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
아침 일찍 일어난 클라레는 도통 기운이 없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체온 때문에, 클라레의 얼굴은 자면서 흘린 땀에 금발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것들을 손으로 대충 정리한 아이는 맞은 편에 있는 언니 방으로 갔다.
문고리를 슬쩍 돌려 안으로 들어가니,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가득한 방이 나타났다.
하지만 언니는 없었다.
“언니…….”
풀이 확 죽은 클라레는 퍼뜩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있는 형부 방이 떠올랐다.
원래는 오빠 방이지만, 며칠 전에 언니랑 결혼하면서 새 가족이 된 형부가 그 방을 썼다.
방 청소도 자신이 야무지게 도와줬었다. 그래서 형부가 고맙다고 발레나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 줬었다.
“형부! 형부!”
하지만 1층 방에도 형부는 없었다.
“어머, 일어나셨어요?”
소리를 듣고 나온 아스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다가갔다.
“오늘은 학교도 안 가는 날인데, 참 부지런하시다니까.”
“아스…….”
“배고프세요? 조금만 기다리면 아침 식사가…….”
금방 될 거라고 말하려던 아스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죽상이 된 클라레가 턱에 앙증맞은 호두 무늬를 만들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크고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더니, 이내 살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아앙!”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이이! 언니 보고 싶어어어!”
***
샤프 영지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최상층 고급 스위트 룸.
이곳은 국내 고위급 관계자들이나 귀족들이 묵고 갈 만큼 실내장식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특히 남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욕실과 침실은 아주 유명했다.
하지만 현재 그 방은 나흘째 문이 잠긴 상태였다. 그리고 내부는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엉망이었다.
거실 소파는 누가 발로 찬 것처럼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고, 넓은 창을 가리는 커튼 천은 살짝 찢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커튼을 단 지지봉이 떨어져 있었다.
호텔이 자랑하는 욕실은 수건과 옷가지로 엉망이었고, 식당은 말하기도 민망했다.
그렇게 엉망이 된 내부를 쭉 따라 들어가면 마지막으로 나오는 곳이 침실이었다.
침실에는 커다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 이불 사이로 다리 4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가장 왼쪽에 뼈대가 아주 두꺼운 다리가 있었다. 다리만 봐도 저 몸의 주인이 얼마나 큰 체구인지 짐작케 했다.
큰 다리 바로 옆에는 상대적으로 가늘고 마른 다리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다리가 너무 거대해서 그리 보일 뿐, 가는 다리의 종아리는 조밀하고 탄탄한 근육이 잡혀 있었다.
그렇게 큰 다리와 작은 다리, 다시 큰 다리와 작은 다리가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다리를 따라 위로 올라가면,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잠든 신혼부부가 있었다.
뭐가 그리 피곤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서로를 꼭 껴안은 채로 고운 숨소리만 새근새근 내쉴 뿐이었다.
따르릉.
“…….”
곤히 잠들었던 노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따르릉.
“응…….”
노아가 끝내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모처럼 안 시달리고 푹 자고 있었기에 예고 없는 방해가 불쾌했다.
결국 전화벨이 울리는 쪽으로 노아가 손을 뻗으려던 차.
“…내가 받을게.”
어느새 몸을 일으킨 레토가 노아의 손을 다시 이불 속에 넣어줬다.
자세를 고쳐 주고 이불까지 꼼꼼히 덮은 뒤, 이마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노아는 거짓말처럼 평온해진 얼굴로 다시 잠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레토는 소리 없는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새집이 된 은발을 손으로 대충 빗어 넘겼다.
두툼한 근육으로 탄탄하게 채워진 몸은 어둠 속에서도 제 위용을 자랑했다.
레토가 전화기 쪽으로 상체를 살짝 돌려 숙이니, 잘록 들어간 허리선을 따라 이불이 스르륵 내려갔다.
그리고 장골 아래에서 딱 멈췄다.
“뭡니까…….”
잠에 취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신경질적이었다.
당연했다. 레토 역시 신혼의 열띤 순간을 즐기고 만족스럽게 자고 있었던 중이었다. 전화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쉬는 중에 죄송합니다. 벨로 저택에서 온 전화입니다.]
호텔리어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벨로?”
레토의 잠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바꿔 드릴까요?]
“예, 바꿔 주십시오.”
곧 전화기 너머로 철컥, 소리가 나더니 전화 교환음이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애애앵!]
이제 레토는 잠이 싹 사라졌다.
“처제? 처제 왜 그래? 울어?”
“누가 운다고?”
그 말에 노아가 벌떡 일어났다. 이불로 후다닥 상체를 가린 노아가 무슨 일이냐며 레토를 다그쳤다.
[언니! 으어엉! 어니이잉!]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언제 와아아! 보고 싶어어어!]
언니와 형부의 신혼여행 나흘 차.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직 이틀이 남았지만, 어린 처제에겐 너무 긴 시간이었다.
***
“언니!”
아스와 함께 호텔까지 찾아온 클라레는 노아를 보자마자 품에 달려 안겼다.
“세상에, 눈 봐.”
노아는 클라레의 팅팅 부은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쓸었다.
얼마나 울었으면 아직도 눈가가 빨갛게 짓무른 채였다.
“이틀 뒤면 집에 가는데, 그걸 못 참았어?”
“응…….”
클라레가 노아의 가슴팍에 얼굴을 숨긴 채로 끄덕거렸다.
“언니가 사관학교 다닐 때는 잘 참았잖아.”
“아니야. 그때도 언니 없어서 섭섭했어.”
꽤나 어릴 적 일인데도 클라레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으휴, 요 울보.”
그 말에 더 가슴이 찡해진 노아가 동생을 꼬옥 끌어안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스가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어제까지는 잘 참았는데, 역시 두 분이 없으니 외로웠나 봐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두 분의 방부터 찾았다니까요?”
“아스! 그건 비밀로 하자고 했잖아!”
창피해진 클라레가 괜히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보고 싶었어?”
노아가 클라레의 볼에 입술을 쪽쪽 맞추며 물었다. 클라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토가 슬쩍 물었다.
“처제, 나도 보고 싶었어요?”
“응.”
클라레가 대답했다.
“이제 형부도 가족이니까, 보고 싶었어.”
“아, 울 거 같아…….”
감동한 레토는 커다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주책도 저런 주책이 없지, 라고 아스는 커다란 돌 보듯 그를 바라봤다.
“혹시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침은 먹고 왔어요.”
“엄청 맛있는 빵이랑 수프 먹고 왔어요! 샐러드도!”
“넌 울었다면서 먹기는 또 엄청 먹었나 보네.”
노아가 클라레의 둥그런 배를 콕콕 찔렀다. 냉큼 두 팔로 배를 감춘 클라레가 눈을 샐쭉거렸다.
“먹어야 힘이 나는 거야. 할머니가 다른 건 몰라도 식사는 절대 거르지 말랬어. 음식은 소중한 거야.”
“옳으신 말씀.”
레토가 동의했다.
네 사람은 호텔 앞에 있는 해변을 산책했다. 이른 오전인데도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형부! 내가 엄청나게 큰 모래성을 만들어 볼까나?”
“얼마나 크게 만들 수 있나요?”
“일단 크게 만들려면 기초 공사가 중요해요.”
클라레는 근처에 누가 잊어버리고 두고 간 듯한 노란색 양동이에 바닷물을 담아 왔다. 물론 직접 물을 뜬 건 레토였다.
모래에 물을 붓고 조물거리며 성을 쌓을 반죽이 완성되었다.
“할머니가 그랬는데, 건물이고 사람이고 기본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레토가 클라레와 놀아 주는 동안, 노아와 아스는 양산 하나를 펼친 채 계단식 제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부모님은 잘 돌아가셨지?”
노아가 아스에게 물었다.
“본 피로연 때 손님들 잘 대응해 주시고 가셨어요.”
“나중에 연락드려야겠네.”
“아직 연락 안 하셨어요?”
“좀 바빠서.”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께 전화는 드려야죠.”
참 잘하는 짓이라고 비꼬던 아스가 뭔가를 퍼뜩 떠올렸는지 가방을 뒤적거렸다.
“두 분이 호텔 가셨던 다음 날에 온 건데…….”
아스가 가방에서 꺼낸 건 편지 한 통이었다.
“…….”
발신인을 확인한 노아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편지는 파란색 촛농으로 봉해져 있었다. 촛농 위에 섬세하게 눌린 파도 모양과 커다란 성벽과 방패.
“오케아누스.”
오케아누스 후작가에서 보낸 편지였다.
노아는 어이가 없었다.
“난 그래도 전화 한 통 정도는 올 줄 알았어.”
청첩장을 아슬아슬하게 보내긴 했어도 수도까지 도착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만약 미리 잡혔던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면 전화라도 해서 알려 줬어야 했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까지, 그들은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 고작 편지?’
노아가 더욱 화가 난 건, 이 편지에는 우표와 우편 송달 도장이 찍혀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건 우체국을 통해 배달된 게 아니라, 사람이 직접 우체통에 넣었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수신인은 노아 벨로로 적혀 있었다.
“아니꼽네.”
사정을 잘 모르니 함부로 말하긴 싫었다. 그런데도 노아는 오케아누스 가문의 행동이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나중에 집에 가서 볼게.”
아스는 편지를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언니! 아스!”
때마침 클라레가 둘을 향해 모래 묻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이것 봐! 나랑 형부가 만들었어!”
물 먹어 색이 짙은 모래가 제법 근사한 형태의 성으로 빚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모양새가 썩 그럴싸했다.
“근사한데?”
일어서던 노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하여튼 정도를 모르는 새끼…….”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걸어가는 노아를, 아스가 썩은 눈으로 바라봤다.
***
벨로 저택 앞에 웬 남자가 있었다.
정확히 가르마를 반으로 나눈 갈색 더벅머리 속에서 초록색 눈매는 선한 인상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마냥 평범치 않았다.
별 뜻 없이 내딛는 발걸음이나 무의미한 손짓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은 상위 포식자에게 찾아볼 수 있는 나태함과 비슷했다.
“아무도 없나?”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자, 남자는 그냥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우선 부엌부터 살펴보았다. 깨끗하면서도 안락한 분위기의 부엌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아스!”
하지만 부엌의 주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남자는 복도에 걸린 탁상형 달력을 보고 나서야 오늘이 휴일인 걸 알았다.
“그럼 다들 외출했나?”
그렇게 생각하고 넘긴 남자는 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남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방을 치워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