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시카 리우스.
그는 악명 높은 ‘손가락’ 해적단의 선장이었다.
동굴 입구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닷바람에 드문드문 놓은 촛불들이 또 한 번 요동쳤다.
그 찰나에 몸집을 키운 기묘한 발광이 시카 선장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거친 풍랑으로 거칠어진 얼굴은 까무잡잡했다. 햇빛에 그슨 탓보다는 제대로 씻지 않아 때가 그득한 탓이었다.
머리는 바닷물에 하도 노출되어 색이 빠져 있고, 귀족 여인들이 머리에 바른다는 진주 가루처럼 하얀 비듬과 이가 선명히 보였다.
걸쳐 입은 옷 역시 빨지 않아 누렇게 바랜 채였다.
하지만 아주 비싸 보였다.
“미친개의 결혼 상대가 누군데?”
“또 다른 미친개가 있잖습니까.”
“그 둘이 결혼한다고?”
부하의 전달에 입꼬리를 히죽 올리자 숨겨졌던 선장의 치아가 드러났다.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은 치아 사이로 역한 숨결이 올라왔다.
“그것참 아쉽네.”
시카 선장이 혀를 짧게 찼다.
“암컷은 꽤 반반하게 생겨서, 언젠가는 내 밑에 쓰러트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간특하게 웃어 젖히던 선장의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날카로이 서리기 시작했다.
분에 겨워 꽉 쥔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자세히 보면 그의 손가락은 총 4개였다.
“…생각해 보니, 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악명 높은 미친개 둘이 결혼한다면,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특함 대원들 대부분이 자리를 비울 거다.
마침 수도 외곽에서 마약을 재배하던 거래처가 들통나 잡혀 가면서 수입원이 끊긴 탓에 곤란하던 참이었다.
“이번 기회에 크게 한탕 벌자!”
선장의 포효에 선원들이 우렁찬 포효를 질러 댔다.
***
6월 5일.
결혼식 당일 새벽은 아직 바람이 찼다. 채 시작되지 않은 일출의 어스름한 빛이 어두운 밤을 가까스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
그만큼 이른 새벽이었고, 노아는 자는 중이었다.
“중장님이랑 홀딱 벗고 뒹구는 걸 볼 줄 알았는데…….”
“작은 부군은 어제 친구분 댁에 가셨어요.”
“그 인간한테 친구가 있어요? 놀랄 노 자네.”
“너도 친구가 있는데, 그게 뭐 놀랄 일이야.”
“셀린, 너 주둥아리 터는 게 참 고상해졌다?”
“뭘 또 그리 칭찬해.”
“칭찬 아니거든?”
그때, 노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 올렸다.
시끄러운 대화를 피하려는 듯이 몸도 옆으로 굴렸다.
그러나 대화가 멈추긴커녕.
“일어나!”
시끄러운 목소리들은 가차 없이 노아를 흔들어 깨웠다.
화들짝 놀란 노아가 몸을 펄떡이며 일어났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잠은 다 깼지만, 아직 이성이 제대로 들어서지 않은 푸른 눈동자가 제 앞에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텅 비었던 푸른 눈동자에 이지가 찾아들며 점점 짙어졌다.
동시에 노아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너희가 여기 왜 있어?”
노아는 제 앞에 있는 아미와 셀린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잠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곧 유부녀 되는 미혼 친구를 위해서 왔지.”
“꼭두새벽부터 왔으니 고마워해.”
하나도 안 고마웠던 노아는 아스를 노려봤다.
“아직 아가씨 주무시니까 목소리는 낮추세요.”
아스가 손가락을 제 입술에 얹으며 주의를 줬다.
“두 분은 작은 주인님 결혼 준비를 위해 오셨어요. 저 혼자 도와드리기엔 한계가 있잖아요.”
“그냥 드레스 입고 머리 묶은 뒤에 화장하고 차 타고 성당 가면 되는 건데…….”
라고 말하던 노아가 뭔가 깨달은 표정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아스와 아미, 셀린이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동시에 끄덕였다.
“일단, 제가 운전면허증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깜찍이를 몰고 왔지.”
아미가 차 열쇠를 보여 주며 씩 웃었다.
“나는 꾸미기 담당이지.”
셀린은 따로 챙겨 온 화장도구함과 빗을 보여 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너도 알지? 내가 또 이런 유행엔 빠삭하고 솜씨도 좋잖아.”
“그런 것치곤 남자친구가 단 한 번도 없었대요.”
“그리 말하는 아미도 여태 연애 한 번 못했대요.”
아미와 셀린은 서로를 저격하며 으르렁대면서도, 노아를 침대에서 일으켜 욕실로 데려갔다.
욕실에 들어선 노아는 기겁했다.
“…이건 또 뭐야?”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은은한 꽃향기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욕조에 띄워 놓은 붉은 장미 꽃잎이 문제인 게 아니라.
“이 넝마는 도대체 뭐야?”
정체가 짐작은 가는데,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길 간절히 기도하게 만드는 천 쪼가리들이 있었다.
아니, 천 쪼가리보단 실뜨기에 가까웠다. 노아는 손가락을 집게처럼 해서 그것을 들어 보였다.
구멍이 큰 어망 같기도 했는데, 일단 모자이크 처리가 시급해 보였다.
“근사하지?”
뒤따라온 아미가 칭찬을 기대하듯 자신 있게 소개했다.
“네가 전에 대원들 앞에서 중장님한테 진득하게 놀아 보자고 했잖아. 좋아하는 속옷 입어 주겠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진득한 속옷을 신혼 선물로 샀지!”
셀린도 가세했다.
둘은 퇴근하자마자 따로 시내로 나가 이런 속옷을 전문으로 파는 가게에서 가장 잘나가는 것들로만 구매했다고 한다.
‘…것들로만?’
이거 말고 더 있다고?
노아는 역시 저의 교우 관계는 일찌감치 파멸의 단계로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결혼식 당일에 화병으로 쓰러져 식장 입장도 못 하는 비운의 신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일 게 틀림없었다.
노아는 원망 어린 눈초리로 친구들을 노려봤다.
하나 친구들의 정성 어린 선물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어서, 일단은 고이 접어 아스에게 전했다.
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속옷은 다른 것들과 함께 노아의 신혼여행 짐가방 안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럼 이제 몸 담그고 치장합시다.”
아스의 재촉과 함께 신부 꾸미기가 시작되었다.
적절한 온도로 맞춰진 장미 욕조에 들어갔다가, 충분히 씻고 건져진 뒤에 보송보송하게 닦이고,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요 녀석.”
젖은 머리칼을 꼼꼼히 닦아 주던 아미가 의심의 눈초리를 지었다.
“시중받는 게 좀 자연스럽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제 몸을 만지고 주무르고 닦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할 텐데, 노아는 지극히 당연하단 듯이 받고 있었다.
아미가 아스에게 물었다.
“언니, 혹시 노아가 이런 식으로 부려먹어요?”
“정말로 부려먹으면 아가씨가 가만있겠어요?”
“걘 자기도 해 달라고 할 거 같은데.”
“하하, 그것도 그러네요.”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다며 아스가 확실하게 말했다.
“벨로 가문의 가풍은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예요. 작은 주인님은 제게 불합리한 일은 절대 시키지 않으세요.”
“돈 주면 할 거면서.”
“노동의 대가를 받고 하는 건데, 당연히 해야죠.”
“아스 언니가 결혼할 땐 돈 정말 많이 준비해야겠네…….”
엎드려 누운 노아의 어깨를 조물거리던 셀린이 넌지시 중얼거렸다.
몸단장을 마친 세 사람은 우선 아침 식사를 했다.
때마침 일어난 클라레는 아미와 셀린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라레 오랜만이야!”
셀린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안 본 사이에 좀 예뻐졌네?”
“으음, 좀 그렇게 되었어.”
식탁에 앉은 클라레가 새침하게 대답하며 오렌지 주스를 꿀꺽꿀꺽 마셨다.
“근데 왜 왔어? 밥 먹으러 왔어?”
“네 언니 결혼 도와주려고 왔어.”
“맞다! 울 언니 결혼하지!”
“요 녀석, 까먹고 있었어?”
아미가 킥킥 웃으며 놀리자, 클라레가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넣으며 삐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 아냐! 방금 일어나서 까먹은 것뿐이야. 어제 자기 전에 내일은 해님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도 했는걸?”
“그래서 오늘 날씨가 좋은가 봐요.”
클라레의 볼에 입을 맞춘 아스가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아침 해가 화창하게 뜬 하늘은 결혼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아침 어서 먹고, 작은 주인님 드레스 입는 거 도와주세요.”
“응!”
클라레가 갓 구운 토스트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근데 언니는?”
그러고 보니 식탁에 노아가 안 보였다.
“지금 손님 방 침대에 누워 있어요.”
“왜? 밥 안 먹어?”
“나중에 드실 거예요. 물론 아주 조금만 먹어야 하지만요.”
“신부는 굶어야 하는구나아.”
클라레는 오늘도 또 하나를 배웠다.
***
“으으, 숙취…!”
아침부터 락소는 성당 입구 기둥을 붙잡고 지난 밤의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중이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님, 제발 이 숙취 좀 가져가 주십시오. 다시는 폭탄주를 말지 않겠나이다…….”
“쯧쯧.”
기둥 잡고 무릎 꿇은 아들 옆에서,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안타까운 듯이 혀를 찼다.
“술도 약한 놈이 저래서 어찌 술집 운영한다고.”
“아버지, 제발 조용히 좀 해 주, 우욱!”
“밖에서 토해라.”
“아니, 솔직히 이건 제가 정상 아닙니까?”
헛구역질 몇 번 하고 속이 조금 편안해진 락소가 따졌다.
“두 시간 전까지 제 가게에서 밤새 술 마셨잖습니까!”
레토의 결혼 축하를 위해 모인 군 간부들은 술의 신도 기겁하고 도망칠 정도로 들이켜고 마셨다.
오로지 술과 술, 그리고 술잔이 다였다.
“안주라도 좀 시키고 마시든가!”
“그러면 술맛이 안 살지.”
간부들의 술자리 재롱둥이로 유명한 베네딕토 실장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넘기며 입맛을 다졌다.
“저 말술들…….”
락소는 다시 숙취로 인해 도지는 두통에 끙끙거리면서, 이 공간에 아까부터 잠자코 있던 또 다른 이를 노려봤다.
그는 오늘 결혼식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락소가 욕한 말술 중 한 명인 레토였다.
“넌 안 피곤하냐?”
“정신력과 타고난 체질.”
“뭐?”
“너랑 달리 중장님은 술에 지는 일이 없단 뜻이다.”
“아버지가 왜 통역을 해요…….”
어이가 없어진 락소는 뭐라 더 따지는 대신에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아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군종실장은 슬쩍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치유마법을 살짝 걸어 주니, 락소의 숙취가 멀끔히 사라졌다.
그제야 한결 상태가 좋아진 락소는 아까부터 시끌벅적하던 문 너머 소음에 집중했다.
“애들도 있나 봐요? 씩씩도 하네.”
“처제 친구들.”
레토가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줄곧 창문 너머로 고정된 채였다.
베네틱도 실장이 그런 레토를 보며 슬그머니 웃었다. 그는 레토가 왜 저러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클라레 양은 본부에서 아주 유명하지.”
“…뭘 했다고 본부 규모로 유명해요?”
뭐 하는 꼬맹이야?
궁금해진 락소가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
벌떡 일어난 레토의 눈이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