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45)

12.

[아저씨 안녕!]

“…중장님?”

피스트 준위가 흠칫거렸다.

“왜 갑자기 드러누우십니까?”

“너무 귀엽잖아…….”

“잘 못 들었습니다?”

“못 들었으면 됐어.”

레토가 책상 위에 널브러트린 제 몸을 일으켰다.

‘귀여운 것도 죄다.’

이미 레토의 머릿속에선 클라레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귀여운 게 범죄면, 우리 처제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지.’

레토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계속 읽었다.

[저는 마레아 학교 1학년 클라레 벨로입니다.]

[어제는 도와줘서 감사했습니다.]

[보답의 의미로 저녁 식사에 초대합니다. 저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어린이거든요. 아스가 만드는 요리는 엄청 맛있어요. 같이 저녁 먹어요!]

“준위.”

“예, 중장님.”

“혹시 천사인 게 아닐까?”

“…예?”

“우리 처제가, 천사인 거 같아.”

“…….”

피스트 준위는 ‘돌았습니까?’라고 물어볼 뻔한 제 입술을 황급히 깨물었다.

‘…설마 대위님 여동생?’

군대 특성상 약점이 될 가족이나 연인을 언급하는 걸 조심한다. 노아 역시 가족 이야기를 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가끔 들려주는 일화가 너무 웃겨서, 그리고 같은 부대원인 아이스 중령의 막내딸과 친구 사이라서 부대에선 꽤 유명 인사였다.

‘근데 왜 대위님 여동생을 처제라고….’

의아해하던 피스트 준위가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서, 설마!’

옆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든 말든, 레토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었다.

[근데 언니가 옆에서 계속 쫑알]

[언니가 옆에서 계속 방해]

[언니 짜증 나요. 어서 결혼해서 혼내]

그런데 편지 중간에 방해 공작이 눈에 보였다.

몇몇 문장 위로 줄이 작작 그어졌는데, 그 문장마다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이런, 검열은 안 되지.’

노아가 신경질 부리는 모습이 눈에 훤해서, 레토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오늘 꼭 와 주세요!]

[추신. 선물 꼭 사 오세요.]

야무진 인사를 끝으로, 편지 밑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응?”

편지는 한 장이 끝인데, 뒤에 또 다른 종이가 있었다. 클라레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선 흰색과 회색이 섞인 머리를 한 남자와 금발에 커다란 리본을 단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있었다.

옆에는 눈이 날카로운 금발 여자와 선한 눈웃음을 짓는 흑발 여자도 함께였다.

“…주, 중장님?”

파스트 준위가 조심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아까부터 말이 없는 레토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저 인간은 입 다물고 침묵할 때가 성질머리의 극을 칠 때라, 조건반사적으로 겁을 먹었다.

“하아…….”

그러거나 말거나,

레토는 감동의 탄식을 흘렸다.

그러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황금보다 귀한 초대장을 책상 서랍에 조심히 넣었다.

그리고 열쇠까지 잠갔다.

“…딸 낳고 싶다.”

“예…….”

“준위, 나는 왜 애를 못 낳는 걸까?”

“못 들었, 아니, 안 들었습니다!”

피스트 준위가 두 손으로 귀를 퍽퍽 두드렸다.

“어, 어쨌든 대위님께서 전해 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편지는 전할 물건이지, 노아가 전해 달라고 할 말은 따로 있었다.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피스트 준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계속 농땡이를 치면, 오늘 내 동생의 초대는 물거품이 될 거라고…….”

벌떡.

그리고 쾅!

“힉!”

파스트 준위가 커다란 덩치를 움찔거렸다. 그는 어느샌가 혼자 집무실에 남은 채였다.

“…어우.”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라본 곳은 문이었다.

어찌나 힘차게 열어젖히고 거칠게 닫았는지, 문고리가 덜렁거렸다. 심지어 경첩이 달린 부위엔 금까지 갔다.

“미친개…….”

상관이 없으니 욕이 절로 나왔다.

“저건 누가 데리고 살려나 몰라.”

그 ‘누구’를 동정하려던 피스트 준위는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무래도 자신이 원래부터 동정했던 그분일 것 같았다.

“대위님 힘내요……!”

***

레토 오케아누스.

그에겐 세 가지 별명이 있다.

애송이, 중장님, 미친개.

애송이는 딱 한 사람만 부를 수 있는 별명인데, 그 한 사람은 현재 임무로 공석 상태였다.

이 별명은 부르는 이의 기분에 따라 등신, 또라이, 야 저거 참 겉가죽만 번지르르해선 등등으로 바뀌기도 했다.

두 번째 별명인 중장님은 사실 직장 내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호칭이자, 레토의 계급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별명인 미친개는 레토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완벽한 단어였다.

미친개라 불리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레토의 무력이 잔악했기 때문이다.

당시 역공전에 레토와 함께했던 전우들은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무지개가 떴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적군의 피로 만든 무지개 말이다.

아름답고 비릿한 무지개는 이후 해적 소탕 때도 심심찮게 나타났고, 어느샌가 해적들 사이에선 ‘무지개’라는 은어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지간한 비속어보다 끔찍한 뜻으로 통한다고.

그리고 레토가 미친개라 불리는 두 번째 이유.

“우리 델라트 경에겐 여기 남부가 행운의 장소인가 봐.”

“…….”

“7년 전에 가문 직계가 여기서 죄짓고 사형당한 덕에, 지금 내 눈앞에 앉아 계신 지고한 기사님께서 가주가 된 거 아닌가.”

타인을 정신적으로 돌려 까는 기술이 무력보다 잔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7년 전.

아들라보르 역공전이 펼쳐지기 직전에 커다란 사고가 하나 있었다. 그 사건의 주범이 바로 당시 델라트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리고 그가 군사 법정에서 사형당한 뒤, 후계로 지목된 것이 현재 눈앞에 앉아 있는 델라트 경이었다.

“정말 서운해서 눈물이 다 나는군.”

레토가 손수건으로 메마른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당연히 묻어나는 건 없었다.

“내가 그래서 델라트 경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붉은 눈동자가 서늘한 살기를 번뜩였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우는 척을 그만둔 레토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조져야 너희가 괴로워할까, 섬뜩한 호기심을 당장 실천하고 싶어 안달 난 미친개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

“…….”

왕실 기사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억울했다.

대대적인 군사 제도 개편 이후, 해군과 육군, 왕실 기사단은 동등한 지위를 지니게 되었다. 법문으로도 규정된 만큼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기사단은 여기에 은근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다.

역사를 따지자면 왕실 기사단이 훨씬 오래되었으며, 귀족 출신들이 많이 있어서 타 군대를 무시하고 낮잡아 봤다.

그래서 이들은 이 상황이 아주 불쾌했다.

“…오케아누스 중장.”

여태 태연한 척하며 소파에 앉아 있던 델라트 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중장?”

레토는 헛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말이 짧네?”

“…중장님.”

호칭을 정정하는 말끝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델라트 경은 조용히 심호흡하며 별일 아니란 듯이 싱긋 웃었다. 멀뚱히 바라보던 레토가 피식거렸다.

“이번 교류는 아무쪼록 두 조직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실수가 있었으나, 해군 측에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흐음…….”

레토는 대답 대신 고민하는 척했다.

툭, 툭, 팔걸이를 두들기는 손가락 움직임은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찌나 박자가 정확한지, 벽에 걸린 시계 시침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럴까?”

레토가 저가 앉은 소파 뒤를 힐끔거렸다.

“준위는 어떻게 생각하나?”

“중장님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 뒤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피스트 준위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이고, 의견 말한다고 내가 잡아먹냐.”

편하게 말해 보라며 레토가 손짓했다.

“아무 이야기나 해 봐. 준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저들을 만났잖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짧게 숙인 피스트 준위가 대답했다.

“델라트 경의 말씀대로, 이번 교류는 해군과 왕실 기사단의 친목 도모를 위한 것입니다. 큰 소란이 일어난다면 국왕 폐하께서 크게 걱정하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 그래. 국왕께서 걱정하시지.”

내 말이 그 말이라며 레토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해군과 왕실 기사단의 우호적인 교류가 원활히 끝날 때까지, 어디 잘해 봅시다.”

조금 전까지 살벌하던 기색은 어디 가고 없고, 사람 좋은 미소만 싱글벙글 지어 보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델라트 경이 내민 손을 잡았다.

***

“어떻게 생각해?”

사격 연습실에 방문한 노아는 제게 보급된 리볼버에 탄환을 하나하나 넣으며 물었다.

“으음, 뭐,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

옆에 있던 아미는 탄환을 넣는 리볼버 약실 구멍을 청소하며 심드렁히 답했다.

“왕실 기사단은 국왕의 직속에 가깝잖아. 나름의 자부심도 있는 것들이 이런 무례를 저지르면서까지 남부에 왔다는 건…….”

찰칵.

탄창을 전부 장전한 노아의 리볼버가 사격 준비를 마쳤다.

“…속셈이 있단 뜻이겠지.”

“에휴, 기사도가 다 죽었구먼.”

아미가 혀를 차며 신에게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시여, 저 싹퉁바가지들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서랍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찍게 해 주십시오.

“하여튼 이놈의 수도 새끼들은 남부에 뭔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올 때마다 사고지?”

“그러니까 말이야!”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친 아미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7년 전에도, 아, 그때도 델라트였지? 그 가문 출신의 기사가 술 처마시고 함선 불태웠잖아!”

불태워진 함선 잔해는 현재 본부 내 위령탑 옆에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 해군은 왕실 기사단에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이것도 악연이면 악연이다…….”

청소를 마친 아미는 이어 탄환을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뚱히 보던 노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플랜시 소장님이랑 관련됐을지도 몰라.”

“뭐?”

놀란 아미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이곳엔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야, 그 소장님이 사람 좋기로 얼마나 소문났는데!”

군대라는 조직이 으레 그러하듯, 해군 역시 보수적이고 엄격한 계급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괴팍하기로 유명한 아드벨로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과 영향 탓인지, 타 군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느슨한 분위기였다.

그 덕에 ‘군인’ 같지 않은 군인들도 많았다.

“플랜시 사령관님은 구세주야!”

“그 정도는 아니야…….”

“야! 그분 덕에 짬밥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병영식이라는 멀쩡한 단어는 어디 뒀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미가 말하고 싶은 건, 플렌시 소장은 여느 상관과 달리 군내 복지와 사병들의 편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훌륭한 위인이란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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