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는.”
한참을 뜸 들이던 레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말이지.”
그러고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한 레토는 결국 무거운 한숨을 푹 내뱉으며 운전대 위로 쓰러졌다.
덩달아 빠앙, 하고 경적이 짧게 울렸다.
“…….”
노아는 그런 레토를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레토는 금세 일어나 차를 몰았다.
최초의 마동력차 회사이자, 마동력차 회사 중 가장 유명한 체티의 한정판이 바다를 배경 삼아 달리기 시작했다.
한 폭의 화보 같은 장면이었다.
“…오빠는 어떤 사람인데?”
레토가 물었다.
“…중장님도 보통 미친 게 아니지만, 그 새끼도 만만치 않게 미쳤습니다. 지금은 집안에서 사고 한번 거하게 치고 가출한 상태입니다.”
노아는 순순히 답했다.
“오빠랑은 친한가 봐?”
“조금 전 설명이 그렇게 들리셨다면, 진찰을 서둘러 받아 보심을 추천합니다.”
“우리 처제는 몇 살이지?”
“다가오는 여름에 일곱이 됩니다.”
뜬금없이 시작된 질문 공세는 해군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입구에서 경비들이 신분을 확인할 때조차 현재진행형이었다.
붉은 애마가 주차된 뒤에야, 질의응답이 가까스로 끝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노아는 새삼 부끄러워졌다. 세상에, 저 미친개랑 찰나의 불꽃을 피우던 때에도 이딴 짓은 하지 않았었는데.
“날이 참 좋군.”
반면 레토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
못마땅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린 노아는 일부러 레토보다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하지만 제 눈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뒷모습만 담고 있었다.
‘헝클어졌네.’
근무 중일 땐 늘 넘기는 은발이, 지금은 살짝 흐트러진 상태였다.
시선을 내리면 반듯한 목덜미와 넓은 어깨가 걸음 따라 살짝살짝 흔들거렸다.
옷깃 너머로도 훤히 알 수 있는 단단한 등, 그 탓에 상대적으로 얇아 보이는 허리도.
‘변태도 아니고…….’
실컷 봤던 건데, 오늘따라 유달리 낯설었다.
“노아.”
허리 아래에서 간신히 시선을 올리던 중, 레토가 뒤를 돌아봤다.
“물어보면 되는 거였네.”
노아의 푸른 눈이 느리게 움직였다.
“…무얼, 말씀입니까?”
“그냥, 아무거나.”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눈웃음을 짓는 레토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
“너는 지금도 이렇게 성실히 답을 해 주는데…….”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던 레토의 붉은 눈엔 후회가 한 줌 머물러 있었다.
“그때의 너도 답을 해 줬을 거 아냐.”
“물어봤으면, 말입니다.”
“넌 항상 솔직하고, 올곧고, 아름답지.”
감미로운 찬사였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냥 기뻐하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사실, 그때도 알고 있었어.”
레토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그러니 이리 미련스럽게 구는 거지.”
“알고는 계셨습니까?”
“그럼 모를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레토가 제 머리칼을 만지고 싶어 손을 뻗은 걸,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고 떨어트리는 걸 못 본 척했다.
‘…자기도 습관은 여전하네.’
레토가 저의 습관을 아는 것처럼, 노아 역시 그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
‘애 같긴.’
그는 꼭 눈치를 살필 때면 노아의 머리칼을 만지려 했다.
전엔 마음껏 만지더니, 이젠 그마저도 못할 정도로 미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았던 건 결국 나지.”
어린아이의 고해성사는 계속 이어졌다.
“내가 너한테 붙잡고 치근덕거릴 수 있는 변명거리는 내기에서 이겼던 것과 네가 원하는 검밖에 없어.”
“…….”
“그러니까…….”
“중장님.”
누군가의 손이 머리칼에 닿았다. 레토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지더니, 서둘러 무릎을 굽혀 키를 낮췄다.
노아는 피식거리며 손가락 빗질을 계속했다.
“너 갑자기 왜 그러냐…….”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가 원망스레 나왔다.
그러든 말든, 노아는 계속해서 머리칼을 만졌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한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드러난 두 귀는 쓸데없이 둥글고 귀여웠다. 붉어진 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붉은색은 질색인데…….’
이상하게도 이 인간의 붉은색은 참 마음에 들었다.
“레토.”
노아가 조용히 불렀다.
“너나 나나 아직 서로에게 마음이 있지.”
그리고 순순히 인정했다.
“지금 우리 꼴을 봐.”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있나.
서로를 향한 시선은 뜨겁다 못해 절절한데, 차마 다가서지 못할 거리를 유지한 채 바라볼 뿐이었다.
노아는 구질구질하고 어정쩡한 걸 아주 싫어했다.
“정말 나랑 결혼하고 싶다면.”
그래서 확실하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이제 노아의 손은 레토의 볼에 안착했다. 선이 짙은 턱선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손바닥에 달라붙는 피부가 고운 건 조금 얄미웠다.
“물론 내 진급을 방해한 이유도 솔직하게 말하고.”
“고작 그거면 돼?”
진짜로? 레토가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는 갑자기 주어진 기회가 생각보다 너무 쉽고 갑작스러워서 당황하는 중이었다.
노아는 그게 아주 같잖았다.
“고작 그거를 못 해서 나한테 차인 주제에 허세는.”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귀여웠다.
‘…나도 제정신은 아니야.’
제게 미련을 보이는 건 레토인데, 이 관계에서 패배자는 자신이 될 거란 확신이 계속 들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이 미친놈한테 기회를 주려는 자신이 성인군자를 넘어 호구로 느껴졌다.
‘그래도 속은 후련하네.’
애써 부정하던 마음을 순순히 인정하니 기분은 좋았다.
“으음, 근데.”
레토가 슬쩍 웃어 보였다.
“우리가 사귄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차인 것도 아니지.”
“그럼 우리 사이도 아무것도 아니었단 거네. 지금도.”
“그 이상으로 뜨겁고 강렬했단 뜻이야. 물론 지금도.”
“능청스러운 건 지금도 똑같네.”
노아가 은근슬쩍 다가오는 레토를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난 레토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아까와 다르게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 참 얄밉기 짝이 없었다.
‘넌 아직 마음을 놓아선 안 돼.’
노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럼 어서 말해 보십시오.”
이 얄미운 놈을 평생 끼고 살려면, 한 번쯤은 완벽하게 기를 잡고 혼을 낼 필요가 있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진급 방해한 이유도 솔직하게. 아, 물론 검도 줘야 합니다.”
“…….”
“고작 그거면 되냐고 허세 부리던 모습은 어디 갔습니까?”
노아가 비죽였다.
“참 쉬운 기회 아닙니까?”
조금 전까지 그리 자신만만하더니, 레토는 입술을 실로 꿰매기라도 한 것처럼 꾹 다문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기에선 내가 이겼잖아.”
레토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결혼해야지, 안 그래?”
그러더니 큼지막한 주먹 두 개를 모아 냉큼 턱 밑에 붙이며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
“…뭡니까, 그게!”
기겁한 노아가 후다닥 뒷걸음질 쳤다.
“어디서 그딴 걸 배워 온 겁니까!”
“음, 이상하군.”
레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새 유행하는 연예인들 다 이렇게 화보 찍던데?”
“그런 것도 봅니까?”
“부대에 가 봐. 널린 게 연예인 화보지.”
“…….”
“잘 먹힐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다리를 조금 더 들어야 했나? 레토는 조신하게 접어 올린 제 한쪽 다리를 내려다봤다.
뒤늦게 그걸 확인한 노아는 이제 기절하고 싶었다.
“미쳤습니까, 진짜?”
“난 언제나 너한테 미쳤지.”
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미 보아 버린 그 꼬락서니가 제 머릿속에 완벽하게 각인되었다.
선명히 떠오르는 방정맞은 자태가 쓸데없이 귀여워 보였던 건 자존심 때문이라도 인정하기 싫었다.
“그럼 역시…….”
레토가 씩 웃었다.
“살짝 벗은 채로 거친 숨소리를 귓가에…….”
“중장님!”
기어코 노아에게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인 뒤에야, 레토는 웃으면서 농담을 멈췄다.
“난 네가 때려 주면 이렇게 짜릿하더라……!”
레토가 볼을 붉히며 고백했다.
“내 팔자야…….”
노아는 앞날이 막막해졌다.
‘진짜 이놈이랑 결혼해도 괜찮은 걸까?’
기껏 후련해졌던 마음속에 후회가 도로 생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망설임은 없었다.
서글프게도, 아직 레토가 아닌 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남자 복이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어허, 대위. 나만큼 잘생기고 몸 좋고 밤일 잘하…….”
“성희롱으로 고소당하고 싶으십니까!”
둘은 그렇게 본부로 복귀했다.
하지만 델라트 경은 끝내 본부로 돌아오지 않았다.
***
델라트 경이 모습을 드러낸 건 다음 날이었다.
레토의 직속 보좌관인 피스트 준위가 이를 전달했다.
“델라트 경이 중장님을 뵙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언제?”
“두 시간 전부터입니다.”
피스트 준위가 무성히 답했다.
“세상에 준위.”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로 서류를 살피던 레토가 감정 없이 나무랐다. 그의 왼손에 들린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건 일찍일찍 보고했어야지.”
하지만 레토의 다리는 여전히 책상 위에 올라간 채였다.
“수도에서 내려오신 귀한 손님들이잖아. 물론 우리는 어제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요컨대 더 기다리게 하란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피스트 준위가 순순히 사과했다.
“이상하게 보고하려고 찾아올 때마다, 중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오해할 소릴 하네. 누가 들으면 내가 땡땡이치는 줄 알아.”
“하지만…….”
델라트 경을 기다리게 한 두 시간 동안, 피스트 준위는 많은 것을 목격했다.
“소설책 들고 화장실을 가신 것, 대원들 감독한다며 돌아다니시다가 벨로 대위님께 혼나신 것.”
“그걸 봤어?”
레토가 부끄러워했다.
“…그러다 흡연 휴게실에 들어가셔선 그곳에서 담배 피우는 대원들에게 금연 교육하시는 것까지 봤습니다.”
“너 앞에 말이 좀 없는데? 속으로 내 욕했냐?”
“아닙니다.”
“뭐, 됐어. 어차피 나는 또 바쁠 거야.”
떠드는 와중에 마지막 서류 결재까지 마친 레토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스트 준위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벨로 대위님께서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대위가?”
대원들에게 빼앗은 화보를 찢어 종이학을 접으려던 레토가 멈칫했다.
“대위가, 뭐래?”
제멋대로 굴던 상사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불량했던 자세도 어느샌가 의자에 똑바로 앉은 자세로 고쳐져 있었다.
“중장님께 이걸 드리라고.”
피스트 준위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 카드였다.
카드를 받은 레토는 이게 뭔가 싶었으나, 곧 카드 위에 적힌 이름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부 중장 아저씨 두 손에!]
바로 클라레가 쓴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