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45)

17.

“센샤 네 고모가, 이게 몇 번째 이혼이었지?”

“잠깐만…….”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하던 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유치원 졸업하기 전에가 네 번째였어.”

“맞아, 맞아. 그때 울 언니랑 아스도 그 이야기 엄청 했어.”

“나도 나중에 크면 고모처럼 살 거야!”

아이스 중령이 들었다간 당장 거품 물고 쓰러질 소리를, 센샤는 당당하게 외쳤다.

“이야, 멋진 신여성!”

“센샤는 할 수 있다!”

클라레와 리리가 환호하며 응원했다.

“선생님, 쟤네 또 떠들어요.”

“…….”

안경 쓴 소년이 선생님께 고자질했다.

“치, 친구 여러분…….”

마레이 학교 첫 부임인 젊은 선생님은 아이들의 수준 높은 대화에 진땀을 뻘뻘 흘렸다.

“지금은 책 읽는 시간이니까, 조금만 조용히 할까요?”

“네에!”

클라레와 친구들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다시 조용해진 도서실을 슥 둘러본 선생님이 뒤늦게 가슴을 쓸었다.

“…이래서 촌것들은.”

그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델라트 경의 아들이었다.

“친구분!”

놀란 선생님이 델라트 영식을 불렀다. 하지만 영식은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눈으로는 클라레 쪽을 힐끔거렸다.

눈이 마주친 클라레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델라트 영식이 씩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도 으쓱으쓱거렸다.

“…히잉, 어떡해.”

결국 클라레가 훌쩍거렸다.

“쟤 나 좋아하나 봐……!”

“아, 아니야!”

델라트 영식이 벌떡 일어섰다. 책을 읽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봤다.

델라트 영식은 얼굴을 붉힌 채 씩씩대고 있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내, 내가 널 왜 좋아해!”

하지만 클라레는 듣는 척도 않았다. 오히려 우는 소리를 더욱 크게 냈다.

“울지 마…….”

“클라레, 많이 속상해?”

주변에 있던 여자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 클라레를 위로했다.

“언니랑 아스가 그랬어.”

클라레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철없고 유치한 남자애들은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힌다고…….”

“나, 나는 너 같은 거 제일 싫어!”

“좋으면 좋다고 말해, 바보야.”

“아니라니까!”

흥분한 델라트 영식이 클라레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너 같은 건……!”

그러고는 반 친구들을 둘러보며 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한 너희 평민 따위, 우리 아버지가 다 혼내 줄 거야!”

“난 귀족인데?”

안경 낀 소년이 야무지게 반박했다.

“…그, 그래서 뭐!”

잠시 멈칫했던 델라트 영식이 다시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가 일만 끝내면, 너희 남부는 망할 거야!”

“아니야.”

여태 침묵하고 있던 짧은 머리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어수선하던 도서실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해군이…….”

소년은 점잖은 목소리로,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해군이, 남부를 지켜 줄 거야.”

***

“…걔 이름이 세레니였나?”

그날 저녁.

클라레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식사 중에 말했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던 아미는 생선 뼈를 바르면서 말했다.

“밤톨머리 꼬맹이. 얌전하고 말수 없는 남자애.”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진중한 아이죠.”

“전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애가 참 똑똑하고 참하네.”

“그렇죠?”

“아니, 왜 언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세레니를 칭찬할수록, 아스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세레니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야!”

클라레가 가슴을 활짝 펼치며 자랑했다.

그러자 아미가 코웃음을 쳤다.

“남녀 사이에 우정은 없어. 애정과 애증만 있을 뿐이지.”

“내 동생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말래?”

노아는 아미가 열심히 뼈를 골라내며 모은 생선들을 클라레의 접시에 옮겨 줬다.

접시를 빼앗긴 아미가 노아를 노려봤지만, 맛있게 먹는 클라레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근데 언니.”

생선을 우물우물 먹던 클라레가 물었다.

“애증이 뭐야?”

“어른들 단어야. 너에겐 아직 수준이 높아.”

“…….”

애 취급에 삐친 클라레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곤 휙 고개를 돌려 아스를 찾았다.

“아스, 애증이 뭐야?”

“도련님 같은 사람이 쓰는 말이에요.”

“오빠 말이야? 그럼 욕이잖아!”

깜짝 놀란 클라레가 아미에게 떽, 하고 소리쳤다.

“나쁜 말 하면 안 돼! 아미 언니는 군인이니까 예쁜 말 써!”

“…죄송합니다.”

아미가 꾸벅 고개 숙여 사과했다.

식사가 끝난 뒤, 클라레는 아스와 함께 방으로 갔다.

학교에서 나눠 준 안내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노아와 아미는 먹은 것들을 치우고 설거지했다.

“이 집 오빠는 아직도 소식이 없냐?”

“할머니가 엄청 화가 나셨거든. 이번에는 그 새끼도 쉽게 못 들어올 거야.”

“그 인간은 철이 없는 게 아니라 뇌가 없는 걸지도 몰라.”

“그래서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면 머리를 쪼개 버릴 거래.”

“푸하하하!”

아미는 배꼽이 떨어질 정도로 웃었다.

정작 노아는 집 나간 오빠 생각에 두통이 도지기 직전이었지만.

“내 주위에 있는 남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인지…….”

“거기에 중장님도 들어가?”

고무장갑을 벗은 아미는 근처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살짝 젖은 앞치마는 대충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중장님은…….”

수도를 잠그고, 개수대를 마른행주로 말끔하게 닦은 뒤에야 노아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잘 모르겠어.”

살짝 신경질적으로 던진 행주는 개수대 안에 툭 떨어졌다.

“…네 마음을 모르겠단 거야?”

아미가 묻자,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하는 건 확실해. 난 분명 그 머저리를 사랑해.”

“그럼 다시 사귀어도…….”

“나 청혼받았어.”

“…어?”

도중에 말이 끊겨 그대로 입을 쩍 벌렸던 아미가 뒤늦게 제 턱관절을 문질렀다.

하지만 신경은 오로지 노아에게 쏠린 채였다.

“그, 그때, 그, 내, 내기 말이야?”

그거 그냥 장난 아니었어?

그날은 특함 부대원 전원이 다 있었고, 다들 그때 일을 짓궂은 장난 따위로만 여겼다.

어딜 봐도 진정성 따윈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의 당사자였던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였어.”

“…….”

“나랑 결혼하고 싶대.”

“우와…….”

그새 사색이 된 아미가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럼, 받아들였어?”

노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답답해진 아미가 더 따지려던 차에, 노아가 먼저 말했다.

“거절했어.”

“잘했어! 너 아직 젊은데 무슨 결혼을…….”

“근데 사랑한다고 말했어.”

“…어이구야.”

의자에 붙였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아미는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찌할 마를 몰라 끝내 질끈 감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사랑한다고 말했다며?’

그런데 청혼은 거절해?

말의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궤변이나 다름없는 소리에 아미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친구의 속내를 알아챈 노아가 피식 웃으며 부엌 벽에 난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잔잔하게 깔린 창밖으로 희미한 정원 불빛이 보였다.

“자신이 없어서.”

“무슨 자신?”

“뭐, 이것저것?”

“…혹시 중장님한테 약점 같은 거 잡혔어?”

그 새끼가 네 몸으로 갚으래?

아미가 제법 진지하게 물었다.

노아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자신이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그 미친개가 사랑스럽고 소중한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멍청한 조건이 어디 있을까.’

노아는 레토가 가져간 검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그런데 결혼해 주면 검을 주겠다는 레토에게, 저는 사랑한다는 고백과 진급을 방해한 이유를 말해 줄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스스로 일을 더욱 어렵게 꼬는 중이었다.

그리고 레토는 이 쉬운 두 가지 조건을 못 해내 쩔쩔매는 중이었다.

대놓고 쩔쩔매진 않았지만, 노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자신들 사이에 남은 벽.

그 뒤에서 보여 주는 겁먹은 모습.

“…감이 잡히는 거 같아.”

요 며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영문 모를 레토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보여 주는 중이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분위기 잡는 친구에게, 아미가 질린다는 얼굴로 물었다.

“결국, 뭐가 자신이 없는 건데?”

“그 새끼를 안 패고 넘어갈 자신.”

“…….”

“사랑하는 마음은 둘째치고, 일단 한 대는 패야 속이 후련할 거 같아.”

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랑 얼굴 빼고 패.”

***

왕실 기사단이 남부에 도착한 지 어느새 일주일이 되었다.

예정된 교류 일정은 한 달이었으니, 기사들은 이제 딱 4분의 1을 보낸 셈이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지나가던 해군이 기사들을 보자마자 기함했다.

“어휴, 꼭 함정 생활 6개월 한 것 같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기사들은 고작 일주일 만에 바다 생활 6개월은 한 사병처럼 낡고 추레해졌다.

아니, 차라리 해군들은 그 시간 동안 강해지기라도 했지, 그들은 되레 연약해져 갔다.

“그게 말입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부사관 한 명이 사정을 설명했다.

“특함의 훈련에 전부 다 동참하고 있답니다.”

그 말에 군인들이 공포에 질렸다.

“특함 훈련을? 왜?”

“아니 왜 미친 짓을 골라서 하는 거랍니까! 수도에 뇌를 두고 왔답니까?”

“아마 그거겠지.”

군인 중 한 명이 알 만하다며 혀를 찼다.

“개인 함선이 타고 싶었나 봐.”

비단 저 기사들만이 아니라, 해군이라면 누구나 개인 함선을 욕심내고 특함을 동경한다.

특함은 해군의 새로운 명성이었다. 눈부신 활약으로 남부 주민들에게 평판이 좋았고, 그런 만큼 대우마저 특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함정 임무 열외.

그리고 본 계급보다 두 단계 올려 받는 봉급.

그래서 멋도 모르고 지원했다가 눈물, 콧물, 구토물 다 쏟아 내며 도망치는 후임들을 보는 게 선임들의 즐거움이었다.

“…특함은 훈련 엄청 빡센데.”

특함에게 주는 특별 대우가 괜히 ‘특별’이 아니었다.

‘개인 함선’이라는 위험한 무기를 다루는 만큼, 특함 대원들은 해군에서 가장 힘들고 고된 훈련을 수행한다.

얼마나 힘드냐면, 만일 특함과 공동 훈련이 잡히는 날이면 그 부대원들은 유서를 작성해 관물함에 넣어두는 관행까지 생길 정도였다.

“…전 그걸 탈 바에야 함정을 타겠습니다.”

“내 말이.”

“그만 갑시다. 저희도 바쁘잖습니까.”

해군들은 동정 아닌 동정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전부 듣고 있었던 기사들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경, 페르아타 경.”

기사 중 한 명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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