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입에는 맞으세요? 부족한 솜씨라 죄송해서 어쩐담…….”
“전부 맛있습니다. 특히 이 해산물 스튜는 계속 넘어가네요.”
“아스가 해 주는 음식은 다 맛있어요!”
“클라레, 입에 음식 넣고 말하는 거 아니라고 했지.”
식사 시간은 시끌벅적했다.
레토는 생각 이상으로 클라레와 쿵짝이 잘 맞았고, 아스도 여신의 포말 한 병 받고는 아주 그냥 이것저것 챙겨 주기 바빴다.
‘…어째 좀 별로네.’
노아는 떨떠름했다.
그래도 제 가족과 스스럼없이 웃으며 대화하는 레토가 싫은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흐뭇하고 기뻤지.
식사를 마친 뒤엔 디저트를 즐겼다.
“아스가 만든 우유푸딩! 내가 젤 좋아하는 거!”
클라레는 의자에 올라서서는 푸딩 그릇을 들고 자랑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서지 말라고 했지?”
“언니는 만날 잔소리야.”
“잔소리를 안 하게끔 해 주라.”
“어휴, 손님 앞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하하하!”
디저트를 전부 먹은 뒤엔 설거지를 했다. 손님인 레토는 저도 도와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쫓겨났다.
“손님이 무슨 설거지예요.”
“됐으니까 클라레랑 놀아 주세요.”
“형부 아저씨! 내가 놀아 줄까요?”
노아와 아스가 정리하는 동안, 클라레는 제 방에서 가져온 장난감을 보여 주며 자랑했다.
그중에는 레토에게 선물로 받은 다과 놀이 세트도 있었다.
“이게 식칼토끼! 무적의 토끼예요!”
“아, 이거 초대장에 붙어 있던 스티커.”
레토가 알은체를 했다.
가위표 눈을 한 토끼 인형은 피가 묻은 식칼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유명한 모양인데, 그러기엔 약간 잔혹성이 느껴졌다.
“식칼토끼는 정의의 편이에요.”
클라레가 인형의 팔을 흔들며 이것저것 설명했다.
“식칼토끼의 부모님이 불법 도축업자에게 살해당했거든요. 그래서 화 난 토끼가 축산물 위생관리법이나 막, 법을 어기는 나쁜 놈들을 벌줘요!”
“어…….”
레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애들 만화치고는 내용이 상당히 무거웠다.
“근데 아저씨.”
“응?”
“언니랑 결혼할 거예요?”
“으음…….”
레토는 대답하기 전에 거실 문밖을 힐끔거렸다.
이 집은 귀족 저택과 비교하면 작지만, 그 구조나 방의 배치는 얼추 비슷했다.
평민의 집이라기엔 대귀족의 여름 별장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이곳 거실에서 식당과 부엌은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혹시 들릴지도 모를 것 같아서 레토는 목소리를 낮췄다.
“언니분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오오!”
클라레가 감탄했다.
“젊은이의 용기가 가상합니다!”
“…….”
레토는 제 허벅지를 꼬집으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클라레의 언어 구사력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치만 난 안 도와줄 거예요!”
“어…….”
히죽거리던 레토의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도와주면, 안 됩니까……?”
애절한 진심을 섞어 부탁해도, 클라레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완고해졌다.
“물론 난 아저씨가 형부가 되면 참 좋을 거 같아요.”
“그치?”
“하지마안.”
으음, 클라레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곤란해했다.
“원래 이런 연애 문제느은, 제삼자가 끼어들면 좋은 꼴을 못 보잖아요오.”
어제 아스 몰래 훔쳐 들었던 라디오 방송 ‘부케를 더럽힌 내 친구’ 편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괜히 도왔다가, 아저씨가 나한테 반해서 막, 그으, 어어, 개판 나면 어떡해요.”
“…….”
“그러면 난 울 언니랑 머리카락 뜯으면서 싸워야 하는데.”
“그럴 일은 없습니다만…….”
“내가 이렇게 귀여운데, 당연히 그럴 일이 있죠!”
그때 레토는 깨달았다.
노아에게 오빠나 수상쩍은 언니가 있는 건 몰랐어도, 동생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부대 내에서 도시 전설처럼 전해지는 ‘무용담’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별 시답잖은 소리라고 여겼다.
어린애가 사고를 쳐 봤자 얼마나 치겠다고.
그런데 눈앞에 있는 어린 예비 처제를 보고 있자니, 그 무용담은 정말 일부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클라레.”
그때, 정리를 마친 노아와 아스가 거실로 돌아왔다.
“언니, 아스!”
쪼르르 달려간 클라레가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차라도 마시고 가시지…….”
아스가 아쉬워하며 차를 권했다.
포도주를 받고 난 뒤로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언니를, 노아는 배신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닙니다. 저도 내일 출근해야 하니 일찍 가 봐야죠.”
“히잉, 또 놀러 오면 좋겠다…….”
클라레가 서운한 듯이 입술을 삐죽였다.
아이는 어느새 레토의 바짓자락을 손가락으로 집은 채 살살 당기고 있었다.
“그러면 영애께서 또 초대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영애 놀이는 이제 안 할래요. 생각보다 별로네.”
“하하하.”
“다음에도 선물 갖고 와요!”
레토는 클라레와 가볍게 포옹하고, 아스와는 악수하며 작별했다.
그리고 노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네.”
“내일도 일찍 출근하셔야 하니, 어서 가십시오.”
“밖인데, 계속 존대할 거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레토가 얼굴을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애쓴다…….”
노아는 기꺼이 반말로 돌아왔다.
능청스럽게 다가오던 레토의 입술은 손가락 세 개로 철통 방어하면서.
하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내가 말한 조건, 기억할 텐데?”
“아…….”
시선이 마주친 레토가 머쓱하단 듯이 눈을 굴렸다.
그러곤 슬쩍 제 입술을 막던 노아의 손가락을 제 손으로 감싸듯 쥐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역시, 노아는 딱히 말리진 않았다.
“…….”
대신 제 눈치를 살피는 레토를 의아하게 여길 뿐이었다.
‘도대체 왜 저럴까?’
자신이 제시한 조건은 정말 별거 아니었다.
검을 달라는 건 추후의 문제고, 진급을 방해한 이유를 말하는 건 슬슬 짐작이 가려 했다.
그 짐작이 조금 불쾌하긴 하지만, 일단 당장 걸고넘어질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걸까.
‘가지고 노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날 만만한 심심풀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대하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은 만날 때마다 들었다.
그럴 때면 비참할 정도로 슬프다가도, 나 또한 오기로라도 먼저 이 마음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다시 마주하는 레토는 그냥 겁쟁이였다.
자신들 사이에 있던 거대한 벽이, 아무래도 레토가 제 본심을 숨기는 원인인 것 같았다.
“…뭐가 무서운 건데?”
보이지 않는 벽을 만지며, 노아가 물었다.
“…….”
레토는 벽 뒤에서 웃을 뿐이었다.
***
다음 날.
노아는 출근하기 무섭게 아미를 찾았다.
영내 숙소에서 지내는 아미는 다른 대원들보다 늘 먼저 출근했고, 역시나 사무실에 먼저 앉아 있었다.
“아, X 같은 X발 새끼가……!”
다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흉측한 욕설을 읊조리며 살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노아가 도시락통을 건네며 물었다. 아침에 아스가 많이 만들었으니 부대원들하고 같이 먹으라고 싸 준 샌드위치였다.
“매점에서 아침 해결하려고 고르고 있더니, 웬 새끼가 군기 빠졌냐면서 갈구잖아! 그것도 대위 새끼가!”
“일단 나도 대위다만, 치티아 중위.”
“아, 몰라! 어쨌든 내가 얼굴하고 이름 다 외웠다, 그거야.”
한참을 씩씩거리던 아미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중장님한테 다 이를 거야.”
미친개로 유명한 레토는 제 부하들에게도 성질머리 안 좋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런 성격은 아군이기에 더욱 빛을 발휘할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에.
“이럴 땐 중장님이 우리 편이라 참 좋다니까.”
화가 좀 풀렸는지, 아미는 건네받은 도시락통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 크게 베어 물었다.
“응.”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알아봐 달라고 했던 거.”
쪽지를 받아 든 노아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
아미에게 부탁한 건 플랜시 소장에 대한 정보였다.
그런데 아미가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알아낼 수 없었다.
“정보 제한이라고?”
“원래 제독급 정보에 손대는 게 어렵긴 한데…….”
“네 등급이랑 실력으로도 안 돼?”
“친구야, 날 높이 사 줘서 고맙긴 하다만…….”
샌드위치 하나를 그새 해치운 아미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말했다.
태연한 목소리치고는 그녀의 검은 눈 또한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좀 달라.”
아예 정보 확인 자체가 막혔다.
“소장의 정보를 막을 수 있는 게 누구겠어?”
그 말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독급 정보를 막는 건 어려운 일이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즉, 애초에 제독급을 제어할 수 있는 건 그 이상의 제독뿐이었다.
참모총장인 아드벨로 대장이 공석인 현재.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중장님이구나.”
아미가 침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랜시 소장님을 의심하긴 싫은데, 그렇다고 중장님을 의심하는 건 더 싫단 말이야.”
“그 인간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짓을 하진 않으니까.”
“내 말이 그거야.”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아미는 다른 식으로 플랜시 소장에 대한 정보를 찾아냈다.
“군수 사령부 출퇴입 기록이야.”
아미가 손가락을 허공에 굴렸다. 뜻을 알아챈 노아가 쪽지 뒷면을 돌려봤다.
거기엔 플랜시 소장의 외출 기록이 있었다.
“하하……!”
노아는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플랜시 소장이 외출한 날은, 자신이 아스의 전화를 받고 마레이 학교로 서둘러 향했던 날과 똑같았다.
클라레가 델라트 경의 아들과 싸웠던 날이기도 하며.
“델라트 경이 교류 차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온다는군. 그의 직속 부하들도 함께 말이야.”
교류 방문을 통보했던 바로 다음 날에 해군 본부에 도착하는 무례함을 선보였으나, 정작 델라트 경 본인은 본부 밖에 있었던 날.
“…같잖네.”
노아의 손에 들린 쪽지가 처참히 구겨졌다.
“이것들을 어떻게 죽이지?”
“어이구야.”
아미는 못 들은 척하며 두 번째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네놈들은 죽었다, 이제.’
맛있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아미는 눈앞에 있는 또 하나의 ‘미친개’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
“예상대로입니다.”
아이스 중령은 레토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서류 표지에는 ‘기밀’이라 적힌 시뻘건 도장까지 쾅 찍혀 있었다.
레토는 서류를 한 장씩 넘겼다.
“벨로 대위와 마레이 학교로 외출하셨던 날, 플랜시 소장과 델라트 경이 접촉한 걸 확인했습니다.”
“접촉한 곳은 여기 술집 맞아?”
서류에 적힌 술집 이름이 눈에 익었다.
“다섯 번을 확인했고,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무슨 배짱으로 여길 간 거지?”
“뭐…….”
아이스 중령이 잠시 고민했다.
“지능을 대가로 배짱을 얻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서 술을 마실 리가 없지.”
“어쨌거나 드디어 덜미를 잡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