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중령이 뭐래?”
퇴근하는 길.
레토가 운전하는 붉은 애마는 바다 너머로 지는 석양에 물들어 더욱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결혼 축하한다고.”
차가 해군 본부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노아가 반말로 대꾸했다.
레토는 제게 편하게 말해 주는 노아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입꼬리를 올렸다.
“그 이야길 널 따로 불러서까지 한다고?”
하지만 노아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까지 믿지는 않았다.
“너 있는 데서 하긴 부끄러웠나 보지.”
“오늘 볼트리아 교장이 왔던데.”
볼트리아 중장이 근무하는 해군 사관 학교는 오케아누스 영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샤프 영지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 아저씨가 본부에 올 이유가 없는데 말이지…….”
“너도 모르는 볼일이 있었던 거 아냐?”
“그러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
“잊으셨나요, 신부님?”
아드벨로 대장이 자리를 비운 지금, 현재 해군 내 서열 1위는 레토 오케아누스였다.
그리고 볼트리아 중장은 그의 부관이었고.
“본부에 많이들 왔더군.”
“…….”
“오린 준장에 클라리스 소장, 거기에 평소 잘 보이지도 않는 키르코 준장까지…….”
“그래, 나 보러 오신 거야.”
됐냐, 이제?
얄밉다는 뜻으로 눈을 가볍게 흘기면, 레토는 또 그저 좋다고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
노아는 그런 레토를 말없이 바라보다 한숨을 짧게 흘렸다.
“…무슨 소리라도 들었어?”
레토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히려 반대야.”
좌석에 몸을 편히 기댄 노아는 오늘따라 유난히 강한 석양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옆을 보니, 레토도 석양빛 때문에 고생하는 듯했다. 그는 한 손으로 눈 주위에 그늘막을 친 채로 운전 중이었다.
“눈부시면 말하지.”
노아가 팔을 살짝 뻗어 운전석 햇빛 가리개를 내려 줬다.
“미련스럽게 왜 참고 있어.”
“어차피 조금만 더 가면 금방 시내잖아.”
레토는 그제야 눈 위에서 손을 치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참지 마.”
노아가 살짝 힘줘 말했다.
“잘못하면 사고 날 수 있다고. 이 정도는 나한테 부탁해도 돼. 뭐 어려운 일이라고 참고 그래.”
“아니 뭐 이런 거로…….”
“이런 게 아니야!”
순간 욱해 버린 노아가 언성을 높였다.
“…….”
놀란 레토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아차 한 노아는 안전띠를 두 손으로 꽉 쥔 채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큰소리 내서 미안.”
잘 달리던 차는 이내 갓길에 멈췄다.
“노아.”
레토가 손을 뻗어 노아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순순히 고개를 돌려 준 노아가 물었다.
“…네가 그때 말했던 거 기억해?”
“뭘?”
“‘난 안 좋은 쪽으로 인기가 많아서’라고 했잖아.”
“아…….”
떠올랐다.
노아에게 결혼 축하한다면서 질척이던 망할 애새끼들이 계속 눈에 띄어서 심기가 불편했단 날.
질투심에 인기 많다고 말했더니, 노아는 네가 더 인기가 많다고 대꾸했었다.
그 말을 들었던 레토는 자조했다.
그때 했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살짝 휘어진 붉은 눈동자는 체념하는 듯한 눈웃음이었다.
“원래 잘난 놈에겐 늘 시샘이 따라붙지. 나름 명예로운 훈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부정하진 않아.”
노아는 없는 말을 꾸며 할 만큼 상냥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레토를 둘러싼 현실은 달콤한 거짓으로 위로할 만큼 녹록지 않았다.
“레토 네가 안 좋은 쪽으로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하지만 좋은 쪽으로도 인기가 많아.”
노아는 레토의 눈을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오늘 뵈었던 분들 다, 너를 걱정했어.”
자신들의 어린 전우를 향한 그분들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노아는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네가 또 혼자서만 힘든 거 껴안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일로 서운하더라도 서로 믿고 의지하라고 말했어.”
“그 사람들이?”
레토가 의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단어랑 어투를 조금 변형하긴 했어.”
노아는 뇌 내 검열을 인정했다.
“하지만 널 걱정한 건 진짜야.”
그리고 아직 말하지 않은 진심 하나가 더 있었다.
“중령님이 나보고 널 잘 부탁한대.”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는지, 운전대를 쥔 레토의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동그래진 눈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노아는 아이스 중령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번에는 검열 따위가 필요 없었다.
“저 혼자 견디는 못된 습관이 있지만, 그것도 결국 주변 사람을 아끼는 이타심에서 나오는 거야.”
“답답할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그분의 행동을 생각해 주게. 정작 자기를 위할 때가 별로 없는 사람이잖나.”
“미련스럽게 착한 분이야.”
“그분과 함께해 줘서 정말 고맙네.”
“레토.”
노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뭐랬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노아는 한쪽 입꼬리를 짓궂게 올리며 피식댔다.
유난히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날이었다. 붉은 애마 안으로도 석양빛이 한가득 침범해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넌 인기 많다니까.”
“하아…….”
레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채 가려지지 않은 귀와 목은 뻘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넌 진짜 날 어쩌려는 거야…….”
“뭘 어째.”
어느새 뻗어진 노아의 손이 레토의 귀를 살짝 건드렸다.
“사랑하는 거지.”
레토는 이제 심장이 쾅쾅 튀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너 이런 애 아니었잖아.”
도저히 운전할 정신이 아니라, 레토는 아예 차 시동을 껐다.
이 상태로 운전했다간 혈기를 못 참고 속도를 낼 것 같았다.
“어쩌자고 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노아가 코웃음을 치며 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치웠다.
“사랑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한 것뿐인데.”
“그러니까 그게……!”
바로 그 점이 문제라고 따지려던 레토가 멈칫했다.
“아니, 뭐, 문제는 아닌데…….”
호기롭게 지적하려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노아는 그가 손으로 가린 입가 근육이 씰룩거리는 걸 쉽게 알아챘다.
지켜보던 노아가 툭 던지듯 물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 좋아 죽겠어?”
“진짜 죽을 거 같아서 죽을 거 같아…….”
“나도 그런 마음으로 기다렸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레토의 표정이 빠르게 식어 갔다.
정작 노아는 별일 아니란 투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갑자기 이러는 게 아니야.”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레토가 마음에 걸려 눈길이 갔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드디어 네 마음에 확신이 생겼으니 말할 수 있는 거야.”
“…….”
“솔직히 그동안은 좀, 나 혼자 일방통행이었잖아.”
“응…….”
레토는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좀 많이 쓰레기였네.”
“쓰레기까진 아니었어.”
그렇게까지 말하진 말라며 노아가 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 뒤로는 화가 나서 너한테 내 진심을 최대한 안 보이려고 했었고.”
결국 피차일반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참 삭막한 관계였다.
사랑한다는 고백조차 없이, 달콤하고 다정한 애정의 교환도 없이 참 오래도 버티었다 싶고.
“…잘도 안 헤어졌네.”
마찬가지로 같은 생각이었는지, 레토는 씁쓸한 눈빛을 띤 채로 앞을 보고 있었다.
자신들 말고 아무도 없는 해안도로에는 붉은 석양빛 위로 어스름한 밤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도 그렇게 어둑해져 갔다.
“넌 왜 이런 머저리를 사랑한 거야.”
“그러니까 말했잖아. 내가 호구라고.”
“사랑스러운 호구지.”
“그리고 이것도 꽤 괜찮지 않아?”
노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눈꺼풀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레토는 무슨 뜻인지 몰라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애 소설 주인공이 된 거 같잖아.”
“뭐?”
상상도 못 한 대답에 레토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너 그런 것도 읽어?”
“돌고 돌아 어긋나던 연인이 이윽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지는 거, 낭만적이잖아.”
“낭만이라…….”
레토는 초콜릿 먹듯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봤다.
“…다네.”
그러곤 다시 차 시동을 걸었다.
부릉, 하고 살짝 흔들린 차는 곧 부드러운 진동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나의 아가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로 달콤한 연애를 한 것 같습니다.”
“비꼬는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십니다?”
“비꼬는 게 아니라…….”
레토는 기어를 잡는 대신에 노아의 볼을 감싸듯 쥐었다.
그리고 저의 사랑이 이끄는 곳으로 기꺼이 몸을 기울였다.
“분발하려는 거야.”
못했던 만큼.
붉은 석양과 푸른 밤이 섞여 한데 합쳐지듯, 레토와 노아의 입맞춤 역시 그렇게 서로를 깊이 머금으며 놓지 않으려 했다.
체티 사의 자랑인 붉은 애마는 도로 위 가로등이 켜질 때에야 다시 달릴 수 있었다.
***
“그럼 동시에 들어요.”
“셋까지 세면 들자. 하나, 둘…….”
“셋!”
클라레의 깜찍한 구호와 함께, 침대 매트리스가 번쩍 들렸다.
“파이팅! 파이팅!”
힘찬 응원을 받으며 옮긴 매트리스는 대문 바깥에 놓였다. 그곳엔 매트리스 말고도 여러 가구가 쌓여 있었다.
“대형 가구는 버리는 것도 돈인데…….”
아스는 쌓여 있는 가구들을 보며 퍽 아쉬운 듯이 말했다. 머릿속으로는 벌써 재활용 비용을 계산 중이었다.
“그러면 그냥 제가 쓸까요?”
레토가 먼지 묻은 손을 가볍게 털며 물었다.
“아니에요. 새 가족이 오는데, 당연히 새 걸 사야죠. 어차피 작은 부군께서 혼수로 가져오시는 거잖아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 것도 살 때 주문할 테니.”
“어머, 화통하셔라!”
“언니, 화통이 뭐야?”
“돈 잘 버는 호구를 칭찬할 때 쓰는 말이야.”
“어른의 말이구나.”
오늘 벨로 사람들은 레토가 쓸 1층 방을 치우는 중이었다.
가출한 오빠가 쓰던 방이지만, 가족들의 만장일치 하에 원래 주인을 없는 놈 취급하고 새로운 식구를 위해 청소하기로 했다.
“제법 넓네.”
레토가 가구를 전부 빼낸 방을 보며 말했다.
“원래 쓰던 방보다는 좁지 않아?”
옆에 선 노아가 물었다.
“사람 사는 방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야.”
“좁단 뜻이구나.”
레토가 현재 사는 곳은 샤프 영지 외곽에 있는 오케아누스 가문의 별장 저택이었다.
해군 본부로 가는 해안도로 위 언덕에 있는 커다란 저택은 출퇴근할 때마다 눈이 가는 곳이었다.
“넓다고 다 좋나, 뭐.”
오히려 쓸데없이 넓어서 쓸쓸할 뿐이라며 레토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