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바다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할머니.
아는 바가 없지만, 이 집의 실세라는 건 분명했다.
“언니는 얼굴을 너무 밝혀서 나쁜 남자에게 호되게 당한다고 할머니가 그랬는데, 그 말이 맞았어.”
“으음, 이제 나쁜 남자 안 할 건데요?”
“난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풉!”
엄중하고 하찮은 경고에 레토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웃음은 살짝 새어 나왔다.
“…….”
아니나 다를까.
“이, 이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클라레가 바닥을 발로 콩콩 찍으며 분풀이를 하던 때였다.
“클라레!”
옷을 갈아입고 나온 노아가 깜짝 놀랐다.
덩달아 놀란 클라레는 냉큼 하던 짓을 멈췄다.
“너 또 못된 말을…….”
“아니야.”
레토는 어린 처제 앞을 제 몸으로 가려 주며 말했다.
“처제가 나랑 놀아 주고 있었어.”
등 뒤에 있던 클라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편을 들어 줬어!’
나쁜 아저씨가, 아니, 다시 보니 얼굴이 상당히 잘생기고 키도 크고 옷도 근사하고 얼굴이 엄청 잘생긴 아저씨가 저를 지켜 줬다.
“보나 마나 화냈을 게 뻔한 데 무슨.”
“원래 거친 여자는 아름다운 법이지.”
너처럼 말이야.
“…애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풀어 내린 금발 덕에 귀가 살짝 붉어진 건 들키지 않았지만, 레토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어쨌건 노아는 일단 넘어가겠단 뜻으로 짧은 숨을 흘렸다.
하지만 클라레에겐 그것 말고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이제 좀 갈아입어. 계속 그렇게 입고 있을 거야?”
“…….”
그제야 클라레는 제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그치만…….”
살짝 흔들릴 뻔한 클라레가 다시 마음을 붙잡았다.
“나, 나는 언니랑 아저씨가 결혼하는 거 반대야. 그러니까 예쁘게 안 입을…….”
“그러고 보니.”
뭔가를 떠올린 레토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클라레가 후다닥 노아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언니…….”
“응?”
“아저씨, 화나서 간 거야?”
그새 풀이 확 죽은 클라레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노아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거 아니야.”
무릎을 쪼그려 앉은 노아가 클라레의 두 볼을 손으로 감싸 조물거렸다.
잘 먹고 잘 자란 아이의 말랑한 볼살이 아주 기특했다.
“레토는 너를 아주 좋아해.”
“저, 정말?”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어떻게 싫어해?”
“그거야 그렇지만…….”
그새 또 기분이 좋아진 클라레가 헤벌쭉거리다 허둥거리며 심각한 표정을 연기했다.
“전부터 느꼈는데…….”
“뭘?”
“저 아저씨, 철이 좀 없는 거 같아.”
“…….”
“뭔가 좀, 얄미운 기운이 느껴져.”
“…….”
할 말이 없어진 노아가 침묵하는 사이.
“클라레 양.”
때마침 밖에 나갔던 레토가 다시 돌아왔다. 그의 팔에는 정체불명의 커다란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클라레는 보자마자 알았다.
“내 거!”
“예, 우리 아가씨의 것입니다.”
한쪽 무릎을 정중하게 꿇으며, 레토가 선물을 클라레에게 내밀었다.
“와아…….”
제 몸만 한 상자에 감탄하던 클라레는 상자를 바닥에 눕힌 뒤, 두 손으로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욘석,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해야지.”
노아가 한마디하고 나서야 클라레는 선물 뜯는 걸 잠시 멈췄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북북 소리와 함께 뜯어진 포장지가 바닥에 소복하게 쌓일 때쯤이었다.
“……!”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클라레가 폴짝 뛰었다.
그러곤 선물을 들고 방안을 한 바퀴 달리더니, 노아와 레토 앞에 멈춰 섰다.
“식칼토끼!”
“클라레 양이 식칼토끼를 좋아한다고 해서 준비했답니다.”
레토가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클라레는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너무 좋아서 울기 직전까지 감정이 벅차올랐다. 흥분한 발은 계속 제자리를 동동 굴렀다.
“그렇게 좋아?”
덩달아 즐거워진 노아가 물었다.
“언니, 이건, 이건……!”
“어, 야! 과호흡, 과호흡!”
“아이고, 처제. 숨 조심히…….”
어른들 도움으로 겨우 진정한 클라레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식칼토끼 세 번째 극장판, ‘불타오르는 핏물 속 불법 도축업자의 말로’에 나오는 식칼토끼야!”
“…애들 만화 맞아?”
연령가가 의심되는 작품 제목에 레토가 놀라던 때였다.
“이것 봐!”
클라레는 식칼토끼가 들고 있는 식칼을 가리켰다.
솜이 그득하게 든 식칼 부위엔 별 모양 스티커가 세 개 정도 붙어 있었다.
“극장판에 나오는 악당이 손톱 관리에 환장한 변태 불법 도축업자거든. 식칼토끼가 필살기로 썼을 때 식칼에 손톱에 붙이는 스티커가 옮겨 붙은 거야.”
“진짜 애들 보는 만화 맞아?”
의심스러워진 레토가 한번 더 물을 때였다.
“식사 준비 다 되었어요!”
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새 인형을 가지고 놀던 클라레가 화들짝 놀라더니 우왕좌왕하며 노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언니, 나 옷 갈아입을래.”
“그럴래?”
고개를 끄덕이던 클라레가 레토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딱히, 용서해 주는 거 아니에요.”
다시 존칭으로 돌아온 클라레는 제 몸만 한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선물에 정신 팔려서 레토랑 친한 척했던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부끄럽다는 듯 인형 너머로 삐죽 나온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레토는 그런 클라레가 마냥 귀여웠다.
“…언니.”
절 보며 싱긋 웃는 레토를 경계하던 클라레가 노아에게 귀를 달라고 부탁했다.
노아가 몸을 낮추니, 클라레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얼굴만 믿고 까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애 좀 다룰 줄 아네.”
“…….”
“딱히 인형 때문은 아니지만, 내가 한 번은 허락해 줄게.”
귓속말이라기엔 너무 큰 귓속말이었다.
“…….”
“…….”
노아와 레토는 한동안 떨리는 어깨를 멈추지 못했다.
***
아스는 식당으로 들어온 클라레를 보며 쓰게 웃었다.
“갈아입으셨어요?”
“뭐, 그냥.”
머쓱해진 클라레가 몸을 살짝살짝 비틀었다.
갈아입은 파란색 원피스 자락이 무릎 아래서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안 입으려고 했는데에, 그래도 예의가 아닌 거 같았어.”
“잘하셨어요.”
“헤헤, 오늘 저녁은 뭐야?”
클라레는 보란 듯이 상석에 앉았다. 그 양옆으로 노아와 아스가 앉았고, 레토는 노아의 옆에 앉았다.
“와아.”
식탁 위 만찬들을 본 레토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걸 아스 님 혼자서 다 하신 겁니까?”
지난번에 참석했던 식사도 오늘만큼 푸짐했었고, 맛은 당연히 최고였다.
그날 먹었던 음식의 맛과 온기는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생각이 날 정도였다.
“취미가 요리라서요.”
아스가 클라레의 목깃에 냅킨을 걸어 주며 말했다.
“중장님께 대접하려고 솜씨를 발휘했으니, 많이 드세요.”
“힘드셨을 텐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아스가 빙그레 웃었다.
“오늘따라 칼이 잘 들더라고요.”
“…….”
“역시 숫돌로 열심히 간 보람이 있었네요!”
“아, 숫돌…….”
그 말에 레토가 식탁 위 음식들을 다시 살폈다.
기분 탓이면 좋겠지만, 군침 도는 음식들은 유난히 현란한 칼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노아에게서 들었던 말을 아스에게 또 한 번 들으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클라레의 힘찬 기도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 시간은 금방 왁자지껄해졌다.
“오늘 학교에서 받아쓰기 백 점 받았어!”
“대단한데?”
“받아쓰기 공책에 ‘참 잘했어요’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고요.”
“나중에 언니도 보여 줄 거지?”
대화는 평범했다.
클라레가 무언가를 떠들면, 노아와 아스가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별것 아닌 주제에도 세 가족의 얼굴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평범하기에 온기를 머금는 대화였다.
“…….”
레토는 그 모습이 한없이 부러우면서도,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전에 왔을 때는 안 이랬는데…….’
지난번 식사 때는 능청스럽게 곧잘 어울렸다. 사실 어울리는 척을 한 거다.
하지만 결혼을 전제로 인사하러 온 지금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건 ‘가족’이었다.
진짜 가족.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하는, 수많은 가족 중의 하나.
자신이 경험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
과연 자신이 저 속에 제대로 스며들 수 있을지, 그리고 저의 존재로 인해 화목한 가정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지.
고민이 깊어질수록, 고기를 자르는 레토의 칼질 역시 끝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이제 고기들은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할 정도로 자잘해졌다.
“레토.”
그때, 노아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저씨! 내가 계속 불렀잖아요.”
입가에 소스가 덕지덕지 묻은 클라레가 뚱한 표정으로 레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스도 레토를 살짝 염려스러운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제야 제 표정을 깨달은 레토가 서둘러 웃음을 그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잡념에 파묻혔던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입맛에 안 맞으신가요?”
“아주 맛있습니다. 입맛에 안 맞는 게 없을 정도죠.”
“아스가 만든 음식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요!”
클라레는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아, 맞다. 아저씨.”
클라레가 레토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에요?”
“저는 두 번째로 높은 사람입니다. 제 위로 아드벨로 대장님이 계시죠.”
“오오, 아저씨도 부하구나.”
그게 뭐가 재밌는지, 클라레는 또 씩 웃으며 재잘재잘 물었다.
“언니가 그랬는데요, 해군에 엄청난 바다 괴물이 봉인되어 있대요. 거짓말이죠? 말 안 듣는 꼬맹이들 겁주려는 어른들의 거짓말이죠?”
레토가 노아와 눈을 맞췄다.
“…벨로 대위.”
레토가 일부러 포크와 나이프를 소리 내며 내려놓았다.
심각하게 변한 분위기에 클라레도 덩달아 수저를 놓았다.
“중요한 비밀을 누설하다니.”
“죄송합니다, 중장님.”
“해군에서 키우는 바다 괴물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는데…….”
“어머! 그럼 거짓말하는 아이들을 잡아가는 전설의 괴물, 구라구라가 진짜 있단 말이에요?”
아스도 클라레 놀리기에 가담했다.
“어, 어어…….”
당황한 클라레는 서둘러 손가락을 접었다. 자기가 한 거짓말을 세는 중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토가 안심하라며 멋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군이 괴물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지, 진짜?”
클라레가 안도했다.
“하지만 구라구라는 아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가끔 탈출해서 거짓말을 많이 하는 아이를 잡아가지요.”
“어…….”
“클라레 양은 착한 아이니까 거짓말 안 하죠?”
“쪼, 쪼오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