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245)

50.

저녁 식사는 당연히 살얼음판이었다.

지은 죄도 없건만, 노아와 레토, 클라레 세 사람은 아스의 눈치를 살피며 묵묵히 식사만 했다.

그 와중에 토마토소스를 끼얹어 오븐에 구운 까넬로니는 정말 맛있었다. 삶은 시금치 등을 치즈에 버무려 만든 소가 일품이었다.

“저기, 아스.”

식사가 끝난 뒤, 노아가 아스에게 물었다.

“엄마랑 아빠한테 오빠가 집에 왔다는 거…….”

“알려야죠.”

아스가 다 먹은 그릇들을 치우며 말했다. 그릇이 부딪치며 내는 달그락 소리가 오늘따라 유달리 날카로웠다.

“그리고 작은 부군.”

“예.”

레토는 오랜만에 생도 1학년이 된 마음으로 대답했다.

“이제 가족이 되셨으니까, 설거지 좀 도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집안의 규칙도 알려 드릴게요.”

그 사이, 노아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내가 할래!”

“기다려 봐. 엄마가 받으면 바꿔 줄게.”

통화가 연결된 걸 확인한 노아가 클라레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여보세요, 엄마?”

클라레는 오빠가 집에 온 걸 냉큼 고자질했다.

“오빠가 욕조에 숨어 있었던 거야. 내가 깜짝 놀라서 비명 질렀거든? 그랬더니 창문으로 도망쳤어!”

한참을 재잘거린 뒤에야 클라레는 노아에게 전화기를 건네줬다.

노아는 클라레가 놓친 보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줬다.

[아스는 어쩌고 있어?]

수화기 너머로 제니 벨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역시 화가 났지.”

[어휴, 내가 진짜 그놈 한번 잡히면…….]

“그래도 오빠가 여길 먼저 온 걸 보면, 아스가 보고 싶긴 했나 봐.”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티 걘 진짜 좀 애가 이상한 거 같아.]

“보통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뒤에는 칭찬이 와야 되는 거 아냐?”

[칭찬할 거리가 있어야 하지. 아, 그리고 오늘 아침에 할머니한테 연락이 왔어.]

곧 샤프 영지로 도착하실 거래.

나중에 할머니 오거든 가족들끼리 식사나 하자며, 그때까지 식사 잘 챙기고 잘들 지내라는 안부 인사를 끝으로 두 사람은 통화를 마쳤다.

“엄마가 뭐래?”

옆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클라레가 노아의 다리에 몸을 비비적대며 물었다.

“하아…….”

노아는 한 것도 없는데 피곤했다.

집에 파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

“다 씻은 그릇은 여기에 놓아서 물을 뺀 뒤에, 마른 헝겊으로 살살 닦아서 찬장 위에 넣으면 돼요.”

아스는 레토에게 집안일에 대한 규칙을 하나하나 알려 줬다.

“접시마다 자기 구역이 따로 있어요. 그걸 꼭 지켜 주세요.”

“그럼 이 큰 접시는 저기 유리 찬장이군요.”

“맞아요. 그리고 세탁물은 세탁실 안에 색깔 별로 넣어 주시고, 수건은 따로 모아 주세요. 속옷은 어떻게 할까요?”

“제가 직접 빨겠습니다. 사관생도 때도 그랬거든요.”

“그다음은 쓰레기 분리수거인데…….”

레토는 실로 오랜만에 생도 된 마음으로 아스의 명령을 머릿속에 기억해 뒀다.

‘집안일을 좋아하시는구나.’

집안일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 주는 아스는 아까보다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집에서 해내는 가사 전반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충분히 가져도 될 일이야.’

집안일이란 결국 생존과 관련된 것이니, 아스는 자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거였다.

“처음엔…….”

청소 도구함에 뭐가 있는지 살피던 레토가 고개를 들었다.

한참을 뜸 들이던 아스가 이내 결심한 듯 솔직하게 말했다.

“노아도 저처럼 남자 복 참 더럽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처형…….”

손에 쥐고 있던 쓰레받기를 슬쩍 놓은 레토가 놀란 눈으로 아스를 바라봤다.

그가 알기로, 아스가 노아의 이름을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스가 처음으로 노아의 결혼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하려 했다.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

레토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자신들의 연애는 몇 번을 생각해도,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저의 잘못이었다.

“언제나 노아에게 미안할 뿐이죠.”

“그래도 제부는 노력했잖아요.”

잘못했단 점은 부정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스는 레토의 노력을 인정했다.

“…아까, 제 이야기 들었죠?”

아스가 물었다.

모르는 척해야 할지 잠깐 고민한 레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까진 못 들었습니다.”

“자세할 것까지도 없어요. 들은 그대로니까.”

아스는 본인의 입으로 직접 사정을 들려줬다.

“도련님하고 사귀는 사이였어요. 그리고 차였죠.”

“집안에서 반대하는 직종에 취직했다던데…….”

“솔직히 차인 건 괜찮아요.”

엄연히 따지면 아스는 벨로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무슨 직업을 가졌든 상관없었고, 만약 저에게 질렸거나 애정이 식어서 헤어지자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인 이유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절 위해서란 핑계를 댔어요.”

집안에서 반대하는 직업을 가진 것도 널 위해서였고, 그러니 우리가 잠시 헤어져야 하는 것도 널 위해서라고.

되지도 않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한 망할 도련님은 이후로 연락 한 통 없었다.

“후우…….”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분노를 황소처럼 길게 내뱉은 아스가 두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이 나온 김에 창고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수더분한 검은색 앞머리가 사라졌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한결 단정해졌다.

“큰 주인님이 도련님 오시면 쓰라고 선물한 짐승용 마취제가 있거든요. 미리 총탄에 발라 놔야겠어요.”

명중만 하면 즉사라는 섬뜩한 혼잣말을 남기며, 아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

홀로 남은 레토는 생각했다.

과연 제 권한으로 살인 사건을 어디까지 은폐할 수 있을지.

***

그날 밤.

노아의 방에서 자기로 한 레토는 베개를 들고 방문했다.

“처형은 정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침대에 누운 레토는 노아가 누울 옆자리를 손수 정리했다.

주름진 곳 하나 없게끔 꼼꼼하게 펼치고, 베개도 톡톡 두드리며 폭신폭신하게 만들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안 죽일 거야.”

제 잠자리를 정리하는 남편을 거울로 지켜보던 노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진짜 죽일 마음이었으면 벌써 죽였지.”

못 죽이는 게 아니라 안 죽이는 건가.

부정 부사의 기묘한 차이를 느끼며, 레토는 침대 정리를 마무리했다. 이제 노아만 오면 완벽한 밤이 될 예정이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기 위해 노아가 팔을 들어 올리니, 품이 넉넉한 하얀색 슈미즈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바라보는 레토의 붉은 눈동자도 흔들거렸다.

“뭘 그렇게 봐.”

잘 준비를 마친 노아가 드디어 뒤를 돌아봤다.

“등에 구멍 뚫리는 줄 알았어.”

“어디 한번 볼까?”

침대에 누우려는 노아의 팔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제 품에 쓰러트린 레토는 손으로 등을 더듬거렸다. 노아가 간지럽다며 키득거렸다.

“…근데.”

그렇게 알콩달콩 서로를 보듬기를 잠깐.

“조금 반성했어.”

“뭐가?”

레토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 대며 살짝 졸았던 노아가 고갤 들었다.

레토는 졸음이 묻은 노아의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쓸었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이 정말 이기적이구나.”

아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레토는 동정심보다 자기 비관에 먼저 사로잡혔다.

왜냐하면 저도 노아에게 그것과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상처를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 너도 그랬지.”

이제는 상관없어진 진급 탈락을 떠올린 노아가 레토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그러면 안 돼.”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배려다.

정작 그 의견에 누군가의 입장은 절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성했어. 다신 안 그럴게.”

“매일 달라지네.”

멋져라.

노아가 상으로 이마에 뽀뽀를 해 줬다.

내심 입술에 해 주기를 기대했던 레토가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던 노아는 웃음이 절로 났다.

***

이왕 집에 온 거, 신혼부부는 결혼사진을 찍기로 했다.

성당에서 입었던 예복과 드레스로 갈아입은 둘은 정원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여기 보세요! 여기!”

“잘 찍힐 거 같나요, 처제?”

“사람이 별로라 못나게 찍을 거 같아요.”

장난감 사진기로 까불거리던 클라레는 사진이 예쁘게 찍혀야 한단 이유로 촬영장에 난입했다.

“나도 같이 찍을래!”

“아가씨가 들어가니까 사진이 확 살아나네요.”

“역시 사람이 예뻐야 잘 찍히는 거야.”

클라레는 온갖 자세로 멋진 분위기를 연출했다.

레토는 웃음이 터지는 걸 참다가 배가 아파 잠시 끙끙거려야 했다.

촬영을 마친 뒤엔 넷이서 함께 여름맞이 대청소를 했다.

“어제 커다란 벌레가 들어왔으니, 청소 한번 크게 해야죠.”

“오빠는 분명 아스한테 잡히면 사지가 뜯길 거야.”

난 알 수 있어.

클라레는 제 오빠의 처참한 미래를 예언했다.

“난 반드시 이 집의 언어 교육을 뒤바꿔 놓을 거야.”

레토는 보호자로서의 의무감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평온한 하루가 흘러갔고, 어느새 신혼부부의 결혼 휴가도 끝나 갔다.

그때까지 오빠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다시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그리고 아주 의외의 인물이 오빠와 마주하게 되었다.

***

“어서 오십시오!”

“신혼여행 잘 보내셨습니까?”

“선물! 선물 사 오셨습니까?”

특함 대원들이 일주일 만에 출근한 신혼부부를 열렬히 반겼다.

“선물 사 왔다.”

노아는 호텔에서 사 온 고급 쿠키 상자를 꺼냈다.

“나중에 회의할 때 하나씩 들까?”

“대위님 사랑합니다!”

“방금 사랑한다고 말한 다진 미끼가 누구지?”

“악, 중장님, 아악! 존경의 의미로, 아아아!”

오늘도 특함은 평화로웠다.

“중장님, 오셨습니까?”

피스트 준위가 조금 전에 도착한 전보를 레토에게 건넸다. 전보 내용을 확인한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나갔다 오마.”

“중장님, 회의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노아가 물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은 특함 대원들의 정례 회의가 있었다.

“회의 전에는 오도록 하지.”

피스트 준위와 함께 사령부실을 나온 레토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일주일 동안 아무 말이 없다고?”

“군종실장님은 이런 쪽의 훈련을 받은 것 같다고 보고서에 의견 진술을 적으셨습니다.”

“요즘 나라가 참 뒤숭숭하군.”

둘은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은 복도를 계속 지나갔다.

거미줄이 간간이 쳐진 등불 중 몇 개는 간헐적으로 깜빡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어느 문 앞에서 멈췄다.

피스트 준위가 문을 여는 사이, 레토는 주머니에서 꺼낸 검은색 가죽 장갑을 손에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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