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의뭉스러운 미소를 걸친 미남자는 평소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귀족 특유의 우아한 몸가짐에 군인 특유의 서늘한 절제미까지 더해지니 그 유려한 미모가 더욱 눈이 부셨다.
하지만 지켜보는 피스트 준위는 감탄보단, 간담을 서늘케 하는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이제부터, 뭘 하실 겁니까?”
피스트 준위가 물었다.
그제야 창문에 고정되었던 레토의 고개가 움직였다.
“거야 당연히…….”
이번에 지어 보인 미소는 아까와 달리 퍽 순수하고 기뻐 보였다.
“결혼 준비해야지.”
“…자, 잘 못 들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레토가 피스트 준위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준위한테는 내가 직접 청첩장 줄 테니까. 그대는 축의금 안 줘도 돼. 와서 밥이나 실컷 먹고 가.”
피스트 준위는 또 턱관절이 빠졌다.
***
“군종실장님이 안 보이네?”
“그러게. 베네딕토 대령님이 웬일로 자리를 비우시네?”
“오늘 뭐 종교 행사라도 있나?”
병영식당은 오늘도 다양한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그으, 들었어?”
“그거 진짜입니까?”
“들어도 들어도 안 믿긴단 말입니다…….”
군 특유의 계급적 문화와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함부로 발설하진 못했지만, 다들 공통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로 플랜시 소장의 체포였다.
플랜시 소장은 체포된 즉시 보직 해임을 당했다.
현재는 본부 내 감금 시설에 구금 중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하루 만에 벌써 퍼졌네…….”
주변을 둘러보던 노아가 뒤늦게 수프를 떠 마셨다.
“그럼 안 퍼지냐?”
아미가 빵을 뜯어 먹으며 핀잔했다.
“네가 그렇게 활약했는데,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
“반성하고 있어…….”
“성질 좀 죽여라, 미친개.”
“내가 왜 미친개야.”
“뉘에 가아 왜 미친개야아.”
노아의 말을 비꼬듯 흉내 내던 아미가 대뜸 눈을 흘겼다.
“군사 경찰들이, 그날 현행범들 체포할 때 학을 떼더라.”
“도대체 누가 누구야?”
“얼굴을 못 알아보겠는데…….”
범인들은 물론 죽을죄를 지었지만, 사랑싸움으로 분노가 극에 달한 노아를 마주한 건 불쌍한 일이었다.
덕분에 군사 경찰들은 피떡이 된 범인들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그들을 치료해야 했다.
“군종실장님이 새벽에 불려 가서 치유마법을 썼다고.”
아미가 성호를 그으며 베네딕토 대령을 위해 기도했다.
“…….”
할 말이 없어진 노아는 묵묵히 수프만 떠 마셨다. 그릇엔 어느새 건더기만 덩그러니 남은 채였다.
“왕실 기사들은 내일 수도로 이송될 거래.”
“군수 사령부는 어떻게 될까?”
“애초에 그 소장 새끼, 일도 제대로 안 했던 모양이야.”
아미가 애먼 포크를 질겅질겅 씹으며 투덜거렸다.
“어지간한 일은 바로 밑에 계시던 준장님이 하셨나 봐. 지금도 그분이 사령관 자리를 임시로 메꾸고 계신대.”
이후 별 탈 없으면 그대로 소장 진급해 사령관이 될 예정이란다.
“자아, 직장 돌아가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아미가 몸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네 차례야.”
“또 뭔데…….”
불길함을 느낀 노아가 몸을 뒤로 슬그머니 물렸다.
“이거.”
아미가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
“화해했어?”
“손가락 꺾어 버린다?”
“에이, 말해 주라.”
손가락을 냉큼 접은 아미가 아양을 떨었다.
“그래도 내가 너랑 가장 친한 친구인데, 알 자격은 있지.”
노아는 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포기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화해했어.”
“옳지, 또 벌었다!”
“…내가 모르는 내기가 또 있었냐.”
친구인 줄 알았는데, 친구가 아니었다.
“내기까진 아니고…….”
굳어 버린 노아의 표정을 본 아미가 뒤늦게 아차, 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변명이 이어졌다.
“걱정하는 김에 심심풀이 놀이도 곁들인 거야.”
“…….”
“다들 중장, 아니, 그 남자가 차일 거라고 했거든? 근데 나 혼자 너의 호구력을 믿고 화해하는 쪽에 걸었지!”
이게 바로 진정한 우정 때문에 거머쥔 승리가 아니겠냐며, 아미는 도리어 당당하게 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내 인생은 왜 이런 걸까…….’
주위에 있는 놈들이라곤 다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식사를 끝낸 노아는 사령부실에 들르기 전에 가볍게 산책했다.
“어쨌건 결혼이 곧이겠네?”
아미가 마침 머리 위로 드리운 그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중장님이 너한테 청혼했던 것도 결국엔 진심이었다며. 둘이 화해도 했겠다, 결혼 바로 하는 거야?”
“아.”
노아가 멍하니 소리 냈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잊고 있었냐?”
“…열받아서 잊고 있었어.”
대화가 일순 끊겼다.
노아는 결혼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느라, 아미는 제 친구의 미래가 아주 조금 걱정되어서 말을 자연히 멈췄다.
‘그때 쟤가 분명히…….’
아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관생도 시절이었다.
“군인 말고 하고 싶었던 거 없어?”
“세계 정복. 합법적 살인. 변태 처벌.”
“아미 너 무슨 일 있었냐?”
“저건 적성 검사를 어떻게 통과한 거야…….”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끼리 모여 잠들기 전까지 떠드는 시답잖은 수다.
그중에는 어린 시절의 장래 희망도 있었다.
“노아 넌 뭐 하고 싶었어?”
“…결혼.”
“오오오, 좋아하는 남자라도 있었어?”
“연애 따위에 도통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당시의 노아는 지금보다 훨씬 무뚝뚝하고 삶이 지겨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노아의 답변에 놀라면서도 의외의 일면에 즐거워했다.
“좀 더 이야기해 줘!”
“어떤 남자랑 결혼하고 싶었어? 꿈꾸는 결혼 있어?”
“별거 없어.”
노아는 옅은 웃음과 함께 어린 날의 꿈을 말했다.
“부모님이 정해 주신 분과 결혼해서, 처음에는 어색하더라도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마주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
“…그거 정략결혼 아냐?”
“…너 귀족 할머니니?”
요즘 시대에 ‘정략결혼’을 꿈처럼 노래하는 여자아이라니.
충격으로 끝난 대화였지만, 아미는 그날 이후로 노아와 더욱 가까워졌다.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곧잘 어울렸던 거 같았다.
‘어쨌건 애가 묘하게…….’
보수적이랄지, 전통적이랄지.
그래서 아미는 조금 걱정이었다. 이대로 노아가 중장님께 휘둘려 결혼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결혼하면 군 그만둘 거야?”
“어? 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내가 군을 왜 그만둬.”
노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기가 막혀 했다.
“결혼해도 내 삶은 살아야지.”
“헤헤, 그렇지?”
“갑자기 왜 웃어? 징그럽게?”
“으으응, 별거 아냐!”
기분이 한결 나아진 아미가 히죽거리며 노아의 팔에 제 팔을 끼며 찰싹 달라붙었다.
노아는 저리 가라고 밀어냈지만, 그 힘에 진심은 없었다.
“그런데 아스 언니랑 클라레가 뭐래?”
때마침 공기를 한번 바꿔 줄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래도 이 결혼 찬성이거든? 중장님 정도면 어디 빠지는 구석은 없잖아. 성격이 좀 걸리지만, 그건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잡을까.”
하지만 아미의 의견은 엄연히 ‘타인’의 시선이었다.
요즘 누가 집안 보고 결혼하느냐지만, 그래도 결혼이 두 가정의 결합이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러니 함께 사는 가족의 의견은 무척 중요했다.
“아스랑 클라레는…….”
말끝을 흐리던 노아는 대뜸 웃어 보였다.
아주 재밌단 듯이.
“아하.”
뜻을 알아챈 아미가 덩달아 웃었다.
“우리 중장님이 드디어 적수를 만나셨네.”
***
이후의 시간은 나름 평화로이 흘러갔다.
개인 함선이 밀반출될 뻔한 사건은 왕국 전역으로 전해졌다.
앞다투어 소식을 싣던 신문사들은 이번 사건을 ‘해군 소장 이적 사건’이라 명명했다.
“이름 참 예쁘게 지었네.”
“기사단 놈들은 어디 갔답니까?”
“먼저 세상을 하직했나 보지, 뭐.”
읽던 신문을 대충 내던진 뒤, 레토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해군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기자들 앞에 나섰다.
수많은 무공을 상징하는 휘장을 단 푸른색 제복, 탄탄한 하체를 여지없이 보여 주는 검은 바지, 광이 나는 구두.
이마가 훤히 드러나도록 포마드로 멀끔히 넘겨 정리한 머리, 그 위에 얹은 모자.
마지막으로 감정을 절제한 미남자의 얼굴.
그날 신문에는 해군의 유감스러운 입장 및 차후 예방 대책과 관련된 발표 대신, 오케아누스 중장의 커다란 사진이 1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그날 신문은 순식간에 매진됐다.
“역시 사건을 잠재우는 덴 얼굴만 한 게 없지.”
“손에 들린 신문 더미는 뭐냐?”
“중장님 사진 실린 거, 원래 신문 가격의 10배까지 올라서 거래된다고 하더라.”
아미는 본부 내 신문들을 하나하나 수거했다며 자랑했다.
노아가 물었다.
“…엎드려뻗칠래, 아님 신문을 포기할래?”
“당연히 뻗쳐야지!”
제 몸 희생하여 지킨 신문은 제법 쏠쏠한 벌이가 되었다.
어쨌거나 해군을 향한 비판도 눈에 띄게 식어 갔다. 반면 특함과 개인 함선을 향한 관심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물론 이마저도 일주일이 지나가면서 점점 뜸해졌다.
“델라트 부인과 아들은 이사 갔다더군.”
“동생한테 들었습니다.”
노아와 레토는 탕비실에서 남은 사람들의 근황을 나눴다.
“부인은 이번 남부행을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나 봐.”
델라트 부인이 가정에 소홀한 남편 옆을 고집스레 지킨 이유는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건 일찌감치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델라트 경이 체포된 당일 아침, 자신을 찾아온 해군 관계자에게 그간 모아온 증거들을 전부 제출했다.
“이혼도 바로 진행했대.”
작심하고 기다렸었구나.
머그잔을 기울이던 노아는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마레이 학교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델라트 경의 아들. 그 건방진 꼬마가 아버지 앞에서 겁먹던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다리를 이렇게, 막 깡총했어요.”
클라레가 했던 말 역시 뒤이어 떠올랐고.
“…꼬마 녀석, 이젠 성질 좀 죽일지도 모르겠네.”
노아가 고개를 돌리자, 저를 보고 있던 레토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응시한 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신 플랜시 소장 쪽은 약간 안 좋아.”
“아…….”
노아가 안타까운 신음성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