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45)

21.

노아는 화가 났다.

‘내 조건이 그렇게 어려웠나?’

당장 눈앞에 있는 남자의 멱살을 쥐어 잡으려는 두 손이 분에 겨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나고, 속상했다.

“…제 조건이.”

그리고 슬펐다.

“우습게 들렸습니까?”

최대한 침착하려고 다짐했건만, 노아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근처에 있던 특함 대원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그 틈에 아미와 호네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게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벨로 대위.”

“그래서 이딴 식으로……!”

“노아!”

아미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벨로 대위님.”

냉큼 존칭을 붙인 아미가 해변을 눈짓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직 군사 경찰들이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이쪽을 슬금슬금 돌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본부로 돌아가서 얘기 나누십시오.”

“대위님이 타신 개인 함선은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저희는 나중에 따라가겠습니다.”

특함 대원들이 눈치껏 둘을 먼저 보냈다.

그러나 대원들의 배려가 무색할 정도로, 노아와 레토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숨 쉬는 것도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둘은 군용차를 타고 본부 내 사령부실에 복귀할 때까지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우선.”

그래도 먼저 입을 연 건 레토였다.

“벨로 대위.”

레토는 상관으로서 해야 할 말을 먼저 꺼냈다.

“상관의 명도 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지?”

“죄송합니다.”

“허락 없는 무기 사용은 군법 재판감이란 걸, 내가 생도 애새끼도 아닌 현역 군인에게 알려 줘야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절차대로 처벌받겠습니다.”

노아는 제 잘못을 묵묵히 인정했다. 하지만 반성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

그 모습에 무어라 말하려던 레토가 끝내 입술만 들썩거렸다.

그리고 피곤에 겨운 한숨을 흘렸다.

“…다친 곳은 없나?”

“멀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게.”

“주의하겠습니다.”

“좋아.”

상관과 부관으로서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

“…….”

이제 계급장을 뗀 채 서로 진솔한 마음을 털어놓을 차례였다.

둘은 반드시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사실 누가 먼저 말할 차례인지 둘 다 알고 있었다.

“…….”

당사자는 깍지 낀 손가락을 하염없이 꿈틀거렸다.

“…화가 난 거, 알아.”

가까스로 말을 꺼낸 레토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완전히 달랐다.

“근데 미안하다고는 생각 안 해.”

겁을 잔뜩 먹어 주눅이 든,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느라 저 자신도 모르게 말투를 조심하는.

마치 혼나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왜 미안하지 않은데?”

그래 놓고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게 저딴 소리라니.

노아는 화를 억누른 채로 물었다.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왜 조용히 끝내려고 한 건데?”

“내부 배신자를 색출하는 일이라 신중했던 거야. 괜히 여기저기 알렸다가 새어 나가면 타국에 만만하게 보일 틈을 주게 되는 거니까.”

“…….”

“거기다 해군의 위신은 물론이고 내부 기강이…….”

쾅!

죄 없는 아이스 대령의 원목 책상에 커다란 흠이 생겼다.

“레토 오케아누스.”

책상에서 주먹을 치우며, 노아가 짓이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딴 걸 물은 게 아니란 건 알 텐데?”

말이 끊긴 레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묵비에 더욱 열이 뻗친 노아는 한 번 더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책상을 치는 대신, 주먹을 겨우 펴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지막 질문이야.”

손바닥으로 가려지지 못한 나머지 얼굴엔 노기가 선연했다.

“이 문제에 나를 끌어들이지 않은 이유를 말해.”

“…….”

“질문이 어려운가 본데, 그럼 좀 더 쉬운 질문으로 바꿔 볼까? 너는 나한테 언제쯤 사랑한다고 말할 건데?”

“…….”

“두 번 안 물어.”

“…….”

질문과 침묵이 무의미하게 반복됐다.

“…그래, 됐어.”

노아도 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침묵이 결국 네 대답이란 거지?”

레토를 노려보던 푸른 빛 눈동자도 점멸했다. 그 순간을 목격한 남자의 심장은 바닥으로 낙하했다.

“노아.”

레토가 서둘러 손을 뻗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하지만 노아는 저를 향한 손을 매몰차게 내쳤다.

손등을 맞고 거절당한 건 레토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가장 비참해진 건 노아였다.

“제발 말 좀 해!”

예전에도 지금에도.

노아가 레토에게 간절하게 원한 건 딱 하나였다.

“뭐라도 좋으니까 제발 무슨 생각인지 말 좀 하라고!”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이 벽을 두드렸다.

“나랑 있어서 즐겁기는 했어? 행복했어? 불만은 없었어? 왜 갑자기 거리를 두고 서먹해졌던 건데?”

돌이켜 보면, 늘 그랬다.

“주말에 식사나 할래?”

“...중장님과 말씀입니까?”

“그럼 나 말고 누구랑 하려고.”

“말투 참 예쁘십니다.”

“그거야 내 눈앞에 있는 소위가 어여쁘니까.”

“미친…….”

시작부터 잘못이었는데.

그런데도 노아는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레토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또한 저와 같은 마음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 빠진 눈으로, 저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다정하게 대할지언정.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지 않았다.

“차라리 갖고 놀다 버리지!”

그렇다면 미련 없이 포기하도록 놓아줬어야 했다.

이렇게 쓸데없는 미련을 갖게 만들어 제 속을 헤집어 놓을 바에야,

“그랬으면 내가……!”

노아는 지금도 자신들 사이에 놓인 벽에 대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벽을 두드려도, 그 너머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벽 뒤에 레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벽, 그 자체였으니까.

노아는 더는 이 벽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억울함에 짓이겨진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런 노아를 바라보던 레토는 버림받은 아이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내가, 등신이 되어 줬잖아.”

사랑에 져서 호구가 되어 줬잖아.

그 멍청한 내기 청혼을 지는 척하고 수락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넌 왜…….”

너는 왜 계속 겁을 먹고.

나는 그런 널 계속 붙잡는지.

“…….”

지쳐 버린 노아는 고개를 떨궜다.

동시에 레토의 붉은 눈동자가 절망과 공포심으로 가라앉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은 저를 바라보기를 포기한 노아를 간절하게 찾았다.

“지쳤어.”

하지만 노아는 이제 그걸 살필 여력이 없었다.

“너한테 애원하는 내 꼴이 참 우습지 않아?”

“…….”

“넌 또 말하지 않는구나.”

“…노아.”

레토가 힘겹게 불렀다.

“나는, 그러니까…….”

겁에 질린 목소리가 이젠 또렷했다.

순간 노아는 확신했다.

어쩌면 레토의 진심을 들을 기회가 찾아온 건지도 모른다고.

노아가 제 자존심을 구기면서까지 그의 옆에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됐어.”

그러나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노아.”

커다란 손이 노아의 젖은 볼을 소중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젖은 푸른 눈은 어떤 것도 포용하지 않겠단 삭막함을 머금고 있었다. 어떤 생명도 살아가지 못할 암흑의 심해처럼.

그 눈은 레토를 못 본 척했다.

그게 레토를 더욱 두렵게 했다.

“…….”

하지만 겁쟁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만적인 오판이 아니라, 제 주제를 알고 입을 다문 거였다.

그녀가 듣는 것을 거부했으니, 제겐 말할 자격이 사라진 거다.

“중장님.”

노아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자연히 제 볼을 감싸던 손도 떨어졌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분노조차 사라진 표정은 섬뜩할 정도로 무기질적이었다.

“데려다, 줄까?”

레토가 물었다. 가까스로 꺼낸 목소리는 애통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가 들으면 오히려 이쪽이 울었나, 싶을 정도였다.

“됐습니다.”

“…….”

“중장님과 제가 무슨 사이라고.”

그 말을 끝으로, 노아는 뒤돌았다.

문을 열자, 몰래 훔쳐 듣던 특함 대원들이 후다닥 물러섰다.

벽에 기댄 채로 서 있거나, 엎드려 뻗치는 벌을 자체 실행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미.”

노아는 그 자체 형벌을 행하려던 사람 중 하나를 불렀다.

“집까지 좀 태워 줘.”

“어? 어어, 그래…….”

그날 노아는 아미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 날, 노아는 출근하지 못했다.

***

“군사 경찰에서 온 보고서입니다.”

아침 일찍 사령관실에 들어선 아이스 중령은 응접용 소파에 드러누운 레토를 내려다보며 보고했다.

레토는 어제 입었던 후줄근한 함정복 차림 그대로 자고 있었다.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채라 입 말고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이스 소령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보고를 이어 갔다.

“플랜시 소장의 저택에서 불법 사채를 융통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

“자금은 이미 제국 쪽으로 넘어갔고, 지금 추적 중이라고 합니다.”

간략한 보고를 마친 아이스 중령은 상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

그러나 돌아오는 건 싸늘한 침묵뿐이었다.

이 역시 예상한 바라, 아이스 중령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중장님.”

그래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지금 사령관실 밖에서 살벌한 분위기를 감당 못 하고 눈치만 살피는 불쌍한 대원들을 위해서.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동정심 드는 상관을 위해서라도.

아이스 중령이 물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뭐, 차여서 꼴 좋다고?”

레토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레토의 얼굴을 가리던 팔이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우셨습니까?”

“밤샌 거야.”

레토가 밤을 새우느라 붉어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매만졌다.

‘어이구.’

아이스 중령은 피부를 찌르는 날 선 분위기에 헛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예?”

“무슨 말을 하려 했는데?”

“아….”

아이스 중령이 짧게 심호흡했다.

“중장님.”

그리고 말했다.

“대위는 중장님의 엄마가 아닙니다.”

레토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제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정말이라면, 대위는 화를 낼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들의 관계에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정말 패자를 자처한 슬픈 사랑이었다.

하지만 레토는 아니었다.

“중장님은 대위를 사랑한 게 아니라, 꼭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투정을 부린 것 같았습니다.”

“…….”

“말 안 해도 알아 주길 바라는 건, 젖먹이 때 끝냈어야 합니다.”

아이스 중령은 인생 선배로서 진지하게 조언했다.

그리고 물었다.

“벨로 대위를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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