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45)

34.

“중령님이 나보고 잘 부탁한대.”

일전에 노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스 중령이 저를 걱정했다는 그 말이.

그 때문인지 몰라도, 레토는 평소처럼 말을 부러 삐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건 잘되었다 싶었다.

“중령은 결혼 경험자지?”

“그, 표현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들으면 이혼한 줄 알겠다며 아이스 중령이 투덜거렸다.

“결혼할 때 부모님께 연락했나?”

“물론입니다. 하아, 아직도 생생합니다. 결혼 인사드리러 처댁에 갔다가 장인어른한테 죽을 뻔했는데…….”

영웅담처럼 그날을 떠올리는 중령에게, 레토가 물었다.

“나랑 노아가 까먹고 연락을 못 했어.”

“무슨 연락을 말입니까?”

“결혼한다는 연락.”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질문하는 이아스 중령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대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했는데…….”

나름 준수하다고 평가했던 중령의 얼빠진 모습을 보니, 물어볼 필요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저와 노아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으니 말이다.

“알았으니 쉬게.”

“아, 아니! 중장님!”

당황한 중령이 서둘러 상관을 붙잡았다.

“양가 어른께 연락은 필수입니다.”

“…….”

잠시 생각에 빠진 레토가 아이스 중령을 힐끔거렸다.

“…양자라고 해도, 연락은 필수입니다.”

레토의 생각을 읽은 중령이 한숨을 푹 내쉬며 던져지지 않은 질문에 대해 답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가문에 연락을 안 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입장이 입장이잖아.”

“제가 알기로 오케아누스 후작님은 중장님이 양자란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거야.”

나 같으면 절대 그리 못 할 텐데.

신뢰하는 아이스 중령에게도 차마 말 못 할 사정을 꾹 삼키며, 레토가 심드렁히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젠 아실 거야.”

주말에 레토가 전화한 상대가 바로 오케아누스 후작이었다.

그는 후작께 자신에게 주어진 사재를 써도 되냐는 허락을 구했다.

수화기 너머 후작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써도 된다는 허락을 내렸다.

아마 여태 잘 쓰지도 않아 쌓일 대로 쌓인 사재를 찾아 쓰려는 양자의 연락이 꽤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어디에 쓰는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 놀란 탓에 물어보는 걸 까먹은 듯했다.

“내가 양자긴 해도, 아직은 오케아누스 가문의 일원이잖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은 수도에 계신 그분들께 보고되고 있을 것이었다.

***

해군 소장 이적 사건.

전 군수 사령관 플랜시 소장을 비롯해 왕실 기사단 일곱 명이 군사 무기를 제국에 밀반출하려다 미수로 그친 사건.

남부 해군이 이번 사건으로 나름의 곤욕을 치렀다.

물론 동시에 개인 함선을 지키고 범인들을 체포했다는 점에선 찬사를 받았다.

득과 실을 따지자면 남부는 득이 아주 조금 더 우세했다.

하지만 왕실 기사단은 아니었다.

그토록 자부했던 명예, 오랫동안 왕실을 수호했단 그들의 자부심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국왕은 사건에 연루된 기사단 7명 중 주범 격이었던 델라트 경과 페르아타 경의 기사직을 몰수, 사형을 선고했다.

왕실 기사는 군인이기 전에 국왕 직속의 사병이었다.

즉, 정식 재판 없이 국왕의 명으로 빠르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여기에 델라트 가문은 작위를 박탈당해 평민이 되었다.

재산도 몰수하려 했지만, 몰수할 재산이 없었다. 델라트 경의 도박 중독이 알려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반면, 나머지 다섯 평기사에겐 1개월의 무급 정직과 향후 5년간 진급 금지라는 벌이 내려졌다.

협박으로 가담된 점, 그리고 범행 전에 용기를 내어 자수하고 체포에 도움을 줬다는 점이 감형 사유였다.

그 탓에 저들을 향한 비난도 썩 크지 않았다.

오히려 동정 여론이 일어날 정도였다.

“…세상 참 얄궂어.”

수도 외곽에 꾸려진 작은 마을.

그곳에서 조그만 잡화점을 운영하는 주인은 동네를 지나가는 젊은 총각을 보며 혀를 찼다.

“늙은 조부모 병수발하면서 열심히 사는 청년이었는데….”

“상사를 잘못 만난 죄지.”

거리를 빗자루질하던 옆 가게 사장도 동의했다.

“그래도 국왕 전하도 그걸 알고 감형하셨다잖아.”

“지금은 뭐 한대?”

“일용직을 나가나 봐. 매일 새벽에 나가서 늦은 오후에 돌아오더라고.”

동정 어린 시선이 한 번 더 젊은 총각, 렐리 경의 뒷모습에 꽂혔다.

그는 다소 더러운 옷차림과 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팔에는 시커먼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렐리 경은 지친 걸음을 끌고 집으로 향했다.

그와 조부모가 사는 낡고 작은 집은 마을에서도 꽤 외진 곳에 있었다. 근처에 인가라곤 그곳 하나가 유일했다.

“다녀왔…….”

집으로 들어선 렐리 경은 그대로 굳었다.

“어서 오게나.”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진 거실에서 누군가가 인기척을 냈다.

“…읏!”

황급히 몸을 돌리려던 렐리 경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누군가가 그의 팔을 뒤로 꺾다시피 당기며 넘어트렸다.

“그리고 늦었네.”

그늘진 거실에 있던 사내의 말대로였다.

이미 수많은 무장 병력이 이 낡고 좁은 집을 포위한 채였다.

“프세드 렐리.”

이름이 불린 렐리 경은, 아니, 프세드 렐리는 더는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던 효손이 아니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엔 반성의 기미는커녕 도리어 억울하단 삐뚤어진 원망과 분노만이 가득했다.

“그댈 국가 안보법 위반으로 체포하겠네.”

어둑한 거실에서 나온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사자를 연상케 하는 백발과 수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하는 시커먼 선글라스, 볼에 난 한 줄의 흉터.

“…서, 설마!”

렐리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웠다.

“꼴에 날 아나?”

백사자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같잖게.”

쾅!

커다란 발이 렐리의 얼굴 위로 빠르게 떨어졌다.

***

아들라보르 왕궁 바로 앞에는 길고 넓은 광장이 일자로 쭉 이어져 있는데, 그 양옆으로 각 정부 부처 및 주요 관공서가 줄지어 나란히 있었다.

효율적인 업무 순환을 위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각 건물은 자신들이 어떤 부처인지 알리는 간판이나 상징을 큼지막하게 걸어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건물도 하나 있었다.

적당히 크고 폐쇄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잿빛 벽돌로 지어진 네모난 건물은 언뜻 보면 옛 귀족의 타운 하우스처럼 보였다.

“후작님.”

푸른색 차선이 길고 우아한 마동력차가 건물 앞에서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독서 중이던 중년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

“천천히 나오십시오.”

“관공서 앞에서 정차를 오래 해선 안 되지.”

코에 걸친 조그만 코안경을 벗어 정리한 뒤, 여인은 폐쇄적인 인상의 회색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색 벨벳 투피스를 입은 여인은 챙이 좁은 클로슈 모자를 쓰고 있었다.

푸른 머리를 올려 묶은 이지적인 얼굴은 어딘가 싸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고아한 자태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리고 모두 저 사람이 귀족이란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게 세운 허리와 정박을 지키는 걸음걸이. 조그만 가방을 손목에 건 팔의 규칙적인 흔들림에서마저 귀족 특유의 고상한 품격이 느껴졌다.

“오케아누스 후작님!”

어떤 젊은 직원이 여인을 알아봤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혹시 장군님 때문입니까?”

“장군님이 여기 계시는 모양이긴 하군.”

“아, 하하…….”

머쓱하게 웃던 직원이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국장실에 손님으로 계십니다. 오늘 체포 현장에도 같이 가셨죠.”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네.”

“아닙니다. 오히려 같이 출동한 녀석들 말로는 장군님의 괴력을 직접 봤다며 기뻐했습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이던 직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를 비켰다.

오케아누스 후작은 곧장 국장실로 향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호탕한 웃음이 들렸다. 그 중엔 후작이 찾던 사람의 것도 있었다.

감정을 절제하던 오케아누스 후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미세한 찌푸림은 답답한 짜증에 가까웠다.

“으어어!”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 돌리며 안으로 들어가니, 맥 빠지는 비명이 들렸다.

오케아누스 후작이 찾던 이의 것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선 후작은 깜짝 놀라 허둥거리는 국장을 무시한 채, 태연히 술잔을 기울이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군님.”

“…….”

“아버지.”

“그래, 그래.”

원하는 호칭을 들은 백발의 신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케아누스 후작은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안보국의 체포 현장에 같이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따라간 것뿐인데…….”

“그리고 아버지가 용의자를 체포하는 자리에서 불필요한 위협을 가했다는 소식도 들었고요.”

“도망칠 것처럼 보이길래 가볍게 제압한 것뿐이야.”

발로 코앞을 사뿐하게 밟았더니 자기 멋대로 기절한 걸 어쩌라며, 백사자가 커다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잔소리하려고 왔냐? 너 때문에 안보국 국장이 놀라서 뒤집어졌잖아. 거 괜찮은가?”

“하하, 놀라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몸을 추스른 안보국 국장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나 참. 명색이 안보국 국장이 문 벌컥 여는 소리에 그러면 어쩌나…….”

“심장이 작아서 이런 겁니다.”

“그럼 약술 한잔해야지! 대작이나 마저 하자고!”

두 노인은 다시 껄껄거리며 술잔을 쥐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오케아누스 후작이 다물었던 입술을 잠시 삐죽거리다가 말했다.

“레토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그 말에 백사자가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미안하게 되었군. 이만 가 보겠네.”

“예? 장군님?”

“나중에 내 따로 저택에 초대하지.”

“사, 살펴 가십시오!”

“배웅은 됐어. 그리고 술 작작 마시게. 간 상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푸른 차의 운전기사는 건물을 나오는 오케아누스 후작을 발견하곤 서둘러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 녀석이 뭐래?”

차에 탄 백사자가 다짜고짜 물었다.

“…질문은 제가 먼저일 것 같군요.”

오케아누스 후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버진 왜 체포 현장에 따라가셨던 거예요? 월권 아닌가요?”

“난 그냥 가서 체포하는 거 구경만 했다.”

백사자가 거품 물고 쓰러졌던 프세드 렐리를 떠올렸다.

“큰 꼬맹이가 유인한 먹잇감이라잖아. 궁금해서 한번 가 본 것뿐이야.”

“레토가 어련히 알아서 해냈을까요.”

“그러니까 가 본 거야.”

왕실 기사단이 압송될 때, 레토는 평기사 다섯을 선처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물론 양식은 ‘진정’이었지만, 실제로 기재된 내용은 진정과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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