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너도 짐작했겠지만, 내 친부모님은 7년 전 아들라보르 역공전에서 돌아가셨어.”
“군인은 아니셨지?”
“아니었어.”
“민간 조력자였나?”
레토가 물었다.
7년 전 전쟁 당시엔 군인만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자원하여 제국으로 많이 투입되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와 간호사, 전쟁 고아를 보살피거나 일반 평민을 돕는 사회 복지사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었다.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레토의 입장에선 조금 거슬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걸 할 시간에 제 나라 사람들이나 더 챙겼으면 하는 게 솔직하고 편협한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긴 했다.
“의사였어?”
“뭐, 비슷했지.”
노아가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어떻게든 사람을 많이 구하려고 하셨지.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죽어 버렸으니…….”
말끝을 흐린 노아는 딱히 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뒷말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고민하는 데 신경 쓸 뿐이었다.
“…어렸을 땐, 그걸 개죽음이라고 생각했어.”
노아는 7년 전을 잠시 회상했다.
부모님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원망으로 세상을 증오하고 모든 것에 예민해졌던 그때로.
“클라레는 그때 생후 한 달을 겨우 넘겼던 아기였어.”
그런 동생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던 노아 역시 14살밖에 되지 않은 미숙한 소녀였다.
“운이 좋아서 둘 다 헤어지지 않고 함께 입양됐지만, 그전까지는 고생 좀 했지. 전쟁고아란 게 다 그렇잖아?”
“흙이 무섭다고 징징거렸던 게 창피해지려고 하네.”
풀죽은 레토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노아는 어쩔 수 없단 듯이 웃어 보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랑 그런 거로 비교 경쟁하려고 말한 거 아니야.”
포마드로 멀끔히 뒤로 넘겼던 앞머리는 노아가 쓰다듬기 전에도 이미 반쯤 내려와 있었다.
붉은 눈을 살짝 가리는 그의 앞머리 탓에 레토의 인상이 단숨에 어려졌다.
“…부모님의 시신은 제국 어딘가에 묻혀 있어.”
“그때 전사했던 왕국군이나 민간인들의 시신을 거기에 대충 묻었던 건 기억해.”
노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부모님은 달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자세하게 말해 줄 순 없어. 하지만 부모님의 시신은 어떤 사람이 은밀한 곳에 숨겨 뒀다고 했어.”
위치는 노아도 몇 군데 짐작만 할 뿐이지,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다.
“마스와 페미나는 부모님의 시신을 찾아 줄 단서야.”
“그걸 어떻게 찾는데?”
“두 검을 가지고 제국에 가 보면 알아.”
“…….”
“이 이상의 자세한 사정은 아직 말하기 어려워.”
노아가 처음으로 레토에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레토는 딱히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해해.”
말하기 어려운 사연 따위, 사람이라면 하나 정돈 반드시 가지고 있다.
저도 그런 걸 말하는 게 어려웠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거기다 노아는 말하기 어렵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일종의 유예를 요청한 것이니, 레토는 기꺼이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난 그 검을 계속 찾았던 건데…….”
노아가 느닷없이 말을 멈췄다.
그러곤 레토를 휙 노려봤다.
“그랬는데!”
순간 울컥한 노아가 레토의 멱살을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레토 오케아누스! 너 이 새끼가!”
“자, 잠깐! 노아!”
당황한 레토가 손을 뻗어 막으려고 했지만, 개인 함선을 타면서 단련된 군인 신부의 팔뚝 근육엔 그간 쌓인 유감들이 가득 실린 채였다.
“진급해서 검을 찾을 수 있나 싶었더니! 네놈 새끼가 나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가로채 가고! 거기다 검 가지고 결혼까지 협박하고!”
“쿨록!”
“다시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내 눈물 콧물을 쏙 뽑아내고, 넌 뭐 안 흘리냐? 피라도 당장 쏟아!”
“자, 잠깐! 노아! 이거 좀, 켁!”
레토는 그렇게 한참을 달밤 아래서 목숨을 위협당해야 했다.
“후, 이제야 속이 좀 후련하네.”
뒤늦은 화풀이 덕에 손이 개운해진 노아는 한결 피부가 곱고 탱탱해졌다.
역시 속에 화를 쌓아 두는 건 좋지 않았다.
“중장님, 그만 복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대위 참, 씩씩도 하지…….”
레토는 단추가 덜렁거릴 정도로 늘어난 상의 자락을 더듬거렸다.
아까 멱살을 쥐던 손엔 분명 살기가 있었다.
“처제가 누굴 닮았는지 알겠다.”
영락없이 제 언니 판박이였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번 한 번으로 봐주는 걸 다행인 줄 아십시오.”
“그렇게 봐주다가 내가 천국을 볼 뻔했어.”
“대신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바구니를 챙긴 노아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뒤를 쫒아가던 레토가 노아의 바지 뒤에 묻은 모래와 풀 따위를 툭툭 털어 줬다.
사심 없는 손길에 노아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만질 줄 알았더니.”
“나도 분위기는 읽을 줄 알아.”
지금 만졌다간 정말로 천국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럼 그동안은 일부러 안 읽은 거냐?”
허파 뒤집히던 연애 시절을 떠올린 노아가 레토의 머리칼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아야야, 레토가 아픈 소리를 과장되게 냈다.
“근데 중장님.”
운전석에 앉은 노아가 물었다.
“엑셀이 어느 쪽입니까? 왼발이었나?”
“너 내려라.”
레토는 어느새 제 곁으로 성큼 다가온 천국에 아찔해졌다.
***
결혼식까지 이틀.
이때까지도 노아와 레토는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다.
일단 청첩장을 돌렸다.
부대원들에게 두 사람이 직접 돌렸는데, 이를 받은 아이스 중령이 갑자기 눈물을 보였던 건 제법 웃긴 추억이 되었다.
아스도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웃 주민들에게 청첩장을 나눠 줬다.
이웃이라곤 해도 클라레의 친구들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청첩장을 오케아누스 후작 저에도 따로 보냈다.
“보내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
“그렇기야 하지.”
“떨떠름하면, 내 이름으로 보낼게.”
“아니야. 내가 직접 보내야지.”
“힘들면 억지로 안 해도 돼.”
“네가 억지로 시켜서 그런 거 아니야.”
잠시 머뭇거리던 레토가 솔직히 말했다.
“그분의 시간을 괜히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방해될 거 같으면 안 오시겠지.”
“…….”
“그러면 내가 위로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침대 위에서 진득하게 위로해 줘.”
“아까 풀 죽은 건 다 연기였냐?”
노아에게 한 소리 들은 뒤에야, 레토는 청첩장을 오케아누스 후작 저로 보냈다.
그거 한 번 하는 게 개인 함선 타는 것보다 더 지치고 힘들었다. 노아는 그런 레토를 꼭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결혼사진이었다.
“이건 결혼식 후에 찍을래?”
노아가 제안했다.
“나 모병 포스터 사진 찍잖아. 그때 사진사들이 결혼사진 찍어 주겠다고 했어.”
“아아, 걔네?”
대충 짐작이 간 레토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넌 그 사람들 별로 안 좋아하더라?”
“당연하지.”
레토가 토라진 아이처럼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널 너무 좋아하잖아.”
그래서 질투 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레토를, 노아가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그리고 며칠 뒤.
결혼사진은 아스가 찍어 주기로 했다.
“정말 저로 괜찮아요?”
아스는 부탁을 선뜻 수락하지 못했다.
“제 사진 실력은 아가씨 찍으려고 배운 취미 수준이에요.”
“아스는 사진 잘 찍어!”
클라레가 두 주먹을 앙증맞게 쥐며 말했다. 감동한 아스가 클라레를 꼭 끌어안았다.
“전에 보니까 잘만 찍으시면서.”
레토가 일전에 본 클라레의 사진들을 떠올렸다.
“처형이 찍어 주시면 되겠네. 사진 비용도 처제께 드리면 되지 않을까? 출장비용으로 예정해 둔 게 대충 30만 피라…….”
“손가락 지문이 닳을 때까지 찍어 드릴게요!”
아스의 자기희생적 인품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아스는 돈을 참 좋아해.”
클라레는 제 가족의 어떤 모습도 품을 줄 아는 어린이였다.
“결혼사진은 결혼식 후에 찍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웨딩드레스는 결혼식 때 보는 게 좋잖아요.”
“벌써 두근거리는군요. 웨딩드레스를 입은 노아라…….”
“클라레는 화동 잘할 수 있어?”
“친구들이랑 같이 연습했으니까, 실수 따윈 없어!”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쨌건 결혼식 준비는 성황리에 마쳤다.
“이제 식만 남았네.”
잠들기 전, 노아는 제 방에 자러 온 레토에게 침대 한편을 내어 주며 말했다.
“이제 나도 좀 두근거리려고 해.”
“그동안 안 두근거렸어? 나 그러면 진짜 서운한데.”
레토가 제 넓은 품에 노아를 한가득 끌어안았다.
나잇값 못하는 투덜거림이 노아의 귀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삐쳤어?”
“뭐, 사실은 나도 아직 실감이 안 나.”
그는 노아의 머리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향기로운 꽃향기 사이로 보송보송한 파우더 향이 났다.
클라레가 씻고 나면 바르는 어린이용 보습 크림 냄새였다.
“너한테서 클라레 냄새가 나네.”
노아 역시 그에게서 같은 냄새를 맡았다.
“이젠 이 냄새 맡으면 레토 네 생각도 날 거 같아.”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지는 웃음과 함께 노아가 팔로 그의 등을 끌어안으니, 두 몸이 빈틈없이 바싹 붙었다.
평소라면 본능적인 욕구를 먼저 느꼈을 레토가 이번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으휴, 내 겁쟁이.”
등을 느릿느릿 토닥이는 손짓이 아기를 보듬는 것처럼 다정하고 자애로웠다.
어쩐지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레토는 부드러운 금발에 제 얼굴을 숨겼다.
울컥하는 감정과 달리, 제 입꼬리는 볼썽사납게 히죽거리고 있었다. 못난 모습을 보이긴 아직 부끄러웠다.
“…널 사랑해서 다행이야.”
고백하는 레토의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내가 잘하진 못할 거 같은데, 그래도 늘 노력할게.”
“빈말로라도 잘하겠단 말은 못 하겠어?”
“난 솔직한 게 장점이잖아.”
“하여튼 말이나 못 하면…….”
얄미워진 노아가 레토의 등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레토는 큭큭 웃으며 어깨를 흔들었다.
잠시 후 몰려드는 잠기운에 잠식된 둘에게선 나긋한 숨소리만이 들렸다.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든 모습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맞물린 채였다.
행복에 겨운 그들의 얼굴엔, 조금 전 자정을 넘기며 단 하루 남은 결혼식을 향한 기대감이 가득 어려 있었다.
***
왕국과 제국 사이에 펼쳐진 망망대해 중간엔 수많은 도서가 있는데, 대부분 사람이 살지 못하는 무인도였다.
하지만 몇몇 섬엔 오랜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면서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수배가 걸린 해적들이 불법으로 점령하여 은신처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어느 한 곳에서.
“…미친개가 결혼한다고?”
술과 담배로 거칠어진 목소리가 습기 찬 동굴에 불쾌하게 울렸다.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촛농이 반쯤 녹은 촛불이 꺼질 듯이 흔들렸다.
그 순간 아스러진 그림자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