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지금껏 특함과 함께한 훈련은 다양했다.
10m 높이에서 다이빙하기, 무장 행낭을 이고 수영하기, 오로지 평영으로만 2km 수영하기, 땡볕 아래서 죽어라 체조하기.
그 외 기타 등등.
“개인 함선을 타려면 반드시 해야 할 기초 훈련입니다.”
아이스 중령은 저 말을 빌미로 모든 훈련에 기사들을 동행시켰다.
왕실 기사단도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 왔다.
하지만 특함에서 하는 훈련은 목적 자체가 달랐기에 수준이나 격 또한 차원을 달리했다.
“우웩……!”
여태 했던 훈련을 떠올린 젊은 기사 한 명이 헛구역질했다.
“고의가 분명합니다! 일부러 그런 훈련만 시키는 거라고요!”
“하지만…….”
조금 전에 헛구역질하던 기사가 우물거렸다.
“…그놈들, 그걸 다 소화하잖아요.”
억울하고 화가 나도 어찌하지 못하는 건, 특함 대원들이 고문이나 다름없는 훈련을 전부 완수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완수도 아니었다. 맥도 못 추리는 기사들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훈련하니, 평을 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몇몇은 팔다리에 무거운 각반까지 차고 수행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침묵하던 페르아타 경이 바싹 말라붙어 버린 입술을 가까스로 열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지금부터 나눌 대화는 해군들이 자주 오가는 이곳 식당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느 구석진 비품실로 숨어 들어갔다.
요 일주일 사이에 극한 훈련으로 죽어 가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발길이 드문 곳을 찾아냈다.
들어선 비품실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엉망이었다.
기사들은 그 비좁은 곳에 어찌어찌 자리를 잡았다.
“후우…….”
지친 한숨을 시작으로.
“…이틀 뒤에 감행하자.”
페르아타 경이 말했다.
“더 이상 해군 새끼들에게 이딴 식으로 휘말릴 수는 없다. 이곳은 그놈들의 영역이야. 어떤 맹수도 낯선 바다 앞에서는 맥을 못 추리는 건 당연하다고.”
그러니 즉, 자신들이 특함보다 약한 건 아니란 뜻이었다.
정신 승리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발언한 페르아타 경은 물론이고 다른 기사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그만큼 자존심이 많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젠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본래 자신들의 목적을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제 델라트 경이 말씀하셨다.”
그 말에 기사들이 긴장했다.
“사흘째가 되는 자정에 배가 도착한다고 한다.”
“제국 놈들이 직접 오는 겁니까?”
“플랜시 소장이 이곳으로 온다는군.”
그렇게 말한 페르아타 경은 느닷없이 양말 안에 손을 넣었다.
쫀쫀한 고무줄로 감싸인 발목 근처에서 웬 물건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암호문이 적힌 쪽지.
다른 하나는 네모나고 시커먼 카드.
“이건 개인 함선이 보관된 무기고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다.”
며칠 전 해군 제독들과 마신 술자리에서 플랜시 소장이 델라트 경을 통해 준 것이었다.
“암호문에는 수영 훈련장 근처 해변에서 쪽배를 보내겠다고 적혀 있군.”
“밤에 움직여야 하는군요.”
“그래. 우리가 묵는 영사에서…….”
한참 계획을 설명하던 페르아타 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제 있나?”
“그, 정말 될까요?”
아까부터 유달리 머뭇거리던 젊은 기사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여긴 해군 본부입니다. 제국에서 가장 수준 높은 기술력을 자랑하는데, 이건…….”
“렐리 경.”
페르아타 경이 답답하단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름을 불린 젊은 기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자세를 똑바로 고쳤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난 두려움과 망설임까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떳떳한 짓은 아니지.”
페르아타 경이 자신들의 도둑질을 순순히 인정했다.
아니, 도둑질이란 표현은 차라리 귀여웠다. 지금 자신들은 타국에 무기를 빼돌리는 반역을 공모 중이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자처한 일이다.”
“페르아타 경…….”
“그대도 돈이 필요하니 참여한 거 아닌가?”
“…….”
렐리 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푹 떨군 고개 아래로 입술을 말없이 깨물 뿐이었다.
“걱정 말게.”
잘게 떨리는 어깨 위로, 페르아타 경이 손을 얹으며 다정히 속삭였다.
“우리는 절대 들키지 않을 거니까.”
“…….”
“그러니 애새끼처럼 징징거릴 시간에 조부모에게 지어 줄 약값 생각이나 해.”
끝내 렐리 경의 입술에 피가 맺혔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덩달아 겁을 먹었던 기사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격려를 빙자한 협박을 끝낸 뒤, 페르아타 경을 비롯한 기사들이 비품실 밖으로 나갔다.
“…이틀 뒤라.”
기사단이 나가 버리자, 비품실 가장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나저나 진부한 협박이네.”
이젠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자들로 가득한 진열장 뒤에서, 레토가 느슨한 미소를 지은 채로 문을 노려봤다.
“제군들.”
그의 손에 들린 무전기에서 지지직 소리가 났다.
“사냥 날짜가 잡혔다.”
무전기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몰이를 시작하겠습니다.]
***
“오늘은 개인 함선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오늘도 지옥 같은 훈련이 진행될 거라고, 만약 그렇다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려던 페르아타 경이 멈칫했다.
“…뭐라고요?”
너무 놀라서 굳어 버린 페르아타 경에게, 아이스 중령이 한 번 더 알려 줬다.
“개인 함선을 보시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
“지난 일주일간 훈련도 열심히 하셨으니, 운항은 힘들어도 한 번 보시는 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론 중장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지만요.”
아이스 중령이 어떠냐고 재차 물었다.
“아, 그…….”
페르아타 경이 말을 머뭇거리는 건 별 뜻 없었다.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지를 뻔한 제 입꼬리를 가까스로 붙잡기 위해서였다.
설마 이 타이밍에 개인 함선에 접근할 기회가 생기다니.
‘하늘이 우릴 돕는군!’
시기적절하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무척 기대됩니다.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군요”
“하하, 뭐 영광까지야.”
아이스 중령이 아부가 지나치다며 껄껄 웃었다.
“그래 봐야 관리 귀찮고 무겁기만 한 무기에 불과합니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7년 전 아들라보르 역공전을 성공시킨 주인공이지 않습니까.”
“진짜 성공시킨 주인공은 중장님이시지요.”
“…….”
자신이 실수했다고 판단한 페르아타 경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이스 중령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7년 전에 중장님은 졸업을 갓 앞둔 사관생도였습니다.”
“그렇게 젊었었군요.”
페르아타 경이 내심 놀랐다.
오케아누스 중장의 활약상이야 듣기 싫어도 원체 유명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련자에게서 직접 들으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그때 참전했었는데, 그 어린 꼬맹이한테 목숨을 몇 번이고 빚졌지요.”
“그렇게 연을 맺으셨군요.”
“저는 그래도 목숨 부지하고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아이스 중령이 겸연쩍게 웃었다.
페르아타 경도 이번엔 눈치껏 말을 아꼈다.
‘알 법하군.’
7년 전 연합제국군의 침입은 왕국에게도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역공전 역시 화려한 승리 이면에 수많은 피해가 있었다.
그리고 피해는 해군을 비롯한 남부에 집중되었다.
***
“아니 이게 누구신가!”
복도를 지나가던 노아는 맞은편에서 저를 알은체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곧장 걸음을 멈추고 경례했다.
“대위, 노아 벨로. 플랜시 군수 사령관님께 인사드립니다.”
“내가 직속 상관도 아닌데 뭘 또 그러나.”
플랜시 소장이 껄껄 웃었다.
경례를 거둔 노아는 한 번 더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벨로 대위는 여전히 대단하더군. 얼마 전에 있었던 해적 소탕에서도 크게 활약했다지?”
“부족한 실력이 부풀려졌습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교만이랬어.”
말은 그렇게 해도, 플랜시 소장은 제게 예를 갖추는 노아가 마냥 흡족했다.
노아는 그런 플랜시 소장을 물끄러미, 하지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끔 바라봤다.
군인 특유의 매서움이나 무뚝뚝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 인상이었다.
호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다정한 눈매는 딱히 웃지 않아도 둥글게 휘어 있었다.
하지만 신체만큼은 군인답게 다부졌다. 다만 술을 즐겨 드시는지, 아랫배는 살짝 튀어나왔다.
“그나저나 아쉽게 되었어.”
그 말에 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플랜시 소장은 뭘 모르는 척하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진급 말일세.”
“아…….”
“나는 이번에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할 줄 알았거든.”
소장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자, 노아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아직 제 실력이 부족하여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만큼은 교만이라 혼내지 말아 주십시오.”
“어이구, 말하는 거 보게.”
예상치 못한 농담에 플랜시 소장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래도 말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까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오케아누스 중장이 그댈 아낀다고 생각했는데….”
“…….”
“그냥 내 혼잣말이니 넘어가 주게.”
사람 좋은 미소로 부탁하자, 노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군. 이번에 본부 측 진급자는 아무도 없다지?”
“대신 다른 곳에서 좋은 소식이 많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어휴, 내 부하들도 대위처럼 말 좀 곱게 하면 얼마나 좋겠나.”
플랜시 소장은 짧은 칭찬을 끝으로 다음에 보자며 노아의 팔뚝을 가볍게 두들겼다.
노아는 경례로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아까보다 조급함이 살짝 느껴지는 두 다리는 점점 속도를 내고 있었다.
“아미.”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아미를 찾았다.
“아, 지금 치티아 중위님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사무실에서 혼자 남아 서류를 정리 중이던 호네스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
“중장님이 부르셨습니다.”
“중장님이?”
노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사들에게 부대 시설을 소개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
“대위님, 괜찮으십니까?”
“호네스.”
“일병, 호네스 메라.”
호네스는 반사적으로 관등성명을 했고, 노아는 그런 후임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소집 명령이 내려진 적 있나?”
“없습니다.”
“그래?”
노아는 그 말을 끝으로 제 자리에 앉았다.
“…….”
하지만 폭풍이라도 칠 것처럼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호네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랑이고 나발이고…….’
노아가 속으로 비죽였다.
‘…일단 죽여야겠네.’
역시 계급장 떼고 한 판 제대로 붙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