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끝내 욕을 내뱉은 노아가 주먹 쥔 손으로 레토의 가슴을 내려쳤다.
딱 한 번. 아프지 않게.
“동정심 유발이란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먹혔어?”
“진짜라서 더 먹혔다, 망할 놈아……!”
처음 들은 레토의 과거는 그간 기묘했던 그의 행보를 전부 이해시켜 주고도 남았다.
정말 질이 나쁜 인간이었다. 하필 이런 순간에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다니.
“넌 진짜 미친놈이야…….”
레토의 가슴 위로 노아의 머리가 기대듯 내려앉았다.
아프지도 않았던 주먹은 어느새 레토의 커다란 손에 감싸인 채였다.
“내가 왜 네가 욕하고 화내면 행복한지 알아?”
“변태라서.”
“부정은 않겠어.”
레토는 남은 팔로 그녀의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노아는 별수 없다느니, 이건 나 아니면 누가 챙겨 주겠냐느니 꿍얼거리며 슬그머니 품에 몸을 기댔다.
제 몸을 완벽하게 감싸는 따스한 체온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기분 좋은 포근함에 한숨이 절로 나오려는 찰나였다.
“네가 나한테 하는 욕은, 날 걱정한다는 뜻이잖아.”
노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줄곧 저를 내려보던 레토와 눈이 마주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에 하나하나 반응해 주는 네가 귀여웠어.”
죽으면 아무 반응도 없다.
싫어하는 것도 결국은 상대에게 신경을 쏟고 있단 거니, 레토는 그 부정적인 반응까지도 독점하고 싶었다.
“너…….”
다만, 저 진심까진 듣지 못한 노아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진짜 변태였어?”
경악하는 모습에 레토가 웃음을 터트렸다.
의뭉스러운 속내 없이, 그저 이 순간이 즐겁고 기쁘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웃음소리였다.
“뭘 잘했다고 웃어.”
타박하는 노아도 끝내 따라 피식거렸다.
“레토.”
하지만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없었다.
둘 사이엔 아직 짚고 넘어가야 할 마지막 문제가 있었다.
“날 사랑해?”
그 물음에 레토의 웃음이 사라졌다. 붉은 눈동자는 그간 자신이 저지른 오만한 판단과 그로 인한 실수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고개를 숙인 레토가 허락을 구하듯 노아의 코에 자신의 코를 살짝 붙였다.
노아는 열을 핑계로 눈을 감았다.
“앞으로도 계속.”
그토록 듣고 싶었던 진심은 오랜만에 입술에 닿는 열감과 뒤섞여 더할 나위 없는 행복으로 바뀌었다.
“널 사랑해.”
담백한 한 마디엔 온갖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늦은 만큼 절절하고, 그런 만큼 무거운 진심.
이런 저를 포기하지 말라는 필사의 애원.
“…….”
노아는 고백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숨 막히도록 무거운 진심을 처음으로 온전히 느낀 탓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이 자식을 차 버릴 기회.
하지만 노아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제 머리칼을 지분거리는 레토의 손가락도 지적하지 않았다.
“…….”
“…….”
그리고 그 모습을 문틈 너머로 훔쳐보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스.”
클라레가 물었다.
“결국 언니랑 아저씨는 왜 싸운 거야?”
“저건 싸운 것도 아니에요.”
아스가 클라레를 안아 올리며 설명했다.
“원래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는 거예요.”
“철딱서니가 없는 어른들이네.”
에휴, 클라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학교나 갈란다!”
***
다음 날 군에 복귀한 노아는 특함 대원들의 환대를 받았다.
“중장님이랑 사귀었습니까?”
“진짜 그 미친개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습니까?”
“아니, 대위. 인생을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해!”
“내가 뭐랬어. 사람들 다 너보고 호구라잖아.”
사실 환대라기보단, 레토와 사귀었단 사실을 쉬이 믿지 못하고 몇 번이고 물어보는 취조에 가까웠다.
노아는 그들의 걱정 섞인 말들에 대충 답해 주며 자리로 향했다.
“야.”
뒤따라온 아미가 말했다.
“어제 중장님, 오전에 자리 비웠는데…….”
“…….”
“너 보러 간 거 맞지?”
귀찮아진 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구나!”
하지만 아미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모여 있던 대원들에게 가서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그들은 아쉬운 한숨과 함께 아미의 손에 지폐를 얹었다.
노아는 그 모습을 참 한심스럽게 바라봤다. 뜨끔한 대원들은 냉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난 믿고 있었다고!”
아미도 지폐를 야무지게 세며 노아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야, 그래도 내가 새벽에 데려다줬잖아. 난 그 뒤에 다시 군으로 복귀했다고. 이 정도는 눈감고 봐주는 게 우정이야.”
“누가 뭐래?”
여러모로 귀찮아진 노아는 별말 않았다.
“그날 일은 어떻게 되었어?”
대신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으음…….”
지폐를 냉큼 상의 안쪽에 넣은 아미가 말을 아꼈다.
맞은 편에 있던 아이스 중령이 ‘어이구야’ 하면서 냉큼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일단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증거가 부족해? 그럴 리가 없…….”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는 거지.”
플랜시 소장이 저지른 죄가 너무 많고, 너무 심각했다.
“…대장님한테 연락이 왔어.”
현재 함대를 이끌고 출항 중인 아드벨로 대장이 본 사건과 관련된 명령을 내렸다.
“자기가 도착할 때까지 재판은 진행하지 말라고.”
“…….”
말을 한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대장님의 명령이 뜻하는 바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죽느니만 못하겠네.”
“내 말이…….”
아드벨로 대장은 천하의 레토도 눈치를 살피는 위인이다.
괴짜로 유명한 아드벨로에서도 특출난 괴짜.
해군의 수장이자 아들라보르 왕국군 의전 서열 2위.
개인 함선 개발 선두자.
“…개인 함선을 반출하려던 게 큰 문제가 된 거 같아.”
군사상 기밀을 누적하고, 간첩을 해군 내부에 끌어들였다.
“사형 확정이지.”
그러니 죽이기 전에 정보를 캐내라.
아드벨로 대장의 진의였다.
“그럼 기사들은?”
노아는 플랜시 소장에게 관심 없었다. 약간의 놀라움은 있을지언정 그게 제 삶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기사들은 조금 궁금해졌다.
“확실한 건 나도 잘 몰라.”
아미는 오로지 추측일 뿐이라고 전제를 달고 말했다.
“일단 저 사람들은 왕실 기사단 소속이잖아. 어제 수도에 연락했으니까 곧 저들을 압송하려고 사람들이 내려올 거야.”
델라트 경과 페르아타 경의 엄벌은 확실했다. 그들은 이번 사건의 주도적 공범이었으니까.
반면 나머지 평기사들의 미래는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
“협박으로 인한 강제적 공모였고, 마지막에는 군종실장님께 고해해서 정보를 제공한 거로 정상참작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
노아는 듣자마자 알았다.
‘손을 몰래 썼구나.’
레토가 나머지 다섯 기사의 사정을 확인한 뒤, 갱생할 기회를 통 크게 나눠 준 것이다.
‘쓸데없이 물러선.’
평소라면 이상한 데서 선심 쓰고 지랄이라고 욕했을 거다.
“잉?”
설명을 마친 아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아 넌 왜 또 갑자기 웃냐?”
“안 웃어.”
노아가 아무 일 없단 듯이 입꼬리를 내렸다.
“그래서.”
분위기 전환 겸, 노아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미친개는 어디 갔는데?”
***
해군의 수장은 현재 공석이다.
국왕의 명령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자, 신뢰하는 부관 두 명 및 수십 대원을 데리고 항해를 나간 상태였다.
고로, 해군본부 내 참모 총장실도 공실이었다.
“…그럼 또 연장되는 겁니까?”
레토는 비어 있던 참모 총장실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렇습니까? 예, 군수 사령관은 현재 구속 중…….”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희미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간간이 들리는 높은 목소리가 상대는 여성이란 걸 짐작하게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레토는 수화기 너머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깍듯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렇게 통화를 주고받길 잠깐.
“…후우.”
전화를 끊은 레토가 신경질적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통화는 마치셨습니까?”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피스트 준위가 레토에게 물었다.
“어…….”
레토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며 성의 없이 답했다. 조금 전까지 진중했던 태도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여전히 과할 정도로 건강하고 깐깐하지.”
아직도 통화하면서 들은 날카로운 잔소리가 귀를 때리는 기분이었다.
“대장님은 잘 지내시는 모양입니다.”
“분명 배 타고 나갔는데, 이 할망구는 기차 화통을 어디서 구해 삶아 먹은 거야.”
아드벨로 대장이 출항한 지 벌써 한 달째였다.
해군 생활을 아무리 오래 한대도, 바다를 이길 순 없다.
거친 파도가 시시각각 몰아치는 항해 임무는 연륜 있는 제독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아드벨로 대장은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심드렁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 맞은 편에서 해군 두 명이 다가왔다.
레토는 그들이 건넨 경례를 가볍게 응수하며 지나쳤다.
“역시, 살려 두랍니까?”
피스트 준위가 등 뒤로 사라지는 해군 둘을 확인했다.
레토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장님은 의심쟁이거든.”
애당초 이 모든 사건을 처음 주목했던 사람이 바로 아드벨로 대장이었다.
그녀는 출항 전에 레토에게 조사를 일임하고 해결을 명령했다. 저들의 계획을 멈추고, 뒤에 숨겨진 진상을 밝히라고.
물론 비밀리에.
명령은 충실히 이행되었다.
이틀 전에 범인들을 체포해 계획을 사전에 막았으니, 남은 건 감춰진 진상을 밝히는 것만 남았다.
‘문제는 후자가 보통 문제가 아니란 건데…….’
이번 사건에 연루된 범인 중 해군 제독급이 한 명, 그리고 왕실 기사단 출신이 두 명이었다.
“군 내부자가 이적 행위를 주동했단 건 심각한 문제지.”
“중장님께선 무엇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왜 하필 그놈들이었을까?”
걸음을 멈춘 레토가 떠보듯 물었다.
“해군과 기사단이 어쩌다 손을 잡았을까?”
다행히 머리 좋고 눈치는 더 좋은 비서관은 제 상관의 의중을 눈치챘다.
덩달아 변한 표정은 현 상황의 심각성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또 다른 공모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냥 공모자가 아니야.”
가까이에 있던 창문에 레토의 표정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