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45)

22.

‘등신도 이런 등신이 없지.’

아침부터 열이 난 노아는 몸을 잘게 떨었다.

홧김에 저질렀던 일에 화병까지 더해지니 몇 년 만에 찾아온 몸살로 고생 중이었다.

언젠가 아미가 저와 레토를 가리켜 불세출의 등신이라고 욕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언니…….”

등교 준비를 마친 클라레는 방 안으로 쪼르르 들어왔다.

“많이 아파? 그래서 일하러 못 가?”

작은 손이 노아의 이마 위에 천천히 얹어졌다.

“뜨거워….”

클라레가 울상을 지었다.

열 때문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두꺼운 이불을 덮었는데도 추워서 오들오들 떠는 언니를 보니 무서웠다.

그런 동생이 퍽 귀여웠던 노아가 손가락을 이불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클라레의 오통통한 볼살을 톡 건드렸다.

“왜? 돈 못 벌어올까 걱정돼?”

“응.”

“…….”

“농담이야, 언니.”

“그래, 솔직히 좀 울 뻔했어.”

버석거리는 웃음을 끝으로, 노아가 몸을 한 번 잘게 떨며 한숨을 흘렸다.

“어, 언니! 언니 왜 그래?”

놀란 클라레가 울먹거렸다.

“히잉, 죽지 마아아!”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저 말 때문에 없는 기운이 더 빠지려고 했다.

“아가씨.”

때마침 아스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이제 학교 가야죠.”

“나 오늘 학교 못 가! 언니 돌봐야 해. 이러다 언니 죽어!”

“아스, 얘 좀 빨리 데리고 나가….”

“보셨죠? 작은 주인님 입 터시는 거 보면 아직 멀쩡해요. 죽을 때가 아니란 소리예요.”

“이 집에 내 편은 없어……?”

아스는 고집을 피우는 클라레를 겨우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약 꼭 드세요. 아, 군에는 연락하셨죠?”

“…….”

“…하세요.”

“알았어.”

더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아스는 눈치껏 방문을 닫고 자리를 비켜 줬다.

혼자 남은 노아는 눈을 감은 채로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조용한 환경 탓인지, 유난히 주변 소음이 평소보다 선명했다.

문 너머로 들리는 클라레와 아스의 목소리, 제 방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짹짹 지저귀는 산새의 울음.

그리고 익숙한 자동차 엔진 소리.

누구의 자동차였는지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순간.

“…무슨 염치로 온 겁니까?”

노아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내 나타난 병문안 손님에게 물었다.

“허락받고 들어왔어.”

레토가 입꼬리를 휘었다.

“집주인은 허락한 기억이 없습니다…….”

“이 집의 가장은 클라레 아가씨잖아.”

“…….”

힘없이 가라앉은 노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클라레가 레토를 제 방에 들어오게 허락한 것보다, 저 능글맞은 놈이 평소처럼 ‘처제’라고 안 부른 게 더 놀라웠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레토가 침대 아래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말했다.

“나도 눈치가 있지.”

“좀 일찍 챙기셨어야 했습니다.”

“그러게.”

등을 돌린 탓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는 레토가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있었다.

“일찍 눈치챌걸…….”

뒤늦은 고해였다.

“…그래서.”

열 때문에 지친 노아의 목소리도 어제와 달리 힘이 없었다.

“왜 오셨습니까?”

“안 쫓아내?”

“우리 집 가장이 허락했다면, 쫓아낼 권한은 없습니다.”

“클라레 양이 가장 강하군.”

레토는 조금 전에 저를 노려보며 협박하던 당찬 꼬마 아가씨를 떠올렸다.

“언니가 아픈 거 아저씨 때문이에요? 너 혼나고 싶냐?”

“아가씨, 더러운 거 보지 마세요. 눈 버려요.”

“아스, 나 잡지 마! 내가 오늘 피를 보겠어!”

“저 안 잡고 있는데요?”

“…좀 잡아 봐. 잡았어? 놓으면 안 된다? 이씨, 내가 아스 때문에 봐주는 줄 알아!”

순간 주제도 모르고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 내고 용서를 구한 뒤에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꼬마 아가씨는 없을 거야.”

“제 동생은 원래 사랑스럽습니다…….”

“클라레 양을 보면, 네 어릴 적이 조금 상상되고 그래.”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자매였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을 거 같았다.

“너도 저렇게 귀여웠겠지?”

“저는…….”

그 말을 따라, 노아는 잠시 제 어릴 적을 떠올려 봤다.

“…여기 오신 이유가 뭡니까?”

하지만 추억 회상은 빠르게 끝났다.

“글쎄.”

레토는 조금 전 느꼈던 이상한 간격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사랑하고 아끼는 부하가 걱정되어 병문안 왔다고 말해도 안 믿을 거 같고.”

“이제 와서 사랑한다고 말합니까?”

그것도 부하 핑계를 대면서.

참 같잖은 술수였다.

노아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고, 레토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찌질하지?”

“알곤 있어서 다행입니다.”

괘씸해진 노아는 이불을 코끝까지 덮어 올렸다. 그래도 등을 돌린 채 앉은 레토의 뒤통수만큼은 아직 눈에 담고 싶어서, 이불을 살짝 내렸다.

때마침 레토도 얼굴을 돌려 보였다.

“…울었습니까?”

“안 울었어.”

그런 것치곤 레토의 눈가가 빨갰다.

“밤 좀 샌 것뿐이야.”

“제 탓하려고 온 겁니까?”

“그것도 아니, 음, 맞나?”

유들유들하게 웃어넘긴 레토는 잠시 방 안을 스윽 둘러봤다.

처음 들어온 노아의 방은 제 상상과 전혀 달랐다.

소꿉놀이 장난감처럼 생긴 작은 소품이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었고, 책장 근처에는 채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정돈에 소질이 없는지, 구석에는 다 읽은 잡지가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다.

얼핏 봤던 책상 위도 꽤 너저분했었다. 의자에 대충 걸쳐져 있던 담요도 좀 더러웠고.

‘정리에 소질이 없구나.’

자신이 아는 노아와 전혀 겹쳐 보이지 않는 방.

하나 그 덕에 레토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물어봤으면, 말해 줬겠지.”

마레이 학교에서 돌아오던 날.

“넌 항상 솔직하고, 올곧고, 아름답지.”

“전에 들었던 말입니다.”

“그러니 이리 미련스럽게 구는 거지.”

“알고는 계셨습니까?”

“그럼 모를까?”

두 사람은 그날의 대화를 한 번 더 반복했다.

다만 딱 한 가지가 달라졌다.

“…사과하려고 왔어.”

레토가 뒤늦은 고해를 시작했다.

“플랜시 소장은 날 견제하려고 널 이용하려 했어.”

“영관급으로 진급하는 군인은 군수 사령부에 임시 발령되는, 그것 때문입니까?”

“역시 알고 있었네.”

네가 안 가르쳐 주니까 알아서 찾아낸 거지.

노아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아프니 반박할 기운도 없었고, 어제 제 속마음을 실컷 토해 낸 탓에 그럴 의지도 없었고.

레토가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꽤 오랫동안 군내 자금을 횡령했더라고. 제국 쪽 브로커와도 암암리에 접촉하고.”

개인 함선 밀반출 계획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죄를 널 통해 나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지. 원래라면 네가 소령으로 진급했을 테니까. 넌 거의 확정이었어.”

그만큼 잘했거든.

레토가 노아의 실적을 칭찬했다.

“그래서 진급을 방해한 겁니까?”

“그런 것도 있고…….”

“…….”

“…떨어지기도 싫었고.”

레토는 진급 방해에 사심이 있었음을 순순히 고백했다.

그제야 노아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한결 풀렸다.

“검도 일부러 가져간 겁니까?”

영관급으로 진급하면 나라에서 의장용 진검을 수여한다.

만약 노아가 예상대로 진급했다면 받았어야 했던 검을, 레토가 무슨 수를 썼는지 냅다 홀라당 가져가 버렸다.

“네가 이상할 만치 그 검에 욕심을 부리더라고.”

좋아하는 아이에게 관심을 끌어 보려고 물건을 빼앗은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참 하찮고 비열하지?”

“…….”

“비참하기도 하고.”

레토는 세워 모은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

하지만 그가 말문을 다시 떼는 데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흙.”

레토가 나지막이 물었다.

“흙, 먹어 본 적 있어?”

“…….”

노아는 대답하는 대신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지는 상체를 레토가 재빨리 붙잡았다.

“괜찮아?”

“아, 응…….”

“다시 눕혀 줘?”

“아니, 좀 일으켜 줘…….”

레토의 도움으로 노아가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노아의 얼굴과 달리, 레토는 초연하기만 했다.

“말하지 말까?”

“말 안 하면 진짜 헤어질 거야.”

오기 섞인 경고에 레토가 웃었다. 노아가 다시 제게 반말로 말해 주는 것이 기뻤다.

“많이 굶었어.”

그리고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란 놈이 우리 모자를 버렸거든.”

세상의 이목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들 모자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술수까지 부렸다.

“…그래도 엄마는 상냥했어.”

죽기 전까진.

“애초에 임자 있는 남자와 눈이 맞았던 것부터가 불행의 서막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다운 결말이었어.”

“…….”

“그래도 엄마를 원망하진 않아. 죽기 직전까지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준 사람이었거든.”

하지만 죽은 자의 애정은 어린아이의 남은 삶을 구원해 주진 못했다.

“그래서 도망쳤지.”

친부의 감시를 겨우 피해 도망친 건 다행이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자세히는 말 안 할게.”

홀로 거리를 떠도는 아이의 삶은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야외에서 벌벌 떨며 자는 것도, 이미 먼저 뒷골목을 장악한 걸아들의 텃세를 가장한 폭력과 갈취도 별거 아니었다.

정말 괴로운 건 굶주림이었다.

쓰레기통에서 빵이라도 건지면 진수성찬, 그것도 못 구하거나 빼앗기면 산에 가서 이름 모를 식물 뿌리를 캐서 먹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없다면.

“…흙은 먹을 게 못 돼.”

때마침 그쪽을 수색하던 오케아누스 후작이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정말 죽었을 거다.

“나는, 그것들이 무섭더라.”

메마른 손으로 쥐었던 흙이.

사랑한다면서 절 두고 죽은 엄마가.

자신들 모자를 버린 아버지가.

별거 아닌 줄 알았던 어린 날의 충격은 잔인한 흉터를 남겼고, 레토는 정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제 흉터를 확인했다.

비포장도로를 보면 속이 울렁거렸고, 늦은 밤을 돌아다니는 걸 기피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진심조차 말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었다.

“해군이 된 것도 그 때문이야. 최대한 흙을 안 볼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거든.”

“…….”

“지금은 괜찮아졌어.”

그래도 모래사장에서 훈련하는 건 아직도 마땅찮다며 능청스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노아는 따라 웃지 못했다.

“…변명은 여기까지야.”

허락받지 않은 고해 성사가 끝났다.

“이제 차도 돼.”

레토는 오롯이 저만을 두 눈에 담은 노아에게 여전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아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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