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어머, 부군께선 우시나요?”
막 차를 끓이고 나온 아스가 예상했단 듯이 물었다.
“차는 나중에 가져올까요?”
“아니야, 여기 두렴. 아스 너도 그만 자리하고. 그래도 상견례 자리에 네가 없으면 되니? 당신도 이제 뚝 해.”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빠르게 정리한 제니가 놀라 굳은 레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이가 그만큼 딸들을 아껴서 그래.”
레토는 이해한단 듯이 웃음을 지었다.
저 같아도 딸이 저 같은 놈과 결혼하겠다고, 그것도 결혼 2주 전에 연락하면 당장 반대부터 했을 거다.
그래도 충격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제니가 어느새 말을 낮춘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솔직히 나도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반대하려고 했는데, 조금 전에 애 아빠한테 농담 치던 모습은 꽤 호감이었어.”
매섭던 눈매가 웃음과 함께 가늘어졌다.
“노아가 보통 고지식하니? 그러니까 오히려 이런 농담도 잘 내뱉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해.”
“바로 나 같은!”
클라레가 끼어들었다.
“엄마, 형부는 나랑 농담 주고받기가 꽤 되는 사람이야.”
“네 수준 높은 농담을 받아친다고?”
그건 정말 대단하구나.
제니가 의외란 듯이 레토를 바라봤다. 레토는 엄청난 칭찬을 들은 것처럼 어깨가 으쓱거리려는 걸 애써 참았다.
“난 그 점을 높이 사고 있어.”
제 할 말을 마친 클라레는 아스가 가져온 쿠키를 입에 물고 노아 곁으로 갔다.
***
애초에 신랑의 보호자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견례는 차를 마시며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격식 없는 자리로 변했다.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처음 레토의 손을 내쳤던 아메타도 나중에는 레토에게 먼저 말을 걸 정도로 마음을 열었다. 레토는 그 사실이 무척 기뻤다.
“노아가 선택한 남자니까, 믿어야지.”
“내 딸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
“…이미 울린 건 괜찮아?”
언니, 전에 형부랑 싸워서 울었는데.
클라레가 입에 쿠키 가루를 묻힌 채로 말했다.
평화롭게 끝날 수 있었던 상견례는 아메타의 험악한 경고와 멱살잡이로 마무리됐다.
부모님이 탄 차를 배웅한 뒤, 노아가 클라레에게 물었다.
“너 일부러 말했지?”
“응.”
클라레가 당당히 말했다.
“처제 너무해요. 내 편 아니었어요?”
레토가 우는 소리를 냈다.
“무슨 소리!”
클라레가 올챙이 허리에 팔을 올렸다.
“난 언제나 언니랑 아스 편이야!”
“클라레……!”
“아가씨!”
감동한 언니들이 막내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토는 조금 질투했다.
주책스럽게 입술을 빼꼼 내미는 건 저도 모르게 나온 유치한 행동이었다.
“물론 형부도 좋아해.”
그 말에 레토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말했어. 가끔 이렇게 군기를 잡아야 기어오르지 않고 알아서 배 깔고 복종한다고.”
“클라레, 그건 개 키우는 방법이잖아.”
“그치만 전에 언니가 술 마시고 주정 부릴 때, 형부 보고 개라고 했잖아.”
“이래서 애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고…….”
조심해 달라고 부탁한 게 방금 전이었거늘.
아스의 원망스런 눈초리를 피할 겸, 노아와 레토는 언덕 아래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술 마시면 내 욕을 할 정도로 그리워했어?”
“네 욕했다는 소리를 어쩜 너 좋을 대로 곡해할 수 있냐?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너로 가득 찬 지가 오래라서. 세상에, 서쪽으로 지는 저 태양은 꼭 내 품에서 피부를 붉히는 네…….”
“으이구, 좀!”
기어코 노아는 걸으면서 한쪽 다리로 레토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필살기를 개발해 버렸다.
그래도 그와 깍지 낀 손은 풀지 않았다.
언덕 위 벨로 저택과 시내가 있는 아래 중간에 공원이 하나 있었다.
규모는 작아도 그네나 시소, 미끄럼틀처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놀이 기구는 전부 있었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내지르는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위에 있을 때는 안 들리던데.”
레토는 깜짝 놀랐다. 이토록 우렁찬 소리가 저택에선 한 번도 들린 적이 없었다.
“그것까지 다 계산하고 만든 공원이래.”
공원을 가볍게 돌아다닌 뒤, 둘은 다시 저택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곧장 저택으로 들어가는 대신, 정원을 느릿느릿 걸었다.
“안으로 들어갈까?”
“흙이 무서웠던 건 아주 옛날이고, 이젠 괜찮아.”
“만일을 생각해서 물어본 거야.”
“그래도 네가 손잡아 주니까 안 무서워.”
깍지로 얽힌 두 손은 동시에 힘이 들어갔다.
“…물어보면 실례려나?”
레토가 정원에 심어진 이름 모를 꽃을 보며 말했다.
“왜 부모님이랑 따로 살아?”
그가 본 노아의 부모님은 좋은 분이었다. 어린 클라레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아아, 그거?”
노아가 별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나랑 클라레는 양녀거든.”
말을 들은 레토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 얼굴을 본 노아는 도리어 제가 더 미안해졌다.
“…실망했어?”
“그럴 리가.”
레토가 서둘러 부정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여서 놀란 거야.”
“왜?”
“당연히 그런 낌새가…….”
레토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입양 가족으로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얼마나 멍청한 궤변인지, 그는 자기 입 밖으로 내뱉은 직후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저택에 있는 클라레가 걸렸다.
“클라레도 알아.”
노아가 바람에 나부끼는 제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혹시 몰라 말해 두는데, 부모님은 정말 잘해 주셔. 우리가 독립해서 사는 건 클라레 학교와 내 직장 문제 때문이야.”
그래도 레토의 놀라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은 눈치였다. 그걸 알아챈 노아가 실소했다.
“물어봐.”
“괜찮아?”
“네가 물어봐서 실례일 건 없어.”
노아의 다정한 허락에 레토는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용기 내 물어봤다.
“친부모님은?”
“돌아가셨지.”
“언제?”
“7년 전에.”
그 말에 레토는 노아가 제 어린 시절을 말하는 것에 망설였던 순간이 떠올렸다.
‘망설일 만했네…….’
작년, 왕국에서 조심해야 했던 단어는 ‘6년 전’이었다.
그리고 해를 넘긴 올해는 그 단어가 ‘7년 전’로 바뀌었다.
그 해는 아들라보르 왕국이 역공전으로 승전한 동시에, 수많은 전사자를 비롯한 피해자가 발생한 해이기도 했다.
레토는 노아의 부모님이 7년 전 전쟁으로 사망한 피해자라 짐작했다.
그리고 민간인이었을 거다.
친부모가 군 전사자라면 아무리 입양되었다고 해도 유공자 자녀란 사실이 군에 등록되었을 테니까.
그걸 상관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우리 처제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알아?”
“당연히 모르지.”
그때 클라레는 말도 못 하는 젖먹이였다.
그 사실을 담담히 말하는 노아는 되지도 않는 소리 말라며 타박하듯 웃었지만, 레토는 그 모습이 무척 괴로워 보였다.
당장 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노아는 정말로 울지 않았기에, 레토는 어색하게 따라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넌 정말 괜찮아?”
노아가 물었다.
“너도 우리 부모님한테 인사드렸는데, 나도 후작님께 인사드려야 공평하잖아.”
“이게 공평으로 따질 문제인가?”
“그럼 아냐?”
깍지 낀 손을 푼 노아가 팔짱을 끼며 레토를 노려봤다.
시선을 마주한 레토는 짐짓 여유로운 척하며 팔을 뒤로 숨겼다.
그렇게 한 치의 물러섬 없는 기 싸움을 벌이던 중.
“…됐어.”
먼저 포기한 건 노아였다.
“보나 마나 내 겁쟁이가 또 혼자 지레 겁먹고 연락 안 한 거겠지. 안 봐도 뻔하다.”
“너무 냉정하게 말하네.”
상처 입겠다며 우는 척하던 레토가 은근슬쩍 노아의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노아는 저리 가라며 힘이 전혀 실리지 않은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혹시 후작님이 너 학대했어?”
노아는 본인이 말하고 화들짝 놀랐다.
“진짜야? 너한테 손찌검한 거야?”
“그런 일 없었어.”
레토가 흥분한 노아를 서둘러 진정시켰다.
“후작님은 인격자야. 나 같은 걸 양자로 들여서 이렇게 잘 키운 사람이라고.”
“‘나 같은’이란 표현 쓰지 마.”
이쯤 되니 노아는 걱정이었다.
평소에는 이게 남을 비꼬는 말투가 특유의 능글거림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오케아누스 후작 가문에서 정신적인 학대라도 당한 건지, 아니면 전에 들었던 그의 어린 시절이 근본적인 원인인 건지.
잠시 고민한 노아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제 직감이 말했다. 이건 레토가 힘겹게 털어놓았던 괴로운 어린 시절과 격이 전혀 다른 상처일지 모른다고.
만약 그런 거라면, 저를 사랑하면서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냐고 따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약속해.”
대신에, 노아는 레토의 자존감을 치켜세우기로 했다.
“또 그런 표현 썼다간…….”
“썼다간?”
레토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따라 하며 물었다.
막상 엄하게 경고하려던 노아의 말문이 막혔다.
레토는 노아의 다음 말을 얌전히 기다렸고, 노아는 그 착한 침묵에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차마 덧붙일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간식 없을 줄 알아.”
“…….”
“…웃어, 그냥.”
창피해진 노아는 레토의 가슴에 얼굴을 숨겼다.
곧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노아의 등 뒤로 커다란 팔이 강하게 감겼다.
“클라레는 간식 빼앗으면 바닥에 드러누울 정도로 무서워해.”
“간식 못 먹으면 싫으니까, 앞으로 조심할게.”
레토는 자신을 낮추는 표현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좋아.”
노아도 그거면 되었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편히 안겼다.
***
샤프 영지를 방금 막 벗어난 검은 마동력차가 포장된 숲길을 달렸다.
마동력차로 유명한 체프 사에서 이번에 새로 출시할 예정인 미공개 신형이었다.
“노아가 결혼이라…….”
조금 전에 딸과 예비 사위를 만나고 온 제니 벨로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단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 상황이 믿기진 않지만, 그래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일이 아주 재밌단 듯이 즐기고 있었다.
반면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역시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아메타 벨로가 동안인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봤다.
이미 그들이 탄 차는 샤프 영지와 아드벨로 영지를 잇는 숲길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이대로 1시간을 달리면 아드벨로 영지가 금방이었다.
“노아는 아직 어려! 결혼이 무슨 말이야!”
“넌 노아보다 어렸을 때 나랑 결혼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제니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그거랑 이건 달라……!”
아메타가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운전하느라 시야를 앞으로 고정했던 제니가 틈을 봐 옆을 힐끔거렸다.
“우리는 정말 사랑했잖아!”
“또 그런 귀여운 소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