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245)

32.

“좁은 집 사는 사람이 들으면 서운할 말 하지 마.”

등을 가볍게 쓸며 타박한 노아는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른들은 가구를 비우고 허전해진 방을 쓸고 닦았다.

클라레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잘한 쓰레기들을 주워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네 사람이 힘을 합치자 청소는 정오 즈음에 무사히 끝났다.

“와아!”

클라레가 깨끗해진 빈방을 빙글빙글 쏘다녔다.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치?”

“그러게 말이에요. 험한 물건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새끼도 클라레 눈치는 봤나 봐.”

“꼴에 양심은 있었네요.”

레토는 이전 방 주인을 욕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역시 오빠라는 인간이 어지간히 골칫거리였던 모양이었다.

“아스, 나 배고파…….”

클라레가 살짝 줄어든 올챙이배를 통통 두드렸다.

“그럼 밖에서 먹을까요?”

무릎을 굽혀 앉은 레토가 클라레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외식 소리에 클라레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외식! 발레나!”

“발레나?”

“아가씨가 좋아하는 식당 이름이에요.”

거기서 파는 해산물 피자와 스테이크가 유명하다고 아스가 설명해 줬다.

“그리고 어린이 손님에겐 매달 바뀌는 선물을 주거든.”

노아가 이번 달 선물이 식칼토끼와 협업한 인형이라는 핵심 정보를 빠르게 알려 줬다.

“그럼 거기로 가야겠네.”

클라레의 볼살이 눈 밑을 찔렀다.

“네가 사는 거야?”

노아도 살짝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지. 방 청소를 도와줬는데, 내가 사야지.”

“들었지, 클라레? 형부가 사 준대.”

“형부 고마워요!”

“가기 전에 식당에 전화 한번 해 볼게요.”

거실로 가 식당에 확인 전화를 걸고 온 아스가 말했다.

“마침 딱 네 자리 났다고 하네요. 예약했어요.”

먼지 묻은 옷을 갈아입은 뒤, 네 사람은 차를 타고 시내로 내려갔다.

“요 며칠 날씨가 계속 좋네.”

레토가 뒷좌석에 앉은 클라레에게 물었다.

“처제, 하늘 보면서 달리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요?”

“이렇게 말이야.”

노아가 검은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차체를 덮었던 지붕이 뒤쪽으로 천천히 접히기 시작했다.

“와아! 와아아!”

“세상에, 저것 좀 보세요!”

클라레와 아스의 눈에 푸르른 창공이 담겼다.

“아스, 하늘이야! 지붕이 하늘이 됐어!”

“바람도 엄청나네요. 이런 거 처음이에요.”

“형부 아저씨 대단하다! 엄청나!”

이렇게 재밌고 즐거운 게 있다니!

감동한 클라레는 손뼉까지 치며 대단하다고 환호했다.

조그만 몸을 지켜 주는 안전띠만 아니었다면 당장 일어나 방방 뛸 정도로 흥분했다.

“자주 태워 줘야겠네.”

레토는 룸미러 너머로 비치는 클라레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발레나 식당에 도착한 네 사람은 이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해산물 피자와 스테이크, 샐러드와 파스타를 시켰다.

그리고 음료는 과일 꿀을 넣은 탄산수로 통일했다.

“어린이 손님께 드리는 발레나의 선물입니다.”

주문을 받은 남자 종업원이 손가락만 한 식칼토끼 인형을 줬다.

식칼토끼는 발레나 식당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두 분.”

아스가 인형 봉투를 뜯으며 노아와 레토에게 물었다.

“결혼은 언제 하실 거예요?”

“빨리하면 좋겠다!”

“처제도 그렇게 생각해?”

마음이 통했다며 레토가 감격했다.

노아는 덩치 산만 한 인간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꼴을 보자니 꽤 귀여워서 마음이 흐뭇해졌다.

정작 아스는 좀 아니다, 싶었는지 눈을 휙 돌렸다.

“하긴, 날을 정하긴 해야지.”

잠시 고민한 뒤, 노아가 제 생각을 말했다.

“나도 이왕 말 나온 거 빨리하면 좋을 거 같아.”

“봄 가기 전에 하는 건 너무 빠를까?”

레토가 물었다.

그러나 아스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벌써 4월이 절반이나 지났는데.”

밖은 완연한 봄이었다.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해도 봄 안에 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결혼식장도 잡아야 하고, 작은 주인님이 입으실 드레스도 맞추려면 몇 달이 걸릴 거예요. 거기에 맞춰서 장신구랑 신발에, 화장과 머리를 해 줄 전문가도 찾아야 하고…….”

“빨라도 가을일까요?”

“그러면 일단 혼인 신고를 먼저 하는 게…….”

클라레는 제 앞에 덜어진 스테이크를 오물거리며 어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결혼은 어려운 거구나.’

오늘도 그렇게 새로운 지식을 배워 가던 중.

“근데 형부 아저씨.”

궁금한 게 생긴 클라레가 질문했다.

“형부는 귀족이잖아요.”

“일단 그렇죠?”

양자이긴 하지만.

레토는 그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새 스테이크를 다 먹은 클라레의 빈 접시에 피자를 덜어줬다.

“그러면 돈으로 뭐 못 해요?”

“클라레.”

깜짝 놀란 노아가 나무라듯 이름을 불렀다.

“그치만 센샤 네 고모가 그랬는걸…….”

살짝 억울해진 클라레가 서둘러 변명했다.

“귀족들은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줄 안다고 그랬어. 얼굴도 변변찮은 것들이 꼭 그렇게 설친다고 했어.”

“오늘 집에 가면 그 언니한테 전화 좀 해야겠네.”

내 동생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노아가 치미는 짜증을 가까스로 억누르던 때였다.

“…그러네?”

내가 왜 저 생각을 못 했지?

잠자코 듣던 레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우리 처제는 천재야……!”

감동한 레토는 클라레의 머리에 입술을 쪽 맞췄다.

피자 먹다가 뽀뽀 당한 클라레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돈으로 하면 되지.”

“그 발언은 좀 재수 없는데?”

노아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데?”

레토가 멋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려 보려고.”

귀족의 재력이란 걸.

***

식사를 마치고 언덕 위 저택으로 돌아온 레토는 곧장 전화를 빌렸다.

물론 클라레의 명령대로 깨끗하게 손을 씻은 뒤에 말이다.

“누구한테 전화하는 걸까요?”

아스가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

“글쎄, 귀족의 재력을 쓰겠다고 한 걸 보면 오케아누스 후작님이나 관련된 분이 아닐까?”

“으음…….”

“왜 그래?”

“혹시 저분은, 그, 아직 모르시나요?”

질문의 뜻을 눈치챈 노아가 입꼬리를 빙그레 올렸다.

“…짓궂으셔라.”

아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저놈이 내 속을 얼마나 썩였다고.”

“일종의 복수라는 건가요?”

“복수는 무슨.”

그렇게 거창한 이유 따위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노아는 여전히 통화 중인 레토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기특하잖아.”

저랑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 난 모습이.

“날 저렇게 좋아하면서, 여태 아닌 척했다니…….”

하여튼 얄미워 죽겠다고 말하는 것치곤, 노아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

그 모습을 본 아스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저 인간, 자기가 귀족인 걸 썩 달가워하지 않거든?”

노아는 연애하던 때에도 그가 물질적인 부유함이나 계급적 권위를 과시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오히려 자신은 양자란 사실을 본인 스스로 강박적으로 상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레토가 저와 서둘러 결혼하려고 귀족의 힘을 쓰려고 한다.

“하아…….”

저걸 어쩌면 좋을까.

레토의 등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옅은 어둠이 깔렸다. 눈꺼풀을 천천히 내려지면서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늘을 만든 탓이었다.

“…….”

아스는 뭐라고 대꾸하는 대신에 자리를 벗어났다.

아까 먹은 점심이 얹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바람 좀 쐬려고 발코니로 가니, 클라레가 식당에서 받았던 식칼토끼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응?”

기척을 느낀 클라레가 아스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왜 그래?”

클라레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아스의 손을 잡았다.

“체했어?”

“아니요, 조금 답답해서요.”

별일 아니라며 웃어넘긴 아스가 클라레 옆에 앉았다.

“혹시 언니가 괴롭혔어?”

“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집 안이 답답해서 나온 거예요. 오늘은 날이 좋잖아요.”

하지만 아주 조금 비슷한 일을 겪어서 힘들었다.

“있잖아, 아스.”

그때, 클라레가 물었다.

“사랑은 뭘까?”

“네?”

“예전에 할머니가 그랬잖아.”

클라레가 손에 든 식칼토끼 인형을 아스의 턱에 뽀뽀하듯 가져가 댔다.

“사람이 많은 것처럼, 사랑도 엄청 많대. 그래서 이거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댔어.”

“큰 주인님이 멋진 말씀을 하셨네요.”

“할머니는 똑똑하거든!”

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맞지…….’

사랑에 대한 정의는 사람의 수와 비례했다.

이 넓은 세상에 어찌 정형화된 사랑이 있을까.

그러니 조금 전에 봐 버린 노아의 모습도, 수많은 사랑의 종류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충격인 걸 어떡해…….’

아까 본 노아는 제가 알던 노아가 아닌 거 같았다.

찰나였지만, 분명 봤다.

그늘이 졌던 푸른 눈에 비쳤던 애정은 동화처럼 포근하고 산뜻한 게 아니었다.

한 번 빠지면 못 나오는 늪처럼, 사랑이라 형용하기엔 어둑하고 끝이 보이질 않는 뭔가였다.

“근데…….”

부르는 소리에 아스가 잡념에서 벗어났다.

“언니랑 아저씨는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지?”

“물론이죠.”

“그치만 언니랑 아저씨는 얼마 전까지 엄청 싸웠잖아. 언니가 엄청 화내고, 술 마시고 아저씨 욕도 했잖아.”

“…….”

아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래서 어린애 앞에선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고 했나 보다.

확실히 두 사람이 이 집에서 보여 준 건 난장판 그 자체였다.

“…아가씨는, 두 분이 결혼하는 게 싫으세요?”

“으으응.”

도리도리, 클라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저씨가 우리랑 같이 사니까 괜찮아. 만약에 센샤 네 고모처럼 멀리 가면 좀 싫었을 거야.”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으음, 그래도 결혼한 뒤에도 그렇게 싸우고, 그러다가 언니가 또 슬퍼서 울면 어떡해?”

“세상에, 아가씨…….”

아스는 클라레를 포근히 안아 줬다. 사려 깊은 아가씨는 제 언니가 슬퍼하고 아파했던 날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저희가 작은 부군을 혼내 주죠!”

아스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큰 주인님이 가르쳐주신 게 있잖아요.”

“설득! 설치기 전에 득달같이 팬다!”

클라레도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작은 부군을 혼낼 때, 이 주먹의 이름은 ‘다정’이 될 거예요.”

“다정? 다정하게 패는 거야?”

“‘다구리는 정의’라는 뜻이에요.”

“오오!”

뭔 뜻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클라레는 마냥 해맑게 꺄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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