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245)

51.

“중장님.”

취조 참관실에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베네딕토 실장.”

레토는 그의 차림새에 절로 눈이 갔다.

베네딕토 군종실장은 군복 대신에 성직자가 입을 법한 시커먼 수도복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눈인사를 짧게 나눈 레토가 물었다.

“아직도 말을 안 꺼낸다고?”

“아예 입을 다물고 금식까지 들어갔습니다.”

“아, 고문은 함부로 못 하는데…….”

7년 전 전쟁 이후, 아들라보르 왕국은 전쟁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을 반영하여 포로에 대한 인도적 처우 및 고문 금지를 엄격히 규정했다.

그 탓에 군은 특별 작전을 수행할 때를 제외하곤 적군과 군 범죄 용의자를 함부로 고문할 수 없었다.

“우선…….”

답답한 마음에 한숨부터 흘린 레토는 취조실 내부를 보여 주는 반투명거울을 노려봤다.

“정체는 알아냈나?”

그곳엔 일주일 전, 성당에 들이닥쳐 해적이 나타났다고 소리쳤던 고기잡이꾼이 포박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날 구출된 선원들 전원 저 남자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붙잡아 가두라고 한 거야.”

처음부터 수상했다.

손가락 해적단이 나타난 곳은 성당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가 해적들에게서 무사히 빠져나온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 거리를 부상 입은 몸으로 헤엄쳤다는 게 의아했다.

게다가 해군 경비대나 경찰이 아니라, 오로지 어머님의 하해 같은 은혜뿐인 성당을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마침 그곳에서는 해군 부부가 결혼 중이었고.

“볼트리아 교장님과 오린 준장님이 창밖으로 저 남자가 작은 쪽배를 타고 온 걸 봤다고 했습니다.”

“쪽배?”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당시 피랍되었던 어선은 구명조끼는 구비되어 있었지만, 구명선을 탑재할 정도로 크진 않았다. 설치된 흔적도 없었다.

“해적의 잔당일 가능성은?”

“해적이 장시간의 심문을 저리 견딜 순 없습니다.”

“우리 군종실장의 심리 심문은 꽤 무섭지…….”

본부 내 어딘가에 갇혀 있는 플랜시 소장만 해도, 베네딕토 실장과 몇 번 만나더니 그 점잖던 사내가 반쯤 실성해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던가.

“타국 간첩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나라가 왜 이러지?”

레토가 혀를 크게 찼다.

막연히 넘기기엔 뒷맛이 찜찜했다.

앞서 일어났던 개인 함선 밀반출 미수 사건.

여기에 얽혔던 평기사 한 명은 수도 외곽에서 마약을 재배, 제조해서 제국으로 유통했다.

그리고 유통책으로 쓴 해적단을 신고한 건, 지금 저 취조실 안에 있는 신원불명의 남자였다.

“…국왕께 보고해야겠군.”

레토가 피곤한 숨을 내뱉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참관실 안으로 들어왔다.

“중장님.”

아이스 중령이 다급한 표정으로 레토를 찾았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레토의 안면 근육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테네브레’에서 요원이 왔습니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짜증을 억누른 레토가 물었다.

“왜 왔대?”

“해군에서 보호 중인 중요 참고인을 데려간다고 합니다.”

“이런……!”

베네딕토 실장이 거친 욕을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테네브레.

아들라보르 왕국의 비밀기관으로, 국왕 직속 첩보 부대를 가리키는 별명 중 하나였다.

오로지 아들라보르 국왕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을 혹자들은 ‘국왕의 개’라고 했다.

세간의 소문에 따르면, 아드벨로 공작 가문이 테네브레를 무척 혐오한다는 속설이 돌고 있었다.

이에 대해선 두 곳 다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긍정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테네브레에 대한 인식은 소문과 관계없이 원래부터 그리 좋진 않았다.

국왕의 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저지르는 그들의 잔악한 행보는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국왕의 개가 왔다더군.”

“무슨 일로 왔단 말입니까?”

“중장님이 지금 만나러 갔다네…….”

“설마 플랜시 소장을 데리러?”

테네브레 요원이 도착했단 소식은 본부 내에 빠르게 퍼졌다.

“…….”

그리고 노아는 이 소식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얼굴은? 생긴 건 봤어?”

“당연히 못 봤지.”

아미가 호텔 쿠키를 아작아작 씹으며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봐서 뭐 좋은 거라고.”

대의라는 명목으로 법을 짓밟고 무시하는 것들과는 상대를 말아야 한다며 아미가 날파리 쫓듯 손을 허공에 휙휙 흔들었다.

“그런데 네가 웬일로 그런 걸 궁금해하냐?”

평소라면 신경 끄고 일이나 하라고 부대 분위기를 먼저 챙겼을 저 표준 주파수 같은 녀석이 저리 관심이라니.

아미가 혹시, 하며 슬쩍 떠봤다.

“중장님이랑 싸웠어?”

“중위, 엎드려뻗쳐.”

“아니었나?”

5초 정도 엎드려 뻗쳤다가 일어난 아미가 손을 툭툭 털었다.

“어쨌건 오늘은 일진 한번 사납네.”

아미가 투덜거렸다.

“회의 늦어지니 일정도 덩달아 늦어지지, 아침에 또 그 미친 대위가 난리지…….”

“전에 너 매점에서 아침 사 먹는다고 뭐라 했다던?”

“어!”

마치 물어봐 주길 기다린 것처럼, 아미가 망할 대위를 마구 욕했다.

“하수구 구정물로 반죽한 밀가루로 구운 것처럼 생겨 놓고는, 아주 그냥 자기 잘난 것처럼 산다니까?”

“너도 참 어지간하다.”

나라에서 공짜로 주는 병영식을 먹으면 될 것이지, 구태여 매점에서 아침을 돈 주고 사 먹는 아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 병영식 맛있잖아.”

노아는 이해가 안 갔다.

해군 병영식은 원래 타 군대보다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군 내 최초로 식당 자체 감사를 실시, 납품업체들끼리 공개적으로 계약 경쟁을 시켜 우수한 곳과 거래한 덕이었다.

게다가 조리실에서는 늘 외부에서 데려온 영양사가 직접 식단을 구성한다.

덕분에 해군 조리병 보직은 타 군보다 힘들다고 소문이 났지만, 전역 후에 어지간한 식당과 호텔 주방장에서 모셔 갈 정도로 실력을 키운다고.

“하지만 나 아침에는 입맛이 없어서…….”

아미가 곤란하단 듯이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내가 좀 섬세하잖아.”

“구라구라 님. 쟤 좀 잡아가세요.”

입만 열면 거짓말입니다.

노아는 이제 테네브레고 그 망할 대위고 간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오늘의 일정이었다.

“준위님.”

노아가 피스트 준위를 불렀다.

“일단 저희 훈련부터 먼저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레토와 아이스 중령이 없는 지금, 특함 사령부에서 다음으로 계급이 높은 건 노아였다.

언제 올지 모를 두 사람을 계속 기다렸다간 하루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피스트 준위도 같은 생각이었다.

“테네브레가 갑자기 방문한 탓에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제가 이곳에서 중장님을 기다릴 테니, 먼저 가십시오.”

“그럼 부탁합니다.”

대원들은 훈련을 위해 수영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저건 뭐야?”

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대원들의 표정도 엇비슷했다.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수영 훈련이 진행되는 실내 수영장은 엄연한 군사 시설이었다.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곳인데 웬 남자가 어푸어푸 수영 중이었다.

“미쳤나, 진짜.”

아미는 기가 막혔다.

군 시설을 무슨 개인 수영장처럼 멋대로 사용하는 꼴이 아주 같잖았다.

게다가 물살을 가로지르는 자유형은 쓸데없이 힘만 들어가 겉보기만 근사하지, 효율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

“설마 테네브레?”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노아는 아무리 테네브레라고 해도 이렇게 멋대로 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은 국왕의 직속 부대다. 모시는 왕의 이름에 이런 식으로 엿 바르는 짓은 하지 않는다.

다들 너무 어이가 없어 상황 파악을 못 하던 중, 수영을 마친 남자가 물 밖으로 나왔다.

“어우우!”

메델라가 황급히 눈을 가렸다.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는 면적을 최소화한 삼각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적나라한 몰골에 몇몇이 구역질을 했다.

“…야.”

그때, 아미가 노아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저 새끼가 그 대위야.”

“너 꼽 줬다는 대위?”

“그래! 그 새끼가 저 새끼야!”

때마침 노아의 앞으로 대위가 떡하니 섰다.

“…아아.”

상대를 명백히 깔보는 목소리가 벌써 저 대위의 첫인상을 결정했다.

아미가 과장해서 욕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주 점잖게 투덜거렸던 것에 불과했다.

“오케아누스 중장과 결혼했단 그 여자 대위로군.”

대위는 훈련용 수영복 차림의 노아를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어봤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시선이 거의 범죄 수준이었다.

성실 납세자인 노아는 저런 놈이 세금을 받아먹고 산다고 생각하니 아까워 미칠 거 같았다.

“야, 야.”

아미가 노아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한 대만 패 줘.”

더도 말고 딱 저 꼴사나운 수영복을 때려!

그러면 못 본 척해 주는 건 물론이고 정당방위였다고 진술해 주겠다며 유혹했다. 셀린도 가세했다.

노아는 둘을 무시하며 상대를 마주했다.

“이곳은 지금부터 특함이 훈련을 위해 사용할 겁니다.”

그러니 꺼지라고 돌려 말했다.

“융통성 없네.”

하지만 대위는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비아냥거리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우웩!”

그때 누군가가 진짜로 헛구역질을 했다. 대원들이 비위 약한 동료를 다독이며 조금만 참으라고 위로했다.

“…본부에 처음 방문하신 겁니까?”

“뭐?”

“실내 수영장은 엄연한 군사 시설입니다. 이렇게 사적으로 쓰면 안 된다는 소리입니다.”

“…….”

“그리고 특함의 훈련은 기밀 사항입니다. 공동 훈련 일정이 잡히지 않는 이상은 함부로 노출해선 안 됩니다.”

“아, 거참 깐깐하게 구네.”

남자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며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논리로 반박할 수 없으니 괜한 위협만 할 뿐이었다.

“너희가 전세 낸 것도 아니잖아.”

“전세 냈습니다.”

“…….”

“방금 말했잖습니까. 특함의 훈련은 기밀이라 노출 금지라고.”

노아는 슬슬 뒷목이 뻐근해졌다.

레토와 연애하면서 꾸준하게 키웠다고 생각한 인내심이 벌써 한계에 다다르려고 했다.

“…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대위가 겁을 주듯 음산히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군지는 모르지만, 알 거는 같습니다.”

노아가 피식거렸다.

“너 내가 누군지 아냐고 물어보는 놈치곤, 썩 대단한 놈은 없던데.”

바로 눈앞에 그 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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