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45)

25.

플랜시 소장은 애처가로 유명했다.

델라트 경과 달리 가정에 충실한 남자였고, 이 때문에 군 내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니 믿었던 가족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았을 거다.

“살던 곳도 해군이 제공하는 관사라서, 시일 내로 집을 빼야 해.”

그 외에 플랜시 소장이 저지른 횡령죄를 비롯하여 여러 피해 금액을 보상해야 할 판이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노아는 진심으로 동정했다.

레토 역시 드물게 유감을 표했다.

“어떤 의미론 이번 사건의 진정한 피해자들이지.”

짧은 휴식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탕비실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노아가 개수대 물을 틀어 빈 머그잔을 채웠다. 투명하던 물줄기에 커피 찌꺼기가 섞이면서 조금씩 혼탁해졌다.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예.”

커다란 팔이 노아의 뒤에서 튀어나왔다. 개수대 수도를 잠근 레토는 젖은 컵을 대신 정리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노아의 젖은 손을 닦아 줬다.

사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었다. 정성스럽기까지 한 동작에 노아는 뭐에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감촉의 손수건이 제 손가락을 스칠 때마다 가슴이 괜히 간질거렸다.

‘아, 머리 묶었는데.’

귀가 빨개지면 어쩌나, 하고 짧은 걱정이 들던 찰나였다.

“대위도 고생 많이 한 손이네.”

물기가 다 사라졌는데도, 레토는 여전히 손수건으로 노아의 손가락을 닦아 주고 어루만졌다.

“군인이니 당연합니다.”

노아는 굳이 그걸 빼내지 않았다.

“왼손 약지에 흉터는 언제 생긴 거지?”

“생도 시절에 훈련하면서 생겼던 겁니다.”

“아팠어?”

“그렇게 아프진…….”

대답하려던 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미한 흉터가 남은 제 손가락 위로, 레토가 제 입술을 천천히 눌렀다.

입술이 닿으면서 피부를 지그시 누르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리고 정성스러운 동작이었다.

“…아팠던 거, 같습니다.”

손가락에 닿은 입술이 나긋한 곡선을 그리는 게 느껴졌다.

괜히 부끄러워진 노아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손가락에 닿는 숨결이 뭐라고 새삼 쑥스러운지.

“노아.”

입술을 떨어트린 레토가 그 손을 제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넌 내게 과분한 사람이야.”

손바닥에 얼굴을 기댄 채 비비대던 레토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반밖에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그의 붉은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루비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준비했던 말은 많은데…….”

“…….”

“막상 하려니까, 잘 안 나오네.”

“그것보단 장소가 문제지 않습니까?”

멋이라곤 마른행주를 억지로 짜낸 물방울보다 없는 직장 내 허름한 탕비실.

구석 쓰레기통엔 쓰고 버린 여과지가 쌓여 있고, 대원들 입맛은 고려하지 않은 군내 보급용 과자가 진열장에 박혀 있는.

여기에 회색 땟물로 염색된 대걸레는 창문에 기대 세워진 채였다.

“사실, 주말에 같이 먹을 저녁을 예약해 뒀어.”

“그러면 조금만 참지 그랬습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잠시 말을 망설이더니, 레토가 이내 포기한 것처럼 말했다.

“…이건, 불가항력이야.”

레토 자신도 이해가 안 갔다.

비좁고 허름한 탕비실에서, 싸구려 커피를 홀짝이며 업무의 연장선이나 다름없는 지루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인데.

왜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 거란 확신이 든 걸까.

답은 금방 나왔다.

아니, 처음부터 옆에 있었다.

“노아 벨로.”

레토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몸을 낮췄다.

동그랗게 떠진 노아의 푸른 눈동자에 레토가 선명히 비쳤다.

긴장된 진심을 여유로운 웃음으로 가장한 그의 모습이.

“저는 제 성격을 잘 압니다.”

빈말로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틀림없이 당신 속을 썩일 겁니다. 잔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을 거고, 지난번처럼 당신을 슬프게 할지도 모릅니다.”

미래를 함께하자는 유혹보다는, 사고 친 꼬마의 반성문보다 못한 고백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대가 가르쳐 주고 혼내 준다면, 다신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왼손 약지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노아가 움찔거리니 레토가 순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입술이 떨어진 자리엔 희미한 잇자국이 흉터 위에 새겨져 있었다.

“지금 저는 반지도 없고, 이곳은 화려한 건물도 아닙니다.”

“…….”

“…최악의 청혼인데?”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 차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토는 아직 제 손을 뿌리치지 않는 노아를 조금 더 믿어 보기로 했다.

이런 저를 사랑해서 몇 번이고 참아 준.

저 스스로 호구가 되어 주겠다던 소중한 사람을.

“이렇게나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 더.

진심을 담은 목소리에 희미한 떨림이 감지되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경건한 청혼이 탕비실을 숙연케 했다.

살 떨리는 고요함이 레토의 가슴을 조금씩 쥐며 압박했다.

말이 없는 노아를 차마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진 그는 다시 고개를 떨어트렸다. 필사적으로 붙잡은 손마저도 땀이 계속 나서 놓치진 않을까 무서웠다.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고개를 든 레토의 눈에 여느 때와 변함없는 노아가 비쳤다.

제 고백에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그녀가 내심 대단했고, 그렇기에 내심 두려워졌다.

너무 늦은 고백이라 그녀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면 어쩌지.

‘역시 주말까지 참을 걸 그랬나…….’

“왜 주말까지 못 참은 겁니까?”

그리고 노아의 질문은 레토가 염려하던 것을 콕 집었다.

“행복했거든.”

레토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까 너랑 같이 커피를 마시던 순간이, 나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행복했어. 생의 마지막 날에 난 이 기억을 반드시 떠올릴 거야.”

그리고 깨달았다.

“너는 볼품없는 나의 삶을 찬란하게 비춰 줬어.”

“…….”

“나 또한 네 삶의 찬란한 순간이 되고 싶고.”

레토는 한 번 더 노아의 약지 위로 다시 입을 맞췄다.

아까보다 더욱 무게를 실은 입맞춤은 숭고하면서도 애절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진부해. 넌 날 존재하게 만드니까.”

입술을 떨어트린 레토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역시 부족했나?”

“…그렇진 않습니다.”

침묵하던 노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레토.”

레토의 손을 놓은 채, 노아 역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토 오케아누스.”

대신 이번엔 노아가 레토의 왼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레토가 했던 것처럼 입을 맞췄다.

레토는 손가락이 깨물리자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노아는 그제야 입술을 슬그머니 떨어트렸다.

“…사심이 좀 있는데?”

손가락에 남은 잇자국을 보는 레토의 얼굴엔 달콤한 미소가 그려졌다.

“평소 쌓였던 앙심 좀 풀었지.”

제 흔적이 남은 손가락을 눈에 담은 노아는 퍽 만족스러웠다.

“제법 짜릿하네.”

“자기도 드디어 나와 같은 취향이 된 거야? 짜릿한데?”

“잘하겠다고 청혼한 게 조금 전이다, 응?”

“그러면 이제 날 혼내 줘야지.”

“넌 이 주둥이가 문제야, 이……!”

노아가 레토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꽤 따끔한 통증인데도 레토는 기분 좋게 웃을 뿐이었다.

때리다 지친 노아도 따라 싱겁게 웃었다.

“어쩌겠냐…….”

서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경건하게 꿇은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반한 내가 호구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호구가 되도록 해 줄게.”

“너 진짜 그 주둥아리 조심 안 하냐.”

“자기 입으로 호구라고 말해 놓고는.”

“진짜 호구 취급하면 죽여 버린다?”

“하하하!”

레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탕비실 벽에 난 조그만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에 그의 은발이 포말처럼 하얗게 반짝였다.

지금의 레토는 여름날의 푸른 바다처럼 청명하고 시원했다.

“…그리 좋냐?”

나랑 결혼하니 좋아?

덩달아 웃음이 전염된 노아가 실없이 물었다.

레토는 대답하는 대신에 그녀를 잡아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어느새 그는 탕비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였다.

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노아의 품에 얼굴을 기댄 그가 저의 진심을 속삭였다.

“아주 행복해.”

“네가 행복하다면 됐어.”

“넌 안 행복해?”

얼굴만 빼꼼 올린 레토가 물었다. 뒤로 단정히 넘긴 은발이 몇 가닥 이마 위로 떨어진 채였다.

“원래 호구는 말이야…….”

노아는 흘러내린 은발을 손수 넘겨주며 말했다. 이마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에 조금 전에 레토가 깨물었던 흔적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면, 호구도 덩달아 행복해져.”

“뭐야, 그게…….”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노아의 모습에, 레토는 다시 그 품에 얼굴을 숨겼다.

“…….”

심장이 아릿해진 그의 말끝에 약간의 축축함이 어렸다.

“그럼 나도 호구 할래…….”

“넌 이미 내 호구였어.”

“죽을 때까지 네 호구가 될래.”

“그래, 그래…….”

노아는 레토의 등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겁쟁이가 저의 품에서 편안한 숨을 고를 때까지, 너른 등을 도닥이는 손짓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

“…뭐 하는 겁니까, 다들?”

볼일을 보고 돌아온 피스트 준위가 기괴한 시선으로 탕비실을 바라봤다.

탕비실 문 앞에 모여 귀를 대고 있던 대원들이 눈을 부라리며 조용히 하라고 침묵으로 위협했다.

기세에 눌린 피스트 준위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눈치껏 걸음 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중장님이랑 대위님이 안에 들어갔습니다.”

자주색 머리를 단발로 짧게 친 셀린 보르 중위가 대답했다.

“사적인 대화를 그리 들어도 됩니까?”

“지금 탕비실 들어간 지 10분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 정도면 빼박 입 맞추는 중인 거야……!”

아미가 콧김을 거칠게 내뿜으며 확신했다.

“중장님 대단한걸? 탕비실 밖에 대원들 다 있는데 말이지.”

“노아가 잘도 허락하겠다.”

코웃음 치는 셀린의 반박에 아미가 발끈했다.

“그럼 내기해! 안에서 입 맞춘다에 10피나!”

“좋아! 나는 안에서 정신적인 교류만 한다는 데 20피나!”

“정신적인 교류는 어디까지로 할 건데?”

“입 맞추는 것까지는 정신적인 교류지.”

“아이고오! 입술과 입술이 만나면 그 다음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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