 찾은 것도 고의다?”
“마약 유통이라는 자금줄을 잃어버렸으니, 해적들이 양지로 나올 걸 어느 정도 예상했을 거야.”
그래서 근처 어선들을 감시하던 중에 해적에 피랍되는 걸 목격하고 성당으로 찾아왔던 거다.
“…미친 새끼들.”
노아가 이를 바득 갈았다.
“설마 도청으로 남부에 있는 모든 배를 감시한 거야? 그건 불법……!”
“불법이든 뭐든.”
레토가 경멸에 가까운 웃음을 지었다.
“테네브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그들은 이 모든 상황을 예측, 남부로 몰래 잠입해 출항 가능한 어선에 도청 장치를 심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어민들이 해적단에 피해를 입을 때까지.
“이건 기밀이지만, 구출했던 어선에서 도청 장치가 발견됐어.”
“이러니까 집안에서 테네브레는 안 된다고 한 건데……!”
“반대할 이유가 충분했구나.”
레토는 노아와 그 가족들이 겪었을 마음고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테네브레의 존재 필요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켜내려는 건 국왕의 안위이고, 이는 곧 나라의 존위와 연결되니까.
하지만 그 결과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겠단 그들의 사고방식은 어떤 이유로도 인정될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이라면 더욱 그 방법과 수단을 떳떳하게 해야 한다.
“…안 그래도 지금 손가락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에 부대를 보냈어. 키르코 준장이 지휘할 거야.”
어쨌건 이제 테네브레와 관련해선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레토가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안이 심각하긴 하네.”
몇 달 사이에 군과 간첩이 얽힌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거기다 오빠까지 테네브레가 되어 남부에 나타났으니.
노아가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군 내부자 중에, 그것도 꽤 고위급이 제국과 내통하는 걸까?”
“사실 그쪽 가능성이 가장 크지.”
프레드 렐리.
이적 사건의 숨겨진 주동자였던 평기사는 분명 얕봐선 안 될 놈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속여 제국과 접촉했고, 마약까지 재배하고 제조한 실력까지 지닌 위험분자였다.
하지만 그도 결국엔 한낱 끄나풀에 불과했다.
“진짜 힘 있는 놈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하겠어?”
진정한 흑막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돌아 버리겠네, 진짜.”
한숨을 푹 내쉬며 한 손으로 앞머리를 넘기던 노아가 대뜸 일어나더니 서랍에서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겼다.
“짜증 나니까 일단 씻고 볼래. 욕조에 들어갔다 나와야겠어.”
“나랑 같이 씻을래?”
은근슬쩍 다가온 레토가 노아의 허리를 팔로 두르며 제 쪽으로 당겼다.
“음…….”
노아가 대답을 망설이던 때였다.
“형부!”
거실을 샅샅이 훑어보고 온 클라레가 울상인 채로 돌아왔다.
“선물, 찾아도 안 보이는데…….”
“못 찾았어요? 엄청 큰 건데?”
“뭔데? 선물 뭔데요?”
“바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짜잔, 하고 레토가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더니 가슴에 가져가 댔다.
“…….”
처참하게 굳은 클라레의 표정엔 배신감이 어렸다.
“…퉤.”
아이는 형부와 절교했다.
***
레토는 클라레에게 신뢰를 잃었지만, 그 틈에 목욕한 노아는 덕분에 기운을 좀 차릴 수 있었다.
몸이 편안하니 덩달아 숙면도 취했다. 덕분에 전날의 짜증을 전부 지워 버리고 개운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처제가 나랑 눈도 안 마주쳐…….”
“그러게 왜 거짓말을 해서…….”
“본디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더욱 소중하잖아.”
“그 전에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애들만큼 물질을 좋아하는 존재도 없다며 노아가 뒤늦은 조언을 했다.
“퇴근할 때 뭐라도 하나 사서 선물해.”
“응…….”
“비싼 거 말고.”
“그럼 너도 같이 골라 줘.”
출근 준비를 마친 둘이 현관문을 나섰다.
먼저 나와 있던 아스가 클라레를 등교시키기 위해 자전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흥.”
레토와 눈이 마주친 클라레는 입술을 오리 부리처럼 내밀고는 심술 맞은 숨소리를 냈다.
“요 녀석.”
노아가 점잖게 타일렀다.
“형부가 널 좋아해서 장난 좀 친 거야. 이제 용서해 주라.”
“어린아이의 마음을 능멸했어. 이건 날 향한 기만이야.”
“넌 꼭 이럴 때만 어려운 단어 쓰지?”
하여튼 똑똑하긴.
노아는 똘똘한 여동생의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오늘 저녁에는 그래도 화해해 주자.”
저러다 울겠다며 가리키는 그곳엔, 레토가 커다란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풀죽은 채로 서 있었다.
그는 넓고 탄탄한 어깨를 좁게 모은 채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클라레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불쌍한데 용서해 주죠?”
저런 꼴 보기도 싫고.
아스도 클라레에게 은근히 요청했다.
“…….”
잠시 고민하던 클라레가 별수 없단 듯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저녁에 오면 용서해 줄게.”
“고마워.”
“나도 형부한테 퉤, 한 거. 조금 미안해.”
“그래. 사람한테 침 뱉는 소리 내면 안 돼.”
반성할 줄 아는 동생을 한 번 꼭 안아 준 노아가 차에 올라탔다. 기다리고 있던 레토도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형부!”
클라레게 용기 내어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돈 많이 벌어 와요!”
“처제……!”
감동한 레토가 벌떡 일어났다.
“그만하고 출발해!”
이러다 지각하겠어!
커다란 손을 쉴 새 없이 흔들던 레토는 끝내 노아에게 한 소리 들은 뒤에야 붉은 애마를 움직였다.
“형부는 정말 철부지구나.”
클라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애랑 똑같으면 어쩌자는 건지.”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사람은 착하고 좋아. 그치?”
“돈도 많이 벌고요.”
“아스는 정말 돈을 좋아한다니까.”
나중에 나도 어른이 되면 돈 많이 벌어야지.
야무진 다짐과 함께 오늘도 힘찬 하루가 시작되었다.
***
본부에 도착한 노아는 후줄근한 함상복 대신에 새하얀 하계 정복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화장 도구를 따로 챙겨 온 셀린이 탈의실에서 노아의 화장을 직접 해 주고 머리까지 꾸며 줬다.
“어휴, 너도 참 고생이다…….”
셀린이 노아의 머리를 한데 모아 빗질하며 말했다.
오늘 노아는 모병을 위한 홍보 사진을 찍을 예정이었다.
생도 시절에 사관 학교 입학 모집 사진을 내내 찍었던 경력은 임관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돈이나 주고 찍게 할 것이지…….”
셀린은 제 일처럼 아쉬워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돈도 안 되는 이런 짓을 매년 왜 하는 거야?”
“매년은 무슨. 몇 번 하지도 않았어.”
“나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어떻게든 안 하려고 할 거야.”
빗질을 마친 금발을 끈으로 한데 모아 살짝 내려 묶은 뒤, 그걸 동그랗게 말아 모아 노란색 망사에 넣어 고정했다.
“음, 됐다.”
셀린이 거울 속 저의 작품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흰색 정복을 차려입은 노아는 완벽한 군인의 표본이었다.
화려한 철제 흉장과 금색 수로 장식된 검은색 견장은 거울 속 젊은 여인이 얼마나 실력 좋은 군인인지 알려 줬다.
2년 만에 대위에 오른 젊은 인재.
그렇기에 거울 속 젊은 군인은 마냥 외모만 눈에 띄는 게 아니었다.
빈틈없는 반듯함과 강인한 기운, 올곧은 성품이 느껴지는 아름다움도 돋보였다.
“어때?”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한 노아가 싱긋 웃었다.
“결혼식 때보다 더 예쁜 거 같은데?”
“어제 수영장에서도 생각했는데…….”
셀린은 굽이 낮은 검은 단화를 꺼내며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아는 운동화를 단화로 바꾸어 신었다.
“중장님한테서 화술 배웠니? 아주 능수능란해졌다?”
“내가 그 인간한테 배울 게 그거 말고 뭐 있겠어.”
“솔직히 어제 수영장에서 속은 후련했어.”
탈의실을 나온 둘은 사진 촬영이 진행될 곳으로 이동했다.
지나가다 마주치는 군인들은 노아를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레토에게 밀명을 받은 셀린이 ‘어디선가 미친개가 지켜보는 중입니다!’라고 경고하면 알아서 거리를 두고, 제 갈 길을 서둘러 떠났다.
“그러고 보니 대장님도 곧 도착하시겠네.”
임무 수행을 완료한 셀린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이렇게 자리 비우시는 것도 처음이네.”
“배 타는 게 좋은가 봐.”
본래 항해 복무는 영관급 장교까지만 행했다.
별을 단 제독들은 지상 근무에 역임하는 게 보통이지만, 아드벨로 대장은 틈만 나면 함정에 올라 바다를 여행했다.
“그래서 아드벨로는 다 괴짜라잖아.”
나이가 무색할 만치 혈기 넘치는 대장님을 떠올린 노아는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아.”
그때 지나가던 누군가와 어깨를 가볍게 스쳤다.
노아는 어깨만 살짝 부딪혔을 뿐이지만, 상대는 발까지 꼬며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신음 한마디 없이 넘어진 군인은 하사 계급의 사내였다. 어린 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
“어휴, 넌 손 넣어. 거기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노아가 뻗은 손을 냉큼 치운 셀린이 대신 손을 내밀었다.
넘어진 군인은 머뭇거리다 내밀어진 손을 붙잡으며 일어섰다.
“…….”
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사는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지 시선을 피한 채로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지나가다 보면 부딪힐 수도 있지.”
그래도 다음부터는 조심하라며 셀린이 그를 보내려던 찰나였다.
“잠깐.”
도망치듯 가려던 군인의 손목을 낚아챈 노아가 대뜸 소매를 걷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