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사실이잖아. 자기는 나 사랑 안 해?”
“사랑하니까 내가 친히 운전 중인 거 아니야. 내 남편의 고운 손에는 오로지 나만 닿아야 하니까.”
“여보……!”
감동한 아메타가 코를 살짝 찡그렸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제니 벨로가 한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자 짧게 친 백금발이 손가락이 닿기 무섭게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머리카락도 점점 길어졌다.
얼굴 인상도 동시에 바뀌었다. 매섭던 이목구비가 한결 온순해지면서 눈동자 색이 짙은 녹음으로 변했다.
“하필 골라도 오케아누스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제니우스 아드벨로가 피식거렸다.
“이것도 운명이면 운명이려나.”
“운명은 부모님의 반대로 언제든 바뀔 수 있어.”
“어휴, 꼰대가 여기 있었네.”
남편의 진심을 가볍게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제니우스의 표정 역시 썩 가볍지는 않았다.
“…어머님이 뭐라고 안 할까?”
표정을 읽은 아메타가 분위기를 환기할 겸 물었다.
다행히 이 시도는 잘 먹혔다.
“엄마는 이미 알고 있어.”
제니우스가 어젯밤 온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자기 없는 동안 결혼식 진행하면 바다를 뒤집어 버리겠다고 얼마나 고성을 지르던지.”
“뭐야, 결혼 허락하시는 거야?”
“그럼 젊은 애들이 좋다고 결혼하겠다는 데 반대해?”
“그거야 그래도…….”
“어휴, 안 맞으면 이혼하면 되잖아.”
요즘 세상에 이혼이 뭐 흠이나 되겠냐고 말하는 제니우스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때마침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불어오는 바람과 만나 화려한 연출을 보였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 장관을 눈에 담으며, 제니우스가 말했다.
“벌써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사서 걱정하진 말자고.”
“…….”
“그나저나 그 망할 중장 꼬맹이.”
제니우스는 제게 예를 갖추던 레토를 떠올렸다.
“평소엔 나 볼 때마다 그렇게 질색하더니, 오늘은 잘 보이고 싶어서 아주 안달 났더라. 웃음 참느라 혼났네.”
“역시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놈이군. 난 반대야.”
“걱정 마. 그 녀석, 나중에 울 엄마 보면 기절초풍할 테니까. 혼내는 건 늘 우리 엄마 몫이잖아.”
“어머님만 믿는다, 내가……!”
아메타는 기어코 두 손 간절히 모아 기도했다.
“……그런데 아티는 아직도 연락 없어?”
한참 기도하던 아메타가 질끈 감았던 눈을 실처럼 얇게 떴다.
“걔는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어디서 밥이라도…….”
“우리 집 장남이 어디 가서 밥 굶을 애가 아냐.”
“아니…….”
어디서 밥이라도 훔쳐 먹고 사고 치는 거 아니냐고.
“…….”
이번만큼은 천하의 제니우스도 태평스럽게 반응하지 못했다.
***
남부의 봄은 왕국에서 가장 빨리 찾아온다.
거센 해풍과 찾아오는 봄을 맞이한 남부 샤프 영지는 잠시 고기잡이를 쉰다.
바닷바람 때문에 거칠어진 파도 때문에 도저히 배를 몰고 나갈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바닷물에 녹슨 어업 도구를 점검하고, 겨우내 해풍으로 부식된 집안 곳곳을 수리하고 보수한다.
남부에서 봄은 준비의 계절이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의미는 아니었다.
“장군님도 디펜 섬에서 잠시 쉰대.”
늦봄의 어느 날.
클라레가 여객선에 타면서 받은 어린이용 안내 책자를 꼼꼼히 읽었다.
“여기서 생선을 엄청 먹고, 잠도 실컷 잔 뒤에 ‘무풍의 바다’로 출발한다고 적혀 있어.”
“무풍의 바다?”
옆에서 같이 읽던 세레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풍의 바다는 신의 영역이라잖아.”
센샤가 아는 척했다.
“아빠가 그랬는데, 거기는 바람이 전혀 안 분다고 했어. 그래서 거기에서 죽은 사람도 엄청 많다더라.”
아이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센샤의 말에 집중했다.
“…흥! 난 그런 이야기 별로 안 무서워!”
그러나 허세 가득한 목소리와 달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는 제 보호자를 서둘러 찾고 있었다.
“아스!”
근처에서 다른 아이들을 살피고 있던 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쪼르르 달려가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클라레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센샤가 무서운 거 말했는데, 난 안 무서웠어.”
“아스 누나는 무풍의 바다 알아요?”
같이 이야기를 듣던 안경 쓴 똘똘한 인상의 소년이 물었다. 아이의 이름은 보르였다.
“거기에서 사람이 엄청 죽었대요…….”
리리가 살짝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에는 그랬는데, 요즘은 아니에요.”
아스의 말에 아이들의 겁먹었던 표정이 눈에 띄게 안도로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커다란 배는 힘이 강해서, 바람이 안 불어도 움직이죠.”
“난 그럴 줄 알았어!”
클라레가 자신은 한 번도 무섭지 않았단 듯이 씩씩하게 굴었다. 철없는 허세쟁이는 어른들의 얼굴에 미소를 자아냈다.
“자, 조금 전에 선생님이 부르셨어요. 이제 가 봐야죠.”
클라레와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을 찾는 선생님 곁으로 갔다.
그 뒤를 따라가며 아스는 자신이 보조 도우미로 참가한 반의 인원수를 확인했다.
아스가 전부 모였단 뜻으로 선생님과 눈을 마주했다.
“여러분.”
클라레가 있는 1학년 선생님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오늘 이 여객선에는 마레이 학교 전원이 탑승 중이었다.
“곧 장군님이 도착할 거예요. 그러니 얌전히…….”
[안내 말씀드립니다.]
때마침 안내 방송이 울렸다.
[조금 전 해군 본부에서 특수 함선 사령부 전 대원이 장군님과 그 부대를 호위하여 출발하였단 소식이……]
“저기 봐!”
누군가가 간판 너머 푸른 마다 끝을 가리켰다.
물살을 가르는 힘찬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시원하게 다가왔다.
[…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벌써 도착했군요.]
맥 빠진 안내 방송은 금방 꺼졌다.
“아스! 아스!”
클라레가 뒤꿈치를 폴짝거렸다.
“언니랑 형부야!”
***
제1함대 사령관 클라시스 소장이 갑판 위에 올라왔다.
“날이 좋군!”
저 편한 대로 껄렁하게 입고 다니던 바다 사나이는, 날이 날이라고 답답한 정복을 목 위 단추까지 채운 차림새였다.
만날 꽁지만 묶고 다니던 어둑한 잿빛 머리는 포마드까지 발라 멀끔하게 정돈까지 했다.
그는 항해하기 완벽한 바다 날씨에 감탄 중이었다.
“과연 장군님이야. 떠나는 날을 잘 맞추는군.”
“사령관님.”
부르는 소리에 클라시스 소장이 뒤를 돌아봤다. 자신이 탄 함선의 함장이었다.
“아이고, 함장. 고집부려서 승선하게 되었어.”
클라시스 소장이 미안하다고 머쓱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저였어도 사령관님 입장이면 승선을 요청했을 겁니다.”
“은근슬쩍 내 고집을 탓하는 건가.”
“하하! 말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봐주라고. 오늘은 명예로운 날이잖아.”
무려 왕국의 또 다른 전쟁 영웅을 배웅하는 날이었다.
오늘을 위해서 클라시스 소장은 제1함대에 있는 호위함 3척의 출항을 허락했다.
“실은 조금 전에 통신이 왔습니다. 곧 접선할 예정입니다.”
“준비해야겠군.”
클라시스 소장은 주머니에 넣어 둔 하얀 장갑을 착용했다.
그 사이, 함장의 지시에 대기 중이던 승선 대원들이 갑판 위에 올라와 바다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먼바다를 응시하는 클라시스 소장의 입술이 멋스러운 곡선을 그렸다.
“…오는군.”
저 멀리, 빠른 속도로 파도를 가로지르는 무리가 보였다.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매끄러운 회색 등과 뾰족하게 선 등 지느러미가 바다 신의 삼지창처럼 파도를 찌르고 갈랐다.
물보라에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조각이 화창한 햇빛에 반사되면서 어떤 보석도 견주지 못할 눈부신 반짝임을 자랑했다.
그리고 이들 무리를 호위하기 위해, 양쪽으로 넓게 나뉘어 항해 중인 특함 대원들이 보였다.
왕국에서 가장 멋지다고 손꼽히는 해군 제복을 입고 바다 위를 자유롭게 달리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웅장케 했다.
[대함경례 준비!]
곧 스피커를 통해 구호가 울렸다.
[총원 차렷!]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동자엔 조국에 승리를 거머쥐게 한 두 영웅을 향한 존경과 이 자리에 자신이 있다는 자긍심으로 가득했다.
[경례!]
“필승!”
우렁찬 인사와 함께, 모두 각을 맞춰 뻗은 손을 ‘승’자 소리에 맞춰 팔을 올렸다.
클라시스 소장과 함장도 경례했다.
그때였다.
삐이이!
후임 함정의 경례를 받은 선임 함정이 답례를 보였다.
장군님의 신호를 시작으로, 뒤따르던 대원들이 분수공으로 물을 뿜었다.
그 위로 선명한 무지개가 비쳤다.
끼이, 끼이!
곧이어 장군님을 시작으로 전 대원이 물 위를 튀어 올랐다.
물살을 가로지르는 함대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정말 장관이군.”
클라시스 소장이 감탄했다.
“함장, 그대는 이런 걸 본 적 있나?”
“저 역시 처음입니다…….”
영혼이 홀린 것처럼 넋 나간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잘 봐 두자고.”
소장이 씩 웃었다.
“그 유명한 특함의 ‘전송식’을.”
***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특함 대원 13명 전원은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병은 검은 치장 깃이 달린 검은 정복, 부사관은 초록빛이 감도는 어두운 정복, 장교는 푸른 정복을 입었다.
계급별로 다른 이 세 가지 색의 정복은 바다를 상징했다.
“매일 개인 함선 항해하느라 그렇게 힘들었는데……!”
누군가가 그간의 훈련을 떠올리며 이를 갈듯 소리쳤다.
그 외침은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의 마음을 대변했다.
오늘 전송식을 준비하기까지, 특함은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위를 끊임없이 항해했다.
제아무리 개인 함선이 최신 기술의 집약체라고 해도, 제 키의 두세 배가 넘는 파도를 감당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조금만 실수했다간 그날로 물고기들의 뷔페가 열리는 거였다.
“…솔직히.”
아미가 불평을 토로했다.
“장군님 함대가 출항하는 날은 늘 날이 좋았잖아. 그러니까 굳이 파도가 높을 때 그렇게 개고생하며 훈련할 필요가 있나?”
“…….”
“…….”
아무도 수긍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전원 뼈저리게 공감했다.
험난한 해상에서 이뤄진 훈련이 무색할 만치, 오늘의 바다는 천국의 구름처럼 잔잔하고 유순했다.
“융통성 있게 격일 훈련으로…….”
“치티아 중위.”
말을 자른 노아가 귀에 건 통신 기구에 손을 얹었다.
노아의 목소리가 다른 대원들의 통신 기구에 전달됐다.
귀에 전해지는 음성은 제법 엄했다.
“어떤 상황에서건 개인 함선을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해. 이번 전송식을 준비하기 위했던 그간의 훈련은 그 일환에 불과하다.”
“…….”
아미의 입술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