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245)

33.

그렇게 둘만의 비밀을 약속한 둘은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클라레는 아스의 품에 안긴 채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졸려…….”

“이런, 춘곤증 오셨네.”

“춘곤증?”

“따뜻한 봄날에 오는 요정이에요. 배부르고 행복한 사람에게 졸음의 마법을 거는 장난꾸러기죠.”

“나는 배부르고 행복하구나아…….”

클라레는 그렇게 졸듯이 잠들었다.

때마침 전화를 마치고 나온 레토와 마주쳤다. 옆에는 당연히 노아도 함께였다.

“전화 통화는 다 하셨나요?”

“예, 덕분에요.”

싱긋 웃는 레토를 보니, 아무래도 제 뜻대로 진행된 모양이었다.

아스는 어쩌면 결혼이 정말 금방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제는 잠들었나요?”

레토는 잠든 클라레를 보며 다정한 미소를 그렸다.

볼에 붙은 머리칼을 손가락을 살짝 치우니, 클라레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다 입술을 쩝쩝거렸다.

그러곤 배시시 웃었다.

“…….”

레토는 가슴 위 옷자락을 쥔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너무 귀여워…….”

“알았으니까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클라레 재우고 올게.”

“이미 주무시니 저 혼자 해도…….”

“옷 갈아입히고 할 거잖아. 둘이 하는 게 빠르지.”

노아와 아스는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클라레의 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했다.

식칼토끼 장난감,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 가지런히 꽂힌 교과서, 할머니가 선물해 준 동그란 흰털 뭉치 고리.

노아와 아스는 클라레의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누운 클라레는 조그맣게 코까지 골았다.

“우리 집에서 가장 팔자 좋은 녀석이라니까.”

동생을 내려다보는 노아의 얼굴엔 다정한 기운이 감돌았다.

“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의 풍파 따윈 모르면서요?”

“인생은 쉽고 즐겁게 사는 게 최고의 지복이지.”

“나이 드신 분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아직 젊은 분이 왜 저런담.

아스가 가볍게 타박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때였다.

“…봤어?”

노아가 넌지시 물었다.

“그럼 안 봤을까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인 감정이라서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아스의 솔직한 대답에 노아가 애먼 뒷목을 벅벅 쓸었다.

“실망했어?”

“실망을 왜 해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실망할 거리가 없어서 그런 거로 실망할까.

“그냥, 조금 알 거 같았어요.”

노아가 사랑으로 힘들어하는 걸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아스였다.

처음엔 이해가 안 갔다.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미련스럽게 저 남자를 놓지 못하는 걸까.

저 같았으면 벌써 딴 남자를 찾았을 텐데.

동생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노아는 정말 아름답고 미래가 창창한 사람이었다.

분명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아스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해했다.

지금껏 레토가 일방적으로 노아에게 질척거리고 무거운 사랑을 쏟아붓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애초에 보통 사람이었으면 벌써 헤어지고도 남았지.’

하나 그 사달을 겪고도 이렇게 결혼하는 걸 보면, 결국은 둘 다 서로를 향한 무거운 진심을 달콤하게 여길 정도로 삐뚤어졌단 뜻이었다.

“무거운 사랑이네요.”

아스가 솔직히 말했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그 질척하고 음험한 것을 ‘사랑’이라고 명명해 줬다.

“역시 정상은 아닌 걸까…….”

노아도 인지하고 있었는지 말끝이 살짝 흐려졌다.

“애초에 정상적인 사랑이 있겠어요?”

아스는 조금 전 클라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범죄 수준만 아니라면, 서로 좋다며 들러붙는 게 무슨 잘못이에요. 두 분의 사랑도 결국 수많은 사랑 중 하나인 거죠.”

“들러붙는다니…….”

꽤 노골적인 표현에 노아가 얼굴을 붉혔다.

“어쨌건 주의하세요.”

아스가 당부한 건 딱 하나였다.

“아가씨 앞에서는 각별히 조심하시고요.”

“알았어.”

“그리고 제 앞에서도 자제하시고.”

아스는 저의 정신 건강도 미리 챙겨둘 필요를 느꼈다.

방문을 닫고 나온 둘은 거실로 갔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레토는 읽던 책을 치웠다. 클라레가 읽고 내버려 둔 동화책이었다.

“그런데 두 분.”

아스가 돌연 물었다.

“상견례는 안 하세요?”

결혼 전에 양가 어르신들께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려던 아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

“…….”

아무 말 없는 노아와 레토를 보자마자 알았다.

“…제가 벌써 머리가 아픕니다.”

저 둘은 정말 결혼 말고 생각해 둔 게 없었던 모양이다.

“하고픈 말이 있는데, 그건 안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스는 저 대신 이 말을 대신해 줄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뭐 이런 등신들이 다 있냐.”

주말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아미는 한심하단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친구를 바라봤다.

“역시 너랑 중장님은, 불세출의 등신들이었어.”

불세출의 천재고 인재니, 명예로운 가칭이 아까울 정도였다.

“…….”

대꾸할 말이 없는지, 노아는 묵묵히 개인 함선을 몸에 착용할 뿐이었다.

도합 40kg인 함선 부품을 몸에 착용하는 움직임엔 어떤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보호구를 착용하는 것과 비슷한 동작이었다.

“아스 언니 속 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마찬가지로 개인 함선을 착용한 아미가 한숨을 푹 흘렸다.

“그래서, 부모님한테 연락했어?”

“어제 연락드렸어.”

“뭐라셔?”

“엄마는 연락 참 일찍도 한다고 비꼬고, 아빠는 우셨지.”

“욕 안 먹은 게 천만다행인 줄 알아라.”

준비를 마친 둘은 대원들이 모여 있는 갑판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함 대원 전원이 개인 함선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럼 중장님 쪽은? 오케아누스 후작님한테 연락…….”

“거기!”

잡담은 이제 그만하란 묵직한 호령이 떨어졌다.

노아와 아미를 비롯한 대원들이 입을 다물고 열중쉬어 자세로 앞을 응시했다.

열 맞춰 정렬한 대원들을 가볍게 훑은 아이스 중령은 준비됐다고 판단했는지 한쪽으로 몸을 비켜섰다.

물러난 그 자리엔 레토가 있었다.

검푸른 함정복 위에 개인 함선을 착용한 그는 거센 파도에도 끄떡없는 커다란 돌섬처럼 장대한 기골을 자랑했다.

“뉘 집 신랑인지 몰라도 듬직하네.”

노아는 희롱하는 제 친구의 오금을 살짝 찼다. 아미가 입술을 꽉 깨물며 신음했다.

“오늘은 단체 운항을 연습한다.”

레토가 오늘 훈련을 설명했다.

“본 함에서부터 지정된 곳까지, 20해리를 10노트로 유지하며 항해한다.”

그러곤 갑판 너머를 바라봤다. 파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파도가 지랄 같군.”

비아냥거리는 거친 말투는 대원들의 속마음을 대변했다.

사실은 저것도 아주 순화된 말투였다.

‘X발, X 같은 파도 같으니…….’

‘하늘은 화창한데 파도 넌 왜 지랄이냐……!’

‘이놈의 군대는 기상 사정으로 일정 취소도 안 하나.’

‘X발, X발, 시X, X발…….’

특함 대원들은 미친 듯이 흔들리는 갑판에서 용맹한 표정으로 무장한 채 배멀미를 참는 중이었다.

“우욱, 시…….”

그 와중에 참지 못하고 속내를 터트린 용자도 있었다.

“로간 미타스 상사. 속이 안 좋으면 좀 쉬지 그러나.”

바닷속에서 말이야.

레토의 상냥한 제안에 로간 미타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레토는 마저 말했다.

“조금 전에 근방 해안에서 파랑 주의보가 내려졌다. 이쪽도 점점 파도가 올라갈 테니, 훈련하기엔 아주 제맛인 거 같군.”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선두가 휘청거렸다.

조금 전까지 오기로 버티던 대원들도 하나둘씩 표정을 일그러트리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노아 혼자만 무던히 제 속내를 감췄다.

그런 노아를 빠르게 살피던 레토 역시 제 걱정을 서둘러 지웠다.

지금부터는 상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전원 앞으로!”

레토의 호령에 대원들이 갑판 앞에 섰다.

“이깟 파도로 죽지 마라.”

죽으면 너희 명의로 차곡차곡 쌓이던 퇴직 연금과 위로금을 해군 발전 기금으로 사용하겠다는 레토의 협박은 아주 잘 먹혔다.

배멀미로 죽상을 쓰던 대원들의 얼굴에 악의가 차올랐다.

악의는 훌륭한 원동력이었다.

곧 레토가 구호를 외쳤다.

“출항!”

높은 파도에 몸을 던지는 군인들의 동작에 망설임은 없었다.

***

“나 정신적 외상 입을 거 같아…….”

“우욱, 듣는 것만으로도 멀미 나니까 말하지 마……!”

“히히……! 파도가, 그렇게 높을 수 있었군요…….”

“…….”

“…병장님이 숨을 안 쉽니다!”

“죽게 내버려 둬. 그게 동료애다.”

“그럴 순 없습니다! 이분만 천국으로 도망치게 둘 순 없습니다!”

“호네스 메라 일병, 진정한 군인이 다 되었군.”

나만 X될 수 없다는 정신을 드디어 각인했구나.

감동한 아미가 코 밑을 손가락으로 쓸다가 냉큼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올라오는 것들을 해방했다.

밑에서 기겁하는 비명이 들렸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미를 말릴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 파도가 심하긴 하군.”

항해실에서 함장과 의논 중인 레토의 안색도 파리했다.

“계속 이러려나?”

“한동안 바람이 거셀 겁니다. 남부의 봄은 늘 이러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것과 관련된 동화책을 본 적 있군.”

지난 주말에 클라레의 동화책에 딱 이런 내용이 있었다.

바다의 여신이 남부 사람들을 위해 봄을 선물했다.

질투 많은 바람이 봄을 빼앗으려고 쫓아가지만, 저 때문에 몸집이 커진 파도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덕분에 봄은 무사히 남부에 도착했다.

“저희 딸도 좋아하는 동화책입니다.”

지도를 보던 중령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그래도 예정된 날짜 전에는 파도가 잠잠해질 겁니다. 장군님이 매년 출항하실 때는 바다가 좋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장군님을 믿는 수밖에 없나.”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이 바다를 앞서 읽는 건 여전히 무리였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문제를 조금 더 논의한 뒤에 레토와 아이스 중령이 항해실을 나왔다.

“이번 행사에 아드벨로와 오케아누스가 여객선을 하나 빌렸다고 합니다.”

“마레이 학교 아이들을 초대했다지?”

레토가 온풍이 부는 마도구 앞에서 손을 비비며 말했다.

“후작님께 연락받았어.”

“아마 오늘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알려 줄 겁니다.”

집에 돌아가면 그 이야기를 제게 떠들며 자랑할 센샤를 떠올리니, 아이스 중령은 벌써부터 퇴근이 간절해졌다.

그건 레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처제도 좋아하겠군.”

“그러고 보니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

레토는 반사적으로 ‘중령이 그리 신경 써 준다고 해서 내야 할 축의금이 사라지진 않지.’라고 비꼬려던 제 입을 꾸욱 다물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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