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45)

13.

“말 나온 김에 하는 소리인데…….”

아미가 노아를 힐끔거렸다.

“그, 네 진급 말이야…….”

“…….”

“아니, 일단 좀 들어 봐. 너 또 언제 칼 뽑았냐…….”

‘진급’이란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치를 떠는 노아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아미가 서둘러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내가 정보 장교잖아.”

그리고 특함 소속 덕에 일정 수준의 비공개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만약 노아가 예정대로 소령으로 진급했다면, 그녀는 군수 사령부에 임시 배정받아 장교 교육을 받을 예정이었다.

“…뭐?”

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야?”

“공개적으로 언급은 안 되었지만, 실제로 이번 영관급 장교 연수 훈련을 군수 사령부에서 하기로 했거든.”

“난 몰랐는데?”

“그거야 언급할 필요가 없어졌…….”

어라?

말을 하다 멈춘 아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

“우리 본부 측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진급 유력 대상자였던 노아만 떨어진 게 아니었다.

오케아누스 중장은 지난 진급에서 노아만이 아니라, 본부 내 제 관할 후보들을 전원 떨어트렸다.

그러니 연수 훈련 장소 또한 알려지지 않았다.

“아미.”

잠시 말이 없던 노아가 물었다.

“한번 알아봐 줄 수 있어?”

***

“알아보는 거야 어려운 게 아닌데, 의심하는 이유가 뭔데?”

“나중에 말해 줄게.”

“뭘 알아야 도와주든가 하지!”

그래도 아미는 끝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떨떠름해하긴 했지만, 노아가 쓸데없는 거로 누군가를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 상황이 꺼림칙한 건 노아였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퇴근 준비를 위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중.

노아의 손은 푸른색 함상복 상의를 벗다 만 채로 한참을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레토가 심술로 제 진급을 방해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알고 있던 레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고, 끝내는 헤어졌다.

“플랜시 소장을 아나?”

그러나 얼마 전 레토가 제게 넌지시 던졌던 질문.

“이번 영관급 장교 연수 훈련을 군수 사령부에서 하기로 했거든.”

아미가 말해 준 진급 이후의 예정 사항.

“…하아.”

답답해진 노아는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었다. 벗어던진 함상복은 그대로 빨래통에 직행했다.

‘일단 집에 가서 좀 쉬….’

돌아갈 채비를 마친 노아가 건물을 나온 순간.

“이제 나왔어?”

주차장 입구에서 저를 기다리던 레토가 방긋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아예 노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늘도 수고했어.”

“중장님…….”

“응, 왜 그래?”

저를 부르는 노아에게 레토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노아는 제게 다가오는 남자를 홀린 듯이 바라봤다.

하필 또 수평선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도 적당했다.

그래서 붉은빛을 머금은 채 흩날리는 은발이, 눈 앞을 가리는 앞머리가 거슬릴 법한데도 저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거기에 홀려 버린 자신이.

노아는 내심 놀라웠다.

‘아아, 빌어먹을.’

또 이렇게 반해 버렸다.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어. 피곤해?”

레토는 몸을 살짝 낮추며 노아의 안색을 세심하게 살폈다.

“운전하는 동안 한숨 좀 자.”

“중장님.”

“응?”

“여긴 아직 본부입니다.”

“…까칠하긴.”

레토가 장난스레 두 손을 반쯤 들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다들 바쁜 걸 알면서.”

노아의 손가락이 그의 콧잔등을 툭, 건드렸다.

“그렇게 땡땡이를 치신 겁니까?”

“…어?”

깜짝 놀란 레토는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렸다.

저를 빤히 응시하는 노아는 시큰둥한 표정도, 한 대 쳐 때리고 싶단 표정도 아니었다.

보드라운 미소가 심장을 저릿하게 했다.

“기사단을 너무 자극하지 마십시오. 국왕 전하의 직속 조직입니다. 대장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 할 말을 마친 노아는 레토를 스쳐 지나갔다.

홀로 남은 레토는 노아의 뒷모습만 멍하니 눈으로 좇았다.

“뭐 하십니까?”

주차된 레토의 차 앞에 멈춰 선 노아가 소리쳤다.

“제 동생이 기다리다가 목 빠집니다.”

“어…….”

레토가 서둘러 차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앉은 노아는 덤덤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별 감흥 없는 모습이 얼핏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레토는 그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노아.”

차의 시동을 걸면서, 레토가 물었다.

“역시 너, 나 엄청 좋아하는구나?”

“개소리가 전공이신 모양입니다.”

“거짓말. 눈썹 꿈틀거렸어.”

노아의 손이 움찔거리다가 망했단 듯이 입술을 비틀었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썹을 가리려고 했다.

곧 붉은 애마가 주차장을 부드럽게 벗어났다.

***

“으음…….”

전신 거울 앞에 선 클라레는 제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스!”

그러곤 냉큼 아스를 불렀다.

뒤에서 아가씨가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스가 싱긋 웃었다.

“왜 그러세요? 옷이 마음에 안 드세요?”

“으으응. 옷은 아주 예뻐!”

클라레가 입은 분홍색 드레스는 아스가 직접 만든 입학 선물이었다.

레이스랑 리본이 잔뜩 달린 드레스는 클라레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기도 했다.

“좀 심각한 문제가 있어.”

“어머, 무슨 문제인데요?”

“정말로 심각해…….”

신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클라레가 다시 거울을 응시했다.

“나 말이야…….”

지켜보던 아스도 덩달아 긴장했다.

“…너무 귀엽지 않아?”

거울 속 클라레가 두 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이건 정말, 너무 귀엽고 예쁜 거 같아.”

“아가씨…….”

곁으로 다가온 아스가 클라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치! 나 너무 귀엽지!”

“귀여운 게 죄라면, 아가씨는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죠.”

“그게 뭔데?”

“평생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하는 거예요.”

“세상에나! 내가 그만큼 무서운 귀여움인 거야?”

털썩 주저앉은 클라레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아, 세상은 비정하기도 하지!”

왜 나에게 이런 귀여움을 줬단 말인가!

클라레는 비운의 주인공처럼 훌쩍거렸다. 그리고 아스는 어느샌가 가져온 사진기로 그 모습을 찰칵찰칵 찍었다.

“…어머.”

한참을 촬영에 몰두하던 아스가 창밖을 돌아봤다. 멀리서 차 바퀴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주인님께서 오셨나 봐요.”

“어떻게 알았어?”

“차 소리가 들리네요.”

“그러면 형부 아저씨 차다!”

벌떡 일어난 클라레가 원피스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번쩍 집어 들어 올리곤 우당탕 달렸다.

“어머머, 귀족 아가씨는 조신하게 사뿐사뿐 걸어야죠.”

“그런 거 필요 없어!”

복도 바닥에 구멍을 낼 정도로 씩씩하게 내달리는 클라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언니!”

때마침 현관으로 들어온 노아가 화들짝 놀랐다.

“클라레 너 꼴이 그게 뭐야.”

“어때, 귀엽지? 내가 좀 귀엽지?”

“너 귀여운 게 한두 번이야? 이리 와 봐, 한번 안아 보자.”

“안기 전에 손부터 씻어야지! 옷도 갈아입고!”

야무지게 포옹을 거절한 클라레는 그제야 초대받은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부 아저씨, 안녕하세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벌렸다.

“오늘 저의 저녁 식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야, 형부라 부르지 마.”

“아스가 그랬는데, 결혼 안 할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결혼한대. 언니는 형부 아저씨랑 결혼하게 될 운명이야.”

“이렇게 똑똑한 아가씨를 보았나.”

감동한 레토가 냉큼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벨로 영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으흥!”

“허락해 주신다면, 부디 아름다운 영애의 손등에 입을 맞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니요.”

클라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저씨도 손 씻고 입 헹궈요.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꼭 그래야 해요.”

“작은 주인님 오셨어요? 중장님도 어서 오세요.”

뒤따라 나온 아스가 둘을 반겼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지만 받아 주십시오.”

“어휴, 그냥 오시면 되는…….”

미안해하면서도 냉큼 선물을 받던 아스는 깜짝 놀랐다.

‘이, 이건……!’

이곳 샤프 영지는 바다를 낀 해안 영지라 육류보다 생선 등을 즐겨 먹었고, 덩달아 백포도주도 인기가 많았다.

레토가 선물로 가져온 건 그 백포도주 중에서도 가장 비싼 ‘여신의 포말’이었다.

세 식구 생활비를 무려 석 달이나 안 쓰고 모아야 살 수 있는 귀한 것이, 지금 아스의 손에 들렸다.

“…얼린, 아니, 얼른 식사 준비할게요!”

아스가 황급히 식당으로 향했다.

그 사이, 손을 씻고 나온 레토의 앞에 클라레가 나타났다.

“아저씨, 그때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예의 바른 영애시네요.”

레토는 씩씩하게 인사하는 클라레가 마냥 기특했다.

특히 저 예쁜 줄 아는 당돌하고 뻔뻔스러운 점이 가장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마냥 예뻐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놈이 또 괴롭히지는 않고?”

델라트 경의 아들이 더는 시비를 걸지 않는지, 레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클라레와 눈을 마주쳤다.

“응.”

고개를 끄덕이는 클라레는 확실히 별일 없어 보였다.

“오늘은 조용했어요. 나 말고 다른 친구들한테도 이상한 말 안 하고.”

“그거 다행이네.”

“근데요, 으음…….”

클라레는 오늘 학교에서 본 동급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리를 이렇게, 막 깡총했어요.”

“…….”

“…….”

노아와 레토가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근데 아저씨! 내 선물은 없어요?”

“아이, 우리 아가씨께서 절 뭘로 보시고.”

나중에 식사 다 끝나면 주겠다고 레토가 약속했다.

꺄아, 클라레가 두 손으로 볼을 감싸며 환호했다.

“…저건 도대체 누굴 닮아서 속물이람.”

보호자인 노아에겐 영 걱정되는 모습이었다.

“이잉, 그치마안.”

클라레가 아련한 눈빛과 함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영 예전 같지 않단 말야.”

“뭐가 예전 같지 않은데……?”

“옛날에는 막, 내가 웃기만 해도 어른들이 과자나 용돈 주고 그랬는데, 이젠 학교 다닌다고 안 줘.”

“…….”

한없이 진지한 모습에 노아는 할 말을 잃었다.

옆을 슬쩍 돌아보니, 레토가 상체를 고꾸라트린 채로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너무 웃겨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언니, 아저씨 왜 저래?”

“쉬 마렵대.”

“이잉, 요실금이 있는 남자는 결혼 상대로 아니랬는데.”

“그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또 부부 상담하는 라디오 방송인가?

하루하루 급성장하는 여동생의 지식에 지치기 직전.

“다들 식사하세요.”

아스의 목소리가 구원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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