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소형 마동력차에서 내린 클라레는 오늘을 위해 준비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었다.
꽃봉오리처럼 모아 묶은 금발은 초록색 리본으로 장식했다.
초여름을 가져다주는 요정이 떠오르는 귀여운 차림에 사람들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힝…….”
그러나 꼬마 요정은 심기가 영 불편한 얼굴이었다.
“아미 언니의 깜찍이는 너무 불편해.”
클라레가 답답했던 몸을 쭉쭉 기지개 켜며 투덜거렸다.
“야, 너 편하라고 산 차가 아니거든?”
내 깜찍이가 듣고 상처 입는다면서, 아미가 제 자동차 지붕을 끌어안고 우쭈쭈 아기 어르는 소리를 냈다.
클라레는 그런 아미를 이해 못 할 시선으로 바라봤다.
“우리 깜찍이, 저런 말 듣지 마. 넌 나의 사랑스러운 붕붕이란다? 언니랑 끝까지 함께하자!”
“돈만 생기면 당장 중고로 팔 거라더니…….”
뒤따라 내린 셀린이 차 문을 잡고 안쪽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혼자 나올 수 있겠어?”
“작은 주인님, 머리 조심하세요!”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은 아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살짝 떨어진 곳에서 클라레와 아미가 손을 잡고 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미 언니.”
“응?”
“결혼은 참 하기 어려운 거 같아.”
“내 말이. 난 저렇게는 안 하고 싶네.”
“결혼할 남자는 있고?”
“혹시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아스가 클라레의 옆구리를 살살 찌르며 간지럽히던 찰나였다.
“아미!”
도와달란 셀린의 요청에 아미와 클라레가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나!”
“아름다우셔라.”
“오늘 결혼하는 신부님이신가 봐.”
“엄마, 저기 공주님이야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곳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노아가 있었다.
“언니 너무 예쁘다……!”
클라레가 오두방정을 떨며 소리쳤다.
“진짜 공주님 같아! 아니, 왕비님! 엄청난 귀족 아가씨!”
“클라레도 엄청 예뻐.”
노아의 칭찬에 클라레가 빵긋 웃었다.
사람들의 호의적인 시선이 살짝 부끄러웠던 노아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성당 본관 건물 중 화단 근처에 창문이 반쯤 열린 곳이었다.
“…….”
거기엔 열렬한 눈빛을 번뜩이는 신랑이 있었다.
노아와 시선이 마주친 레토는 눈을 피했다.
“언니.”
절 부르는 클라레의 목소리에 노아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언니도 결혼해서 기쁜 거야?”
“응?”
“언니, 엄청 기쁘게 웃고 있어.”
이렇게 말이야.
클라레가 제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광대까지 올리며 말했다.
“…봤어?”
“다른 사람들도 다 봤어.”
“…….”
“그치? 다 봤지?”
클라레가 물으니, 노아의 이동을 돕던 아스와 아미, 셀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분명 부탁드렸죠?”
아스가 피곤에 겨운 한숨과 함께 몇 번째인지 모를 당부를 또 반복했다.
“제발 좀 자중하세요.”
“웃지도 못해?”
“그렇게 교육적으로 안 좋은 웃음은 짓지 마시라고요.”
“잉? 언니 예쁘게 웃었는데?”
“웃는 것까진 봐주겠습니다.”
“이 언니는 돈만큼이나 권력도 좋아하네.”
셀린은 가장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아스의 유연성을 존경했다.
***
“노아가 신부 대기실에 들어갔대요.”
“아까 가서 봤어요? 너무 예쁘더라고요!”
“원래도 예뻤지만, 어휴, 정말 결혼시키기 싫으네.”
“신랑 되시는 분도 인물 훤칠했잖아요.”
“거기다 상대가 오케아누스 중장님이라면서요!”
“해군의 영웅들이 결혼하네요.”
신부 대기실에 방문한 여성 하객들은 너도나도 노아의 신부 차림을 칭찬했다.
신랑과 잘 어울린다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결혼에 대한 하객들의 축언은 끊이질 않았다.
“야, 지금 가서 보면 안 돼!”
그리고 신랑 대기실의 소란도 끊이질 않았다.
차를 타고 도착한 노아를 창문 너머로 발견한 레토는 그때부터 안절부절못했다.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신부 대기실에 가겠다고 난리를 부렸다.
“내 신부잖아. 가서 좀 봐도 되는 거잖아.”
검은색 예복에 보타이를 맨 레토는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근사한 신랑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살짝 돌아 버린 걸 빼면.
“신랑이 식전에 신부를 보면 부정 탄다잖아!”
그런 친구를 어떻게든 붙잡고 저지하는 락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들러리였다.
“우리 중장님이 의외로 열렬하시군.”
이 모든 것을 남 일처럼 관전하던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허허 웃었다.
“이미 창문 너머로 봤어.”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창문만 보더라.”
“부정 타는 것쯤이야, 해군이라서 다 쏴 버리면 돼.”
“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지? 그냥 막 뱉는 거지?”
겨우 레토를 진정시킨 락소는 진땀을 빼며 주저앉았다.
“네놈 결혼 도와주다가 내가 지쳐 쓰러지겠어…….”
“피로연 때 너희 가게 술 주문했던 거 떠올려 봐.”
“친구를 위해 쓰러지는 게 우정 아니겠어.”
다시금 락소가 기운을 차릴 즈음이었다.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열린 문 너머로 나타난 건 성당 추기경이었다.
젊은 연인을 위해 기꺼이 성당을 빌려준 그의 주름진 얼굴엔 인자함이 가득했다.
“실장님. 곧 식이 시작됩니다.”
그 말에 겨우 진정시켜 자리에 앉혔던 레토가 벌떡 일어났다.
“허허, 신랑님께서 기운이 넘치십니다.”
“중장님, 그 힘은 나중에 입장하실 때를 위해 아껴 두십시오.”
“나한테는 지금 여기가 영창보다 더해.”
레토가 잘게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가 본 적도 없으면서 비유는 잘도 하십니다.”
“보내 본 적은 많아서 대충 알아.”
“그건 자랑이 아닙니다.”
베네딕토 실장이 추기경과 함께 먼저 떠났다.
“야.”
뒤따라 나가던 락소가 까먹었던 것을 떠올렸다.
“결혼 축하한다.”
예상치 못한 축하에 얼떨떨해진 레토가 이내 피식거렸다.
“고맙다.”
“이혼하거든 내가 술친구 해 줄게.”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결혼식을 위해, 레토는 주머니에 넣어 둔 흰 장갑을 손에 꼈다.
***
식의 시작은 주례의 인사였다.
주례를 맡은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단상 앞에 서자, 신랑의 들러리인 락소가 입장했다.
그다음은 화동들의 꽃 뿌리기였다.
예쁘게 꾸민 다섯 화동을 향한 어른들의 얼굴엔 푸근한 미소가 그려졌다.
“자, 얘들아!”
클라레가 씩씩하게 말했다.
“샤프 영지를 수호하는 비밀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비밀 조직이라기엔 클라레의 목소리가 너무 우렁찼다.
“오늘 우리의 임무는 언니와 형부의 결혼을 무사히 끝내도록 하는 거다! 두 사람의 미래를 축복해 주는 거야!”
클라레가 손등을 위로 한 채로 내미니, 그 위로 척척 4개의 손이 쌓였다.
“…근데 축복하면 뭐가 좋아?”
안경을 쓴 보르가 물었다.
“이혼을 안 해.”
클라레가 대답했다.
그러자 리리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치만 센샤네 고모는 축복받은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는데 다 이혼했잖아.”
“너희 아빠도 이혼 소송 중이지 않아?”
“응. 얼마 전에도 몰래 기어들어 왔다가 엄마한테 들켜서 생매장당할 뻔했어.”
“역시 결혼은 살아 봐야 아는 거야.”
센샤가 제 고모를 보고 배운 것을 짧게 가르쳤다.
“…이혼할 땐, 재산 분할이 중요하댔어.”
얌전한 세레니의 한 마디에 조직원들이 오오, 하며 깨달음의 감탄을 내질렀다.
그러곤 갑자기 뭉쳐서는 뭔가를 속닥거렸다.
“…조직원들!”
짧은 회동을 마친 뒤, 클라레가 다시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우리의 임무는 두 사람이 훗날 이혼할 때 아련하게 떠오를 오늘 결혼식을 아름답게 축복하는 것이다!”
“것이다!”
“것이다!”
비장한 각오와 함께 아이들의 꽃을 뿌리며 입장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아이가 뿌리는 꽃잎은 신의 앞에서 성혼을 맹세할 단상까지 가는 기나긴 길에 뿌려졌다.
해맑은 아이들의 순수함이 더해지니, 이 결혼식장을 행진할 연인의 미래는 이미 축복으로 만연해지는 기분이었다.
“큭큭……!”
“아이고 어머님……!”
그러나 장내 참석한 하객들은 조금 전 조직원들의 엉뚱한 대화 때문에 웃음을 참느라 애먹고 있었다.
화동들이 행진할 때 파이프오르간으로 배경음을 연주하던 수녀님도 필사적이었다.
중간중간 음이 떨리긴 했지만, 그걸 책잡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오히려 쾌활한 박자감과 절묘하게 어울려졌다.
임무를 마친 화동들이 뿌듯한 얼굴로 퇴장했다.
“그럼 이제.”
베네딕토 실장의 시선을 따라, 하객들의 시선도 입구 쪽을 향했다.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가 바뀌었다.
조금 더 차분하고 진중해진 곡조로 채워진 성스러운 식장 안으로, 레토가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검은 예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건장한 미남자의 자태에 여기저기서 숨이 사르르 녹는 듯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더구나 식장 뒤쪽에 앉은 사람들은 나아가는 신랑의 뒷모습에 넋을 잃었다.
넓은 등과 상대적으로 얇아 보이는 허리, 그 아래로 쭉 뻗은 탄탄한 하체는 감히 고대의 신을 조각한 듯한 예술 작품과 비견될 정도였다.
“어머……!”
특히 리벨리 아이스가 눈을 떼질 못했다.
그녀는 얼마 전 다섯 번째 이혼하고 돌아온 센샤의 고모이자 아이스 중령의 여동생이었다.
“오빠도 진짜 너무하다. 나한테 한 번은 소개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었어?”
“중장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널 소개해.”
다 큰 남매가 나이와 장소를 잊고 투닥거리는 동안.
“센샤, 봤지? 너도 나중에 저런 남자를 데려와야 한다?”
“근데 군인이잖아.”
“저런 남자는 군인이어도 용서가 돼!”
“응! 알았어요!”
그의 부인과 딸은 모종의 약속을 했다.
단상 앞에 도착한 레토가 베네딕토 실장과 가볍게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구 쪽으로 몸을 틀기 무섭게.
“……!”
새하얀 장갑을 낀 그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숨을 거칠게 들이켠 커다란 등이 눈에 띄게 요동쳤다.
저 멀리서, 그의 주인이 그의 심장을 어지러이 흔들었다.
“내빈 여러분들.”
베네딕토 군종실장은 그런 레토를 못 본 척한 채, 아니, 오히려 그의 심정을 기특하게 여기며 인자한 미소를 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의 주인공을 맞이하여 주십시오.”
우르르 일어난 하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가 새롭게 변했다.
조금 더 나긋하고 부드러운 곡조는 긴장했을 신부를 배려하는 수녀님의 마음이었다.
먼저 입장한 건 신부 들러리인 아미였다.
노란빛이 살짝 들어간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미가 레토와 눈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드디어 신부가 입장할 차례였다.
레토는 제게 향하는 신부를 맞이하고자 떨리는 다리를 힘겹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