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45)

10.

“제 여동생에게, 아드님께서 부주의한 언사를 하더군요.”

그제야 델라트 경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그때 알았다.

델라트 경은 강자에게 약했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이었다.

레토 앞에서는 쩔쩔매 놓고는, 노아가 입 한 번 열었다고 바로 눈에 힘을 줬다.

“이번 일은….”

그리고 델라트 경이 노기가 살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전혀 안 미안한 얼굴이었다.

“예.”

그래서 노아도 삐딱하게 답했다.

이에 레토가 서둘러 입가를 손등으로 눌렀다. 노아의 대답을 들은 델라트 경의 얼굴이 선홍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아기 돼지 같았다.

“보아하니 딱히 사과하실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사과를 바라진 않겠습니다.”

노아도 딱히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대신 조건 하나를 붙였다.

“경의 아드님이 제 여동생과 어울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른 학우도 괴롭히지 않게끔 주의해 주시고요.”

그렇지 않는다면 학교 이사장께 직접 연을 넣겠다고 경고했다.

“알겠네.”

델라트 경은 순순히 답했다.

그러나 노아는 그의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빌어먹을 귀족 나으리는 여전히 레토의 눈치를 살피기만 할 뿐, 실질적인 보호자인 노아의 경고는 듣는 척도 안 하는 거 같았다.

“…….”

짜증이 순간 욱 받쳤지만, 노아는 짧은 한숨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더 따져 들다간.

“…….”

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느라 주눅이 든 델라트 학생이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

“그 꼬맹이 말인데.”

밖으로 나온 레토는 운동장에 대충 주차해 둔 저의 애마부터 확인했다.

워낙에 유명한 마동력차라서 차 주위로 신발 자국이 가득했다.

“괜찮을지 모르겠네.”

“자기 아버지한테 혼날까 걱정입니까?”

“아무래도?”

레토는 제 붉은 애마에 찍힌 조그마한 손자국들을 보며 얇은 웃음을 흘렸다. 철없는 아이들이 호기심을 못 이기고 만진 거 같았다.

“꼬맹이 입이 보통 험한 게 아니더라고.”

그 말에 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한테 배웠겠어.”

돌아선 레토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너도 더 따지지 않고 끝낸 걸 테지.”

“그런 인간과는 상종을 안 하는 게 정답입니다.”

노아가 순순히 인정했다.

다만 노아는 레토가 그런 점까지 생각했을 줄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게 바로 레토의 장점 아닌 장점이었다.

남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굴면서도, 가끔 정말 예상치 못한 배려를 베풀 때가 많았다.

‘물론 상대가 그걸 배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때가 더 많다는 게 문제지만.’

노아는 그가 참 서툰 인간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델라트 경은.”

하지만 저도 만만치 않게 서툴렀기에.

“본부에 있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레토에게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말 대신, 델라트 경에 대한 의문부터 제기했다.

“변호사가 먼저 온 것도 이상했지만, 추후 연락을 받고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너무 빨랐습니다.”

“본부에서 출발한 우리보다 말이야.”

레토 역시 그에 대해 석연찮은 점을 이미 짐작한 바였다.

나지막이 올린 입꼬리엔 비릿한 기색이 다분했다.

“우리 수도 깍쟁이께선 근무지까지 이탈하면서까지 무얼 하려고 한 걸까나….”

중얼거리는 모습이, 사악한 장난을 시작하려는 마왕의 혼잣말 같았다.

역시 저렇게 비비 꼬인 성격은 아군일 때만큼 듬직할 수 없다고, 노아는 인간 말종을 보듯 레토를 흘겨보며 생각했다.

“바쁘겠어, 대위.”

“해야 할 일입니다. 바쁘다고 투정 부릴….”

“결혼식 준비도 해야 하고, 혼수도 이것저것 구해야 하는데.”

“…….”

결혼 준비는 휴가 대상이 되던가?

델라트 경을 의심하던 아까보다 훨씬 진중한 혼잣말이었다.

노아는 저런 놈이랑 인륜지대사를 논해야 하는 제 처지가 너무 안타까웠다.

“언니!”

때마침 학교 건물에서 클라레가 우다다다 달려 나왔다. 아스는 그 뒤에서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힝, 나 배고파!”

노아의 다리에 찰싹 붙은 채로 칭얼거리던 클라레는 레토에게 손을 번쩍 들며 아는 척했다.

“형부 아저씨도 와 줘서 고마워요!”

“이럴 수가!”

감동한 레토가 기꺼이 몸을 낮추며 확인차 물었다.

“처제, 드디어 날 언니의 남편으로 인정해….”

“누가 처제고 형부입니까.”

노아가 냉큼 끼어들었다.

“클라레….”

그리고 아까 하지 못한 걱정을 폭풍처럼 쏟아냈다.

손으로 아이의 옷 위를 살피고, 몸을 더듬으며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클라레가 간지럽다며 몸을 비틀었다.

“괜찮아? 아픈 데는 없어?”

“응. 내가 다 팼어!”

클라레가 씩씩하게 답했다.

“할머니한테 배운 대로, 두 번 경고하고도 못 알아먹길래 턱주가리를 갈겼지!”

자랑스럽게 주먹까지 내밀었다.

“할머니가 이 주먹에다가 ‘설득’이라고 이름 붙여 줬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뜻인데?”

“‘설치기 전에 득달같이 패라’는 뜻이래. 전에 오빠가 가르쳐줬어.”

“오빠 말은 잊어. 그리고 잘했어. 하지만 다음에는 안 보이는 데를 때리자.”

“…보통은 때리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던가?”

잠자코 듣고 있던 레토가 끼어들었다. 조금 전 대화는 아이의 정서 교육에 그다지 좋은 내용은 아닌 듯했다.

그 전에, 저 집 가정교육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궁금해졌다.

할머니가 주먹에 이름을 붙여 주고, 오빠란 놈이 그딴 걸 해석이라고 애한테 가르치다니.

‘그런데 노아한테 오빠가 있었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작은 주인님.”

때마침 선생님들과 대화를 끝낸 아스가 다가왔다.

“뭐래?”

노아가 멀리 계시는 선생님들과 고갯짓으로 인사하며 물었다.

“아이들끼리 싸운 거고, 원인과 잘못이 상대측에 있어서 아무 문제 없을 거래요. 그리고 그 학생은 한 달만 임시로 다니는 거래요.”

그 말에 노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단한 기사 나으리야.”

“주인님은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시나요?”

“아니,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지.”

노아가 작게 하품하며 답했다. 이 작은 소동도 일이라고, 긴장이 풀리니 제법 피곤했다.

“빌어먹을 교류단이 방문한 것도 모자라 이 난리를 쳤으니….”

“저희가 할 일이 많죠.”

어느새 불쑥 끼어든 레토가 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제오늘 제대로 소개를 못 드린 것 같군요. 레토 오케아누스라고 합니다. 편히 불러주십시오.”

손을 맞잡은 아스가 공손히 인사했다.

“저야말로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드리지 못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요 며칠 계속 폐만 끼쳐서 어째요….”

“폐라니요.”

그런 섭섭한 말씀 마시라며, 레토가 씁쓸히 웃었다.

“노아의 가족이면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것을요. 언제고 곤란한 일이 생기시면 서슴지 마시고 연락 주십시오.”

“어휴, 중장님께 어찌 그럽니까.”

아스가 그럴 수 없다며 철벽을 쳤다.

“어제도 저희 아가씨 때문에 학교에 오셔서 도움을 주셨잖아요. 가뜩이나 우리 작은 주인님도 평소 부대에서 큰 신세를 지고 있는데….”

“물론.”

노아가 흔쾌히 동의했다.

아스의 천연덕스러운 철벽이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내심 당혹스러운 속내를 미소로 꽁꽁 감춘 레토의 꼴이 참 보기 좋았다.

“하하.”

레토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치밀하군.’

겉보기엔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아스는 레토에게 보이지 않는 선을 확실하게 그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저희가 세심히 살피겠습니다.”

그녀의 친절과 오늘 있었던 일은 오로지 클라레의 우연 때문이라고 마지막까지 단언했다.

대놓고 티는 안 냈지만, 아스는 노아를 힘들게 했던 레토가 탐탁지 않았다.

지금도 그가 노아의 상관이니까 적정선에서 예를 지킬 뿐이었다.

레토는 이런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걸 잘 알았다.

‘갈 길이 머네.’

노아가 왜 저렇게 단호하고 고집스럽나, 했더니 집안 내력인 모양이었다.

“난 아저씨 좋아. 다음에 또 놀아용!”

클라레가 레토의 손가락을 잡으며 빵긋 웃었다.

저를 향한 순수가 어찌나 눈부신지, 레토는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따라 했다.

그래도 이렇게 저를 좋게 봐 주는 사람이 한 명 있으니, 제 나름의 진전이라면 진전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

“아스를 노린 건 좋은 수가 아닙니다.”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길.

노아가 익숙한 손길로 차량 내 부품을 만졌다. 그러자 뒷좌석에 접혀 있던 지붕이 천천히 올라와 위를 덮었다.

“이런, 눈치챘어?”

역시 약간의 진전이 느껴진 건 내 생각일 뿐이었군, 레토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안 챘을 것 같습니까?”

노아는 속셈이 너무 뻔히 보여서 한심했다는 감상도 덧붙였다. 매정한 평가에 레토는 대꾸할 기운도 잃었다.

“제가 중장님을 계속 거절하는 이상, 아스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을 겁니다.”

“가장 어려운 공략 대상이었군.”

“그렇게 생각한 것부터가 실수입니다.”

노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와 중장님 사이의 문제지, 제 가족은 관계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계속 얽히던데?”

“그래서 달갑지가 않습니다.”

정작 자신들 사이의 문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전혀 없는데, 노아는 이런 흐지부지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답답했다.

진척 없이 고여 버린 물은 끝내 썩기 마련이었다.

“하아….”

답답함에 애먼 차 바닥을 신발로 지그시 눌러 밟던 차였다.

“근데, 오빠가 있었나?”

레토가 운전대를 부드럽게 돌리며 물었다.

“왜 말 안 해 줬어?”

“안 물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물어봤으면 답해 줬어?”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뭐로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진 노아가 눈을 흘기던 찰나였다.

“윽!”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급하게 멈췄다. 해안도로로 들어와 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었다.

“중장님!”

노아는 갑작스러운 정차에 앞으로 쏠린 몸을 겨우 추스르며 소리쳤다.

안전띠가 가로지른 어깨와 가슴이 욱신거렸다.

“무슨 짓입니까! 이렇게 운전하시면 사고가….”

“잠깐만 좀.”

레토는 대뜸 노아의 손을 붙잡으며 침묵을 부탁했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놀라고 당혹스러워했고, 덩달아 놀란 노아는 그런 레토를 기이하게 바라봤다.

갑자기 왜 저러는진 모르겠지만, 마치 1등에 당첨된 복권을 실수로 불태워 버리고 정신줄을 놓은 사람 같았다.

노아가 이런 비유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진짜로 저 순간을 목격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친개 소리를 하도 들어서 진짜로 미쳤나?’

원래도 미쳤지만, 더 미쳤나?

여기서 더?

여전히 반응 없는 레토를 시선으로 주시하며 몸을 슬금슬금 뒤로 빼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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