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페르아타 경.”
렐리 경이 힘겹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역시 그만두시는 게…….”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
페르아타 경이 답답한 마음에 거칠게 목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상황만 아니었다면 당장 저 답답한 면상에 주먹을 꽂았을 거다.
“이제 와 겁이라도 나나?”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페르아타 경이 비웃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렐리 경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각오를 굳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페르아타 경은 기가 막혔다.
“…어차피 우린 다 공범이야.”
그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필이면 달빛도 환한 날이라, 어둠조차도 이들의 수치심을 감춰 주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돈도 못 챙기고 사형대에 오르겠지.”
“…….”
“…….”
지독한 현실을 알려 줘도 기사들은 꿈쩍도 않았다.
“…칫.”
결국, 페르아타 경은 렐리 경의 어깨를 퍽 밀쳤다.
홀로 창고에 들어간 그는 가까이에 있던 개인 함선 하나를 낚아챘다.
그러나 부하들의 변심에 화가 난 탓에 까먹고 말았다.
개인 함선 한 대가 40kg이란 걸.
“악!”
중심을 잃은 페르아타 경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그 와중에 개인 함선을 지키려다가 손이 찍혔다. 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페르아타 경은 끙끙거리며 홀로 일어났다.
그래도 아프긴 아팠는지라.
“망할 새끼들! 겁쟁이 같으니라고! 해군의 엉덩이나 핥으며 교수대에 오를 것들!”
페르아타 경은 부하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손이 생각보다 너무 아파서 눈물까지 맺히니, 그 광기가 더욱 섬뜩해졌다.
기사들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페르아타 경은 홀로 개인 함선을 가지고 해안가로 갔다.
남은 기사들은 그를 잡지 않았다. 그렇다고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 탓에 페르아타 경의 발걸음도 점점 조급해졌다.
뒤에 남은 배신자들이 당장 해군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진 않을 거다. 했다간 자신들도 큰 화를 면치 못할 테니.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배신한 놈들을 믿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라면 쪽지에 적혔던 약속 장소가 바로 지척이라는 것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피를 토하며 훈련했던 해변이 무기고 근처였다.
해변에 설치된 수영 훈련장 시설 뒤로 곶이 하나 있었다.
밀항을 위한 쪽배는 곶 뒤에 준비되었다.
“…혼자인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던 델라트 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았다.
“서둘러야겠군.”
“어서 올라타시오.”
함께 온 밀입국 브로커가 말했다. 마레이 학교에서 델라트 경의 변호사 흉내를 냈던 사람이었다.
페르아타 경이 오르자, 쪽배가 잠시 휘청거렸다.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
개인 함선을 처음 만져 보는 델라트 경이 적잖게 놀랐다.
곧 쪽배가 움직였다. 모터가 달린 배지만 일부러 노를 저었다.
파도가 잔잔하니 조금이라도 들킬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해군 본부의 불빛이 어둠에 짓눌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바다로 나아가니, 갈아탈 배가 모습을 나타냈다. 작은 어선 크기였지만 쪽배보다는 훨씬 고급스러웠다.
브로커가 먼저 배에 올라타는 동안, 델라트 경과 페르아타 경이 개인 함선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부인과 아드님은…….”
“재미난 농을 하는군.”
델라트 경이 대놓고 비웃었다.
“혹을 왜 데려가.”
어차피 그는 제 가족은커녕 가문에 감흥이 없었다.
곧 있으면 가문이 파산 직전이란 소식이 전국에 쫙 퍼질 텐데 뭐 하러.
전부 제 도박 때문에 생긴 일인데도, 델라트 경은 딱히 책임감을 못 느꼈다.
오히려 그깟 도박으로 탕진한 돈을 제대로 메꾸지 못한 아내를 탓했다.
“예로부터 집안 살림은 안주인의 몫이야.”
수도에서 나름 부와 명예를 즐기게 해 줬으니, 이제 아내와 아들도 제 몫을 할 때가 된 것뿐이었다.
대화를 마친 둘은 약속한 것처럼 리볼버 권총을 꺼냈다.
실린더 안에는 다섯 발의 탄이 전부 장전되어 있었다.
“서둘러 올라오시지요.”
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재촉하는 말투에 둘은 권총을 허리춤 뒤에 감췄다.
그리고 차례대로 배 위로 올랐다.
배 위에는 범상찮은 체구의 사내들이 여섯 정도 있었다.
그들은 위협적인 분위기를 뿜어 대며 두 기사를 감싸듯이 환영했다.
“개인 함선부터 확인합시다.”
손을 내민 브로커의 안경이 월광이 반사되어 번뜩였다. 여기에 비열한 웃음까지 곁들이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첨예해졌다.
“제국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는 저희가 지닐 겁니다.”
“이런 거로 쓸데없이 감정 소비 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제국에 목 붙이고 가지 않겠습니까?”
대치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누구 하나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촤아.
그때, 배가 살짝 휘청이면서 물소리가 들렸다.
“가서 확인하세요.”
브로커의 명을 받은 근육질의 사내 한 명이 배 아래로 고개를 숙인 찰나였다.
탕!
“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부여잡은 다리에선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뭐, 뭐야!”
“침입자다!”
“왕국 새끼들! 설마 몰래 사람을……!”
탕!
또 한 번 총소리가 울렸다.
“크아아아!”
왕국 반역자들을 모함하려던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 그는 허벅지 안쪽을 스치듯 맞았다.
총알이 조금만 위였다면 영 좋지 않은 곳에 맞을 뻔했다.
“미안합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 제가 화가 많이 난 상태라, 실수가 있었습니다.”
역시 총은 야만적이니, 때려잡는 손맛이 없다느니. 알 수 없는 혼잣말이 짧게 이어졌다.
그사이에 브로커 일행이 공격 태세를 갖췄다. 손에 들린 날카로운 갈퀴나 가늘고 얇은 식칼, 소음기를 단 총이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달이 참 밝습니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건 흉측한 도구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유감입니다.”
딱딱한 말투, 무상한 표정.
그러나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드는 여자의 동작은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하나의 무용처럼 아름답고 고아한 자태에 대적하던 사내들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자기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바닷사람을 홀린다는 전설의 괴물조차 현혹될 미모가 월광 속에서 반짝였다.
“죽이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
순간에 거리를 좁힌 노아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청했다.
“비명은 적당히 질러 주십시오.”
촤아악!
가볍게 휘두른 검격에 살점이 떨어지고 절규가 메아리쳤다.
피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
본래 계획은 이랬다.
기사단들을 분열시킨 뒤, 델라트 경과 페르아타 경만 밀입국 브로커 일행과 접촉해 밀항하는 현장을 덮치는 것.
조사한 바에 의아한 상급 기사 둘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반강제적으로 이번 무기 밀반출에 참여하고 있었다.
방법은 너무 뻔해서 저열했다. 그들은 일부러 평민 출신 기사들에게만 접근했다.
그것도 소중한 사람 때문에 큰돈이 필요한 자들로만.
그래서 레토는 델라트 경을, 아이스 중령이 페르아타 경을 맡았다.
그래야지 몰래 대기하고 있던 군종실장이 남은 기사들에게 접근해 접촉할 수 있었으니까.
“그만 마음의 짐을 놓으십시오.”
“다 알고 있습니다.”
“많이 힘드셨지요?”
“영창, 아니, 해군은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예상대로 절박했던 기사들은 베네딕토 대령에게 모든 것을 토로했다.
반면에 플랜시 소장은 그냥 내버려 뒀다.
겉으로 착한 척 굴면서 대외 평판에 목숨 거는 놈들은 대체로 저 잘났다고 착각하는 찌질이였다.
좁은 시야가 세상의 모든 것인 줄 아는 자기성애자.
찌질이는 알아서 덫에 걸려들었다.
본부에 방문했을 때 제국 출신 브로커 일행을 몰래 잠입시켰고, 술자리에서 레토가 실수인 척 흘렸던 무기고 열쇠도 알아서 페르아타 경에게 전달했다.
제 역할을 마친 플랜시 소장은 곧장 체포당했다.
브로커 일행들은 일부러 풀어놨다. 반역자 기사 두 놈과 함께 바다에서 체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체포를 특함이 직접 하려고 했다.
“…그랬는데 말이지.”
출발 준비를 명하려던 레토는 망연히 바다만 볼 뿐이었다.
수평선 가까이에 조그마한 어선 하나가 겨우 보였다. 해군의 또 다른 미친개가 난동을 부리고 있을 어선.
레토의 계획을 망친 주범이 있는 곳.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답을 구하는 목소리는 어딘가 조급했다.
“저, 중장님……!”
땅에 머리 박고 있던 아미가 발언권을 구했다.
그녀는 노아에게 정보를 몰래 주고 무기고에 들어가게끔 도와준 혐의로 벌을 받는 중이었다.
그 옆에는 호네스도 함께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 또한 노아에게 입막음을 당해 도와준 공동 혐의를 받는 중이었다.
“대위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역시 그랬군.”
레토는 어디서 눈치챘는지 대충 짐작했다.
“플랜시 소장을 아나?”
그때 물어봤던 게, 아무래도 이 모든 것의 단초가 된 듯했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노아 저 망할 것은 자존심이 강해서 이런 식으로 자기 따돌리고 일하는 걸 더럽게 싫어한단 말입니다!”
“…….”
“아이고, 요 망할 불세출의 등신들!”
답답해 속 터지겠다며 아미가 손으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중장님.”
저것도 재주라며 아미에게 감탄하던 아이스 중령이 레토를 불렀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뭘 어째…….”
후우우.
폐부 깊숙이 소금기 묻은 공기가 퍼져나가도록 숨을 연거푸 들이켜고 내쉬기를 몇 번.
“죽어라 혼나야지.”
“대위 말씀이십니까?”
“…….”
대답 없이 설핏 웃는 옆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이번엔 정말 차이려나.’
레토는 점점 가까워지는 어선을 눈에 담았다.
***
“개인 함선을 탈환한 반역자 둘.”
첨벙, 첨벙.
노아는 피로 칠갑한 전직 기사, 현직 반역자 둘을 포박한 채로 바닷물에 던졌다.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군사 경찰들이 기절한 반역자들을 척척 건져 냈다.
“그리고 밀입국 브로커 일행 여덟.”
첨벙.
여덟 중 한 명인 브로커만 바다에 던져졌다. 금이 간 안경을 쓴 브로커는 쌍코피를 줄줄 흘린 채로 기절 중이었다.
“나머지 일곱은 어디 있습니까?”
브로커를 건지던 군사 경찰 한 명이 물었다.
“배에 있습니다.”
군사 경찰들이 배에 오르는 사이, 노아는 탈취된 개인 함선을 따로 챙겨 내려왔다. 뒤에서 경악하는 비명이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중장님.”
굳은 얼굴을 한 레토 앞에 선 노아가 싱긋 웃었다.
“탈취된 개인 함선을 도로 가져왔습니다.”
“…….”
레토는 답이 없었고, 노아도 굳이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닌지라 대충 아무 데나 개인 함선을 던져뒀다.
그리고 자신이 입은 개인 함선도 벗었다.
“중장님.”
노아가 물었다.
“제가 준 기회에 대한 답이 고작 이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