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45)

28.

뜬금없는 이실직고에 어른들이 비죽비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꾸욱 참았다.

여기서 웃었다간 저 혼자 심각한 클라레에게 실례였다.

잠시 후 클라레의 고해성사가 시작되었다.

“언니가 잃어버린 립스틱…….”

흐뭇하게 웃던 노아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거, 내가 모른다고 했는데…….”

“…….”

“사실은, 그거, 나랑 리리랑 센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노아가 제 방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클라레 벨로!’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클라레가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식탁 아래로 쏙 들어갔다.

피신 장소는 레토의 무릎이었다.

“아저씨가 언니 상사죠? 나 좀 구해 주세요!”

“푸하하하!”

끝내 참았던 웃음이 터져 버렸다.

***

노아가 잃어버린 립스틱은 꽤 비싼 것이었다.

“이게 얼마짜린데!”

“…….”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거야!”

“그치만…….”

뒤늦은 거짓말로 따끔하게 혼이 나던 클라레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원래 애들은, 비싼 물건을 알아보고 만지는 능력을 지녔단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던 클라레는 도리어 노아를 혼냈다.

“그러게 왜 물건 간수를 제대로 안 해서, 어? 호기심 많은 어린이의 손에 닿게 한 거야.”

“이게 뚫린 입이라고……!”

“으으, 으으으!”

결국, 클라레는 양 볼이 쭈욱 늘어나는 벌을 받았다.

“손님 앞에서 혼내지 마! 창피하잖아!”

“거짓말이 더 창피한 일이야.”

“맛있는 저녁 식사로 기분 좋았는데, 조금 더 이 기분을 즐기게 해 줘!”

노아의 손에서 도망친 클라레는 레토의 품으로 피신했다.

후식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레토가 서둘러 잔을 테이블로 치웠다.

제 허벅지 위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숨긴 클라레의 천연덕스러운 넉살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저씨, 언니가 나 괴롭혀요.”

“너, 아까 분명 결혼 반대한다고 안 했어?”

어처구니가 없어진 노아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아, 맞다!”

잠시 까먹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떠올린 클라레는 냉큼 레토에게서 떨어졌다.

레토는 멀어지는 처제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분위기 좋았는데…….”

“내 동생이랑 분위기 좋아서 어쩌자는 거야.”

“설마 질투해?”

“이게 또 벌써 빠져 가지고.”

노아가 요상한 농담 말라며 그의 코를 가볍게 꼬집었다.

“기다리셨죠.”

“아스, 여기!”

클라레가 식당 정리를 마친 아스를 소파 상석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그 위의 무릎에 자리 잡았다.

“으음, 그럼.”

벨로 가문의 가장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우리 언니와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건가?”

“예, 그렇습니다.”

레토는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클라레에게 말했다.

“노아 벨로 양을 사랑합니다.”

“으음…….”

퍽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던 클라레가 제 뒤에 있던 아스에게 소곤거렸다.

“이 다음에는 뭐라고 말해야 해?”

“뭐라고 하냐면요…….”

아스가 가장의 귀에 속삭여 줬다. 레토는 수렴청정 같다는 짧은 감상을 속으로 떠올렸다.

“응응, 알았어!”

도움을 받은 클라레가 다시 말했다.

“일단 울 언니랑 어울리는 사람인지 확인해 봐야겠어.”

클라레가 제 허벅지를 팡팡 두드렸다.

“장단 좀 맞춰 줘.”

노아가 몰래 소곤거렸다.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레토는 이미 진지한 마음으로 임하는 중이었다.

“아저씨 이름은?”

“레토 오케아누스입니다.”

“직업은?”

“군인입니다. 해군 본부에서 근무 중이고, 노아의 상사입니다.”

“돈은 좀 모았나?”

듣는 순간 알았다. 저 질문은 클라레의 뒤에 있는 아스의 진짜 목적이라는 걸.

“…….”

레토는 클라레를 품에 안은 채로 선한 미소를 짓는 아스를 탐색하듯 바라봤다.

노아가 워낙 눈에 띄어서 시선이 덜 가는 거지, 아스 역시 상당한 미인이었다.

검은 머리와 흰 피부가 조화를 이루는 순박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빈틈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참 이상하지…….’

레토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평범한 사람이다. 집안일을 전담하고 여동생들을 알뜰히 살피는 가정적인 여성.

그런데 왜 그녀에게서 생사를 오갔던 7년 전 전장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걸까.

‘그만큼 내가 긴장했단 뜻이겠지.’

남몰래 호흡을 가다듬은 뒤, 레토는 준비한 또 다른 것을 꺼냈다.

“아스는 우리 집의 경제권을 쥐고 있어.”

“그럼 돈을 주면 되나? 월급 다?”

“생활비만 보태면 돼. 대신에…….”

지금 할 수 있는 건, 노아가 준 도움을 믿는 것뿐이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여 드리는 쪽이 믿음을 더욱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레토가 클라레에게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월급 명세서와 제 명의로 된 자산 목록입니다. 뒤에 있는 건 국민의 납세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다는 증거고요.”

“으음, 대단한 것이군.”

클라레는 할머니가 서류를 볼 적의 흉내를 냈다.

당연히 손에 들린 서류가 뭘 뜻하는지, 레토가 한 설명이 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

하지만 뒤에 있는 아스는 아니었다.

“세상에……!”

아스의 눈은 거의 튀어나오기 직전만큼 커졌다.

‘이게 다 얼마야!’

월급 액수도 액수인데, 레토의 명의로 된 자산 목록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근데 품위 유지비는 드리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 비용은 쓰는 만큼 영수증을 제출해야 해서…….”

레토가 양해를 부탁했다.

“아스, 왜 그래?”

클라레가 고개를 들어 아스를 올려다봤다.

“형부가 영 아닌 거야?”

“그, 그게 아니라요…….”

아스는 빠르게 계산했다.

원래 이 집에는 또 한 명의 남자도 같이 살고 있다.

방랑벽이 좀 있어서 집에 자주 머물질 않지만, 솔직히 없는 게 더 도움이 되는 웬수 같은 놈이다.

그 남자는 현재 가출 중.

만약 레토가 결혼해서 이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당장 쓸 수 있는 방은 그 남자가 쓰는 방뿐이었다.

“…….”

결론은 금방 도출되었다.

“작은 주인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처형……!”

감동한 레토가 냉큼 아스의 손을 붙잡았다.

“절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장님, 아니, 작은 부군! 가족이 된 걸 환영해요!”

“와아, 결혼이다!”

레토와 아스가 가족으로서의 미래를 약속하는 동안, 클라레는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으며 축하했다.

“…그렇게 쉽게 허락할 거야?”

좀만 더 반대해 줘.

홀로 덩그러니 남은 노아는 괜히 서운해졌다.

***

처형과 처제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레토의 앞길은 한마디로 꽃이 뿌려진 붉은 융단 길이었다.

“이왕 오신 김에 방도 한번 보세요.”

아스는 레토가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 쓰게 될 방을 미리 보여 주기로 했다.

“너무한 거 아냐?”

방으로 가는 길에, 노아가 아스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뒤를 힐끔 돌아보면, 레토는 클라레와 함께 복도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느라 조금 뒤떨어진 채였다.

그림 작품은 전부 클라레가 어릴 적부터 그린 명작 중 일부들이었다.

“이렇게 금방 저놈을 인정하면 어떡해!”

“그럼 뭐 별수 있나요?”

도리어 아스가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결혼하고 싶으니까 데려온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데…….”

“제가 반대한다고 결혼 안 하실 거예요?”

“그것도 아니지만…….”

“이 봐요.”

자신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단축한 것에 불과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차피 가족이 되실 분이면, 첫 시작을 좋게 하는 게 좋잖아요. 앞으로 한 지붕 아래서 살 사람이니.”

“…….”

“그리고 특히 이게…….”

무엇보다 아스가 흡족했던 건, 그녀가 엄지와 검지를 모아 만든 동그란 모양의 무언가였다.

“역시 사람 인품은 돈에서 나오는 거예요.”

“돈 많이 버니까 저 인간 인품이 좋다는 뜻이야?”

“제 인품이 샘솟는단 거죠. 전 이제 중장님께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상냥한 처형이 될 거예요.”

기가 막힌 노아를 내버려 둔 채, 아스가 어느 방문 앞에 멈췄다,

1층 복도 중간쯤에 있는 오크색 나무 문 앞이었다.

“여기를 쓰시면 돼요.”

“잉?”

방을 본 클라레가 물었다.

“아스, 여기는 오빠 방이잖아.”

“가출했다는 오빠?”

레토의 혼잣말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토가 전에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집안에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르고 가출했고, 잡히는 순간 이 집 최고 권력자로 추정되는 할머니에게 크게 혼날 예정이신 오빠분.

“확실히 여길 치우면 되겠네.”

노아도 방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침 잘되었죠? 한번 날 잡아서 치우려고 했는데, 작은 부군께서 장가오시면 여기를 방으로 쓰면 딱 되겠어요.”

“그럼 오빠는 어디서 자?”

클라레가 물었다.

“오빠란 사람은 이 집에 없답니다.”

아스가 웃는 얼굴로 사람 한 명을 지워 버렸다.

“자기 발로 나간 사람이잖아요. 받아 줄 이유가 없죠.”

“그러니 클라레 너도 괜한 마음에 가출하지 마. 네 방도 저렇게 없어질 수가 있으니까.”

“알았어, 언니!”

새로운 가족에게 방을 소개하는 시간은, 순식간에 가출 방지 교육으로 변해 버렸다.

‘…재밌는 가족이군.’

레토의 짧은 감상은 곧 흥미로운 기대로 변했다.

“처형, 혹시 결혼 전에 들어와 살아도 됩니까?”

“야, 그건 아니…….”

“물론이죠. 이미 저희는 가족인데.”

“형부 아저씨도 같이 산다!”

“아니, 반대 좀 하라고…….”

마치 처음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네 사람은 방문 앞에서 한참을 선 채로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레토는 그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자신이, 그리고 식사할 때 느꼈던 어색한 이질감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

노아는 그런 레토를 보며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

해군은 샤프 영지를 중심으로 일정 해안 구역에 함대와 전단 부대를 배치, 아들라보르 왕국의 해안 방어선을 수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그 외에도 각종 부대 시설 및 복지 건물들을 세워 남부 주민들의 안전을 지키고 편의를 보아주고 있었다.

종종 해군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열리는 행사도 있었다.

오늘 특함 대원들의 회의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섬에서 목격되었단 연락이 왔습니다.”

피스트 준위가 앞에서 나와 회의를 진행하면, 자리에 앉은 특함 대원들이 이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이번 행사는 특함에게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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