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245)

29.

“중장님.”

피스트 준위가 상석에 앉은 레토에게 말했다.

“예상되는 날짜는 다음 달 초로 예상됩니다.”

“구체적인 날짜는 안 나온 건가?”

“아무래도 장군님 의지에 달렸지 않겠습니까? 보고에 의하면 장군님의 부대원 수가 늘어서,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음…….”

레토는 테이블 위에 불량스럽게 올린 한쪽 팔로 턱을 괸 채였다.

입고 있는 시커먼 함상복은 해군 내에서 가장 멋없는 군복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단련된 체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의 옷맵시를 보면, 중요한 건 얼굴과 몸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된다.

“…눈 빠지겠다.”

그런 레토를 아까부터 계속 바라보던 노아를, 아미가 킥킥거리며 놀렸다.

“회의 핑계로 아주 막 본다?”

“시끄러워.”

웃으며 핀잔하는 노아의 말투에 부정은 없었다.

때마침 레토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한번 가 볼까?”

뜻을 알아챈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해 두겠습니다.”

“좋아.”

레토는 자세한 사항이 내려올 때까지 몸조심하란 말을 끝으로, 회의를 파했다.

“벨로 대위.”

회의실을 나온 노아를 누군가가 불렀다.

먼저 회의실을 나갔던 아이스 중령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지금 시간 되나?”

“조금 전에 중장님이 명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만, 그것 말고는 당장 급한 것은 없습니다.”

특함의 업무는 큰 변동이 없는 한, 매일 거기서 거기였다.

훈련이 끝나면 각자의 서류 작업. 아니면 서류 작업이 끝나고 훈련. 그리고 개인 함선을 타고 해양 순찰.

당직엔 야간 해양 순찰까지.

“대위가 오늘 순찰 번이었나?”

“아닙니다.”

“내 그럴 줄 알고 오늘로 날을 잡았지.”

아이스 중령은 능청스레 웃었다.

노아는 그 모습이 그의 젊은 상관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점심 먹고 나면 대회의실로 잠깐 오게.”

“알겠습니다.”

“뭐 이상한 건 아니야. 대위도 나 알잖아. 내가 우리 딸 걸고 맹세하는데 절대 위험하거나 수상한 거 아니야.”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레 혼자 찔린 아이스 대령이 허허 웃으며 노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복도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노아는 애먼 목덜미를 쓸었다.

‘뭐지?’

아이스 중령과는 특함에 배속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의 막내딸인 센샤가 클라레와 소꿉친구라서, 이미 보호자끼리 안면을 트고 있었다.

“…나오셔도 됩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향해 노아가 말했다.

그러자 왼쪽으로 꺾인 복도에서 은발의 건장한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령이 뭐래?”

노아는 저를 향해 웃어 보이는 상관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점심 먹고 대회의실로 잠깐 오라고 했습니다.”

“수상한데…….”

레토는 은근슬쩍 노아의 뒤에 서서 허리에 팔을 르고는 금발 위에 얹은 턱을 아기 새처럼 비비적거렸다.

“수상할 것도 없습니다.”

무거울 법도 하건만, 노아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레토는 조금 더 용기 내어 이마에 입술을 쪽 맞췄다.

결국 노아가 팔을 뻗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군 내에선 공사 구분하십시오.”

“뽀뽀 받을 거 다 받고 그리 말해 봐야 안 먹혀.”

그래도 레토는 순순히 물러났다. 허리에 두른 팔도 풀었다.

하지만 거리를 두기는커녕, 오히려 노아의 앞에 떡하니 섰다.

“예비 신부께 선약이 생기다니, 슬프군. 그것도 남자랑 말이야.”

“아이스 중령님이 들으면 억울하실 겁니다.”

아이스 중령은 본부 내에서도 유명한 애처가이자 딸바보였다.

현재 그의 최대 관심사는 막내딸이 군인이랑 결혼하는 걸 어떻게든 막아 내는 것이었다.

“그래도 질투 나는 걸 어떡해.”

레토가 노아의 손을 잡고는 그네 타듯 붕붕 흔들었다.

의지 없이 흔들리는 제 팔을 빤히 보던 노아가 피식 웃었다.

“공사 구분하라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하여튼 깐깐하다니까…….”

레토는 나머지 손을 뻗어 그녀의 옆머리를 정리했다.

“그래도…….”

삐져나온 옆머리를 붉어진 귀 뒤로 넘기는 손길이 더없이 신중했다.

“귀는 참 솔직해서 귀여워.”

상체를 슬쩍 숙이며 귓불에 입 맞춘 레토의 붉은 눈동자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노아를 응시했다.

“내가 우리 대위님의 둥근 귀가 사랑스럽다고 말한 적 있나?”

“…….”

노아는 손으로 귀를 가렸다.

손바닥 안으로 그새 차오르는 열이 원망스러웠다.

***

점심시간이 되자, 레토는 노아에게 당부했다.

“아이스 중령이 헛짓거리할 기색을 보이면 죽여.”

밥 먹으러 나가려던 아이스 중령이 입을 쩍 벌렸다. 사색이 된 그의 손에는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중령님은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닙니다.”

“수상쩍다 싶으면 그냥 죽여.”

“아군을 살해하는 건 중범죄입니다.”

“괜찮아. 내가 정당방위로 만들어 줄 테니까.”

나 믿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당부하는 레토의 모습은, 노아가 여태 본 것 중 가장 신뢰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짜 이놈이랑 한평생을 살아야 하나.

‘…살 순 있지.’

안타깝게도 현재 노아의 양쪽 눈에는 엄청난 두께의 콩깍지가 몇 겹으로 씐 상태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래. 난 중령이랑 식사할게.”

“예? 아니 잠깐, 저는 혼자 식사할……!”

대위! 벨로 대위!

노아는 뒤에서 저를 애타게 외치는 아이스 중령의 애원을 못 들은 척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따라 나온 아미와 셀린이 물었다.

“중령님 왜 저러신대?”

“또 중장님 없는 데서 뭐 욕했나?”

“나도 몰라.”

플랜시 소장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물러났어도, 병영식은 아직까진 품격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거기 갇혔다며?”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던 셀린이 말했다.

“오늘 새벽에 호송차 한 대가 ‘검은 건물’에 세워진 걸 본 사람들이 있대. 벌써 소문 다 났더라.”

‘검은 건물’은 해군 본부에 있는 검은색 단층 건물을 말한다.

군이라는 특성상, 관련자 이외의 접근을 통제하는 구역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개인 함선이 보관된 그 허름한 창고 역시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건 검은 건물이었다.

“소문으로는 거기서 고문한다며?”

아미가 검은 건물과 관련된 괴담 하나를 꺼냈다.

그 말에 셀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문은 법적으로 금지잖아.”

“셀린 이건 아직 애구먼. 법적으로 금지니까 저런 데서 몰래 숨어서 하는 거야.”

“하긴…….”

노아도 아미의 음모론에 살짝 편승했다.

“지금 그 인간, 영창에 없잖아.”

본부 내 구금 시설에 감금되었다고만 알려졌지, 실제로 영창에 있단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거야 그렇지만…….”

셀린이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군 내부에서 떠도는 음모론에 휘둘리기 싫단 의지가 다분했다.

“…소문에 휩쓸려서 좋을 게 없지.”

사실 노아도 셀린과 같은 마음이었다.

“확인된 것도 없는데 괜한 추측을 떠드는 건 불필요한 짓이야.”

“내 말이 그거야!”

“뭐야. 노아 너 아까 내 편 들어 주는 거 아니었어?”

“편을 든 게 아니라, 가능성을 이야기한 거지.”

노아는 후식으로 남긴 샐러드 속 토마토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애초에 검은 건물이 무슨 용도인지도 모르잖아. 괜한 억측은 화를 불러일으킨다고.”

“팍팍한 군 생활에 이런 말을 하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그게 군이라는 거야. 무엇보다 입을 조심해야 하는 곳.”

어느새 식사를 다 마친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가 볼게.”

“왜? 호출?”

“중령님이 아까 불렀거든.”

“그래서 중장님한테 잡혔던 거구나.”

“나중에 봐.”

식당에서 나온 노아는 아이스 중령이 말했던 곳으로 향했다.

본부 건물 내에 있는 대회의실.

문을 두드리기 전, 노아는 문 너머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집중했다.

‘…사람이 좀 있는데?’

아이스 중령 한 사람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외에도 다수가 있는 듯했다. 얼추 짐작해도 대여섯은 되어 보였다.

“실례합니다.”

숨을 가다듬은 뒤.

“노아 벨로 대위입니다.”

곧 안에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스 중령의 음성이었다.

“들어오게.”

하지만 정작 안에 들어온 노아를 반긴 건 다른 사람이었다.

“…….”

노아는 회의실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말을 잃었다.

“오랜만일세, 벨로 대위.”

붉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반겼다.

비어 있는 상석 좌측에 앉은 그의 소매를, 노아는 빠르게 살폈다.

두꺼운 금테 위로 간격을 조금 띄운 중간 두께의 금테 두 줄.

그 위에 수놓아진 독수리와 커다란 돛.

“졸업한 뒤로 처음 보는군. 2년 만인가?”

“교장님…….”

“그래, 교장이다만.”

해군 사관 학교.

그곳의 교장인 볼트리아 중장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란 뜻이었다.

“…송구합니다.”

그제야 노아는 열어 뒀던 문을 닫고, 회의실에 앉은 채로 저를 바라보는 별들께 경례했다.

“특수 함선 사령부 소속 노아 벨로.”

눈썹 위로 곱게 뻗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해군의 위대한 제독들께 인사드립니다.”

***

제독.

오로지 해군에서만 쓰이는 칭호로, 계급에 별을 단 장성급 장교를 지칭한다.

왕실 기사단과 육군에서 ‘장군’이라 불리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독자적인 호칭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제독’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은 색달랐다.

끝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를 가로지르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힘을 지닌 권력.

그게 바로 제독이었다.

정작 제독들은 바다로 출항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어쨌건 그런 분들이…….’

그토록 대단하신 바다의 별들이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노아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조금 전에 문 앞에 섰을 때도 단번에 그 기척을 알아차렸던 거다.

‘침착하자.’

노아는 제 군 생활을 빠르게 돌이켜 봤다.

스스로 근면성실했다고 자부했기에, 노아는 이 호출이 저를 지적하는 청문회 자리가 아님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짚이는 건 하나야.’

저와 레토의 결혼.

하지만 노아는 유일하게 도출된 정답마저도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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