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울컥한 노아가 소리쳤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딴 비열한 수단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레토와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로 진급 명단에서 제외된 경우가 수차례였다.
“지난 진급은, 제 실력으로 당당히 손에 넣은 기회였습니다!”
불세출의 인재니 뭐니, 그딴 것도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 내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독이 되는 불필요한 호칭에 불과했다.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그래서 노아는 남들보다 몇 배로 노력했고, 필사적으로 공을 쌓아 이 자리까지 왔다.
특히 이번 진급은 정말로 중요했다.
소령으로 진급하면 군에선 검을 하사하는데, 특히 이번 진급 때 하사하는 검이 제국의 어느 귀족 가문의 보물이란 소문이 있었다.
그렇게 겨우, 때맞춰 진급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 눈앞에 있는 저 남자가 망쳐 버렸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어쩌면 ‘사랑’일 것이라 진실했던 그에게.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검들도 보란 듯이 가져갔다.
“…되었습니다.”
분에 겨워 씩씩거리던 노아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한결 차분해진 뒤에야,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습니까.”
진급 심사는 이미 끝났고, 검은 레토의 손에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에게 가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노아는 억지로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레토는 그 검들의 가치를 알 테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을….
‘……까?’
순간, 노아는 등골이 오싹했다.
저 능글맞고 인생 제멋대로 사는 놈이, 그 귀하고 소중한 검들을 귀히 보관할 리가 없었다.
젠장, 노아가 불안감에 머리를 박박 쓸었다.
차라리 나무 궤짝에 넣고 창고에 처박아 두는 게 다행이지, 저놈이라면 병따개 없다고 검으로 병목을 칠 정신머리를 지녔단 말이다!
“그럼 줄게.”
역시 검을 빼앗아야 하는 걸까, 라고 고민하던 차였다.
“검, 너한테 주겠다고.”
헛들었다고 착각했던 말이 다시금 또렷하게 들렸다.
황급히 돌아서는 노아는 레토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노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진득하기까지 한 붉은 눈동자가 노아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어제도 말했잖아. 그 검, 너한테 준다고.”
그랬는데 네가 어제 도망치면서 검을 내팽개쳤잖아.
“…….”
노아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내 검!”
뒤늦게 허리춤을 만지작거렸지만, 조금 전까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검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노아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좌절했다.
“이 멍청이!”
“그 정도는 아니고.”
읏챠, 레토가 노아를 번쩍 들어 테이블 위에 앉혔다. 그리곤 어디 도망치지 못하게 두 팔로 퇴로를 막았다.
“검에 왜 그렇게 환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나랑 결혼해 주면, 그거 줄게. 혼수로.”
“저기….”
노아는 답답한 마음에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검도 검이지만, 일단 저 인간이 왜 갑자기 결혼에 목숨을 거는지 알아야 했다.
“왜 어제부터 갑자기 결혼을 종용하시는 겁니까?”
“너랑 하고 싶으니까.”
레토가 단호히 말했다.
“…뭘요?”
“결혼.”
“아.”
그거 말고 또 있나? 레토가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노아는 시뻘게진 얼굴로 되었다며 괜히 소리쳤다.
레토는 큭큭 웃으며 못다 한 고백을 이어 했다.
“인간도 못 되는 나를 그나마 인도해 주는 건, 아무리 봐도 너밖에 없잖아.”
알고는 있군.
진심 어린 고백에도 노아는 시큰둥했다.
생각해 보면, 저 망할 놈 때문에 제가 고생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놈은 상사로서도, 애인으로도 빵점이었다.
“애당초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셨던 건 본인이셨습니다.”
눈앞에 있는 미친놈과 잠깐이나마 뜨거웠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그는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말했었다.
심지어 누군가와 사귀는 것도 싫다고 했었다.
그래서 노아는 레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레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로에게 지녔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힘들었지.’
벽이 있었다.
아주 높고, 두껍고, 매정한 벽이 자신들 사이에 있었다.
“저는 중장님께 화가 난 상태입니다.”
노아가 저를 가둘 것처럼 뻗은 레토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간 팔은 의외로 맥없이 떨어졌다.
“하나 그 이상으로….”
테이블에서 내려온 노아가 레토를 노려봤다.
“검은 탐이 납니다.”
“결혼해 줄 거야?”
“검이 먼저입니다.”
노아가 손을 내밀었다.
“검부터 주십시오.”
***
“결혼 서약을 할 때 예물로 검을 나눠 가질까?”
“그 검으로 중장님을 베어도 된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붉은 드레스가 입고 싶다고? 격하네, 내 신부….”
“중장님 드디어 정신을 놓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내 눈동자도 붉은데, 혹시 날 위해서?”
“중장님의 피로 물들일 수 있다면야.”
“그럼 오늘부터 한 방울씩 모아 볼게.”
“그럴 고생 마시고, 제가 단번에 죽여드리겠습니다.”
“노아 너 정말 뜨겁고 격해…! 그런 건 침대에서 말해야지!”
“그냥 첫날밤에 사망해 주십시오.”
“그러면 부부 합장묘로 묻어 주라. 네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게. 바다 수장 어때?”
“저는 매장을 선호합니다만.”
퇴근하는 길.
“정말 보통 미친 게 아니야….”
노아는 레토가 했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치를 떨었다.
내가 왜 저런 놈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과 몸 말고는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았다.
“…….”
그리고 그런 친구를 바라보는 아미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너도 이상해.”
“내가 왜?”
노아는 진정 모르겠단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이었냐, 그거?”
아미가 빠르게 부정했다.
“내가 친구니까 하는 말인데, 일단 너도 기본적으로 제정신은 아니거든. 중장님이나 너나 미친 건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
그저 상식이 첨가되었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노아 넌 상식이 첨가된 미친개, 중장님은 그마저도 없는 미친개. 이해했어?”
“중위, 머리 박아.”
“이게 꼭 저 짜증 날 때만 계급 이용하지!”
억울해서 일하겠냐!
아미는 투덜거리면서 땅에 머리를 박았다.
“어쨌건, 아까 그거 말인데.”
정확히 4초 뒤에 일어난 아미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애당초 옛 애인이 헤어진 뒤에 와서 후회하고 청혼하자면, 제정신 박힌 사람은 저리 꺼지라고 한다고.”
“나도 그래서 꺼지라고 했잖아.”
“그게 뭐가 꺼지라고 한 건데!”
답답해진 아미가 소리쳤다. 그러곤 조금 전 들은 대화의 큰 문제점을 지적했다.
“넌 그냥 중장님이랑 오순도순 대화한 거야! 사이좋게 농담 주고받는 그런 걸 한 거라고!”
“뭐래, 철벽을 쳤건만.”
“네가 친 철벽은 내 방귀에도 휘어지겠다. 그럼 왜 마지막에 네 옆에 매장되고 싶다는 말에는 반박 안 했는데?”
“죽은 뒤에는 내 관여가 아니니까.”
“불세출의 인재고 천재는 무슨….”
불세출의 등신들이다, 진짜.
아미는 혀를 쯧쯧 차면서 주차된 차로 향했다.
조그맣고 앙증맞은 검은색 경차가 삐삑 울었다.
“으휴, 우리 깜찍이!”
내가 너 때문에 참고 산다!
아미가 경차에 얼굴을 비비며 훌쩍였다.
“어떠냐? 나의 첫 마동력차!”
“뭐, 괜찮네. 4인승?”
“그렇긴 한데 뒷좌석이 좁아서 2명이 거의 한계야.”
“경차가 다 그렇지, 뭐.”
조수석에 앉은 채 두리번거리던 노아가 차에 탑재된 라디오를 발견했다.
“요즘 차를 한 대 사야 하나, 고민했거든.”
“아서라, 넌 그냥 중장님 차나 얻어 타라.”
“…야.”
“뭐?”
노아가 저를 째려보든 말든, 아미는 콧방귀나 거하게 뀌며 시동을 걸었다.
“딱 보아하니 몇 달 안에 결혼할 꼴이더만.”
“결혼 안 한다고!”
“그리 말하는 놈들이 결혼 가장 먼저 하더라.”
부케는 나한테 던져.
시동이 켜진 깜찍이가 부릉부릉 움직였다. 부대를 빠르게 벗어난 깜찍이는 그대로 시내로 향했다.
오늘은 노아의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는 날이었다.
“그런데 중장님은 왜 네 진급을 방해한 걸까.”
“낸들 알아.”
쯧, 노아가 혀를 크게 찼다.
‘…어쩌지?’
하지만 속은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노아는 레토가 가져간 검들이 꼭 필요했다. 아니,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결혼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야, 그것보단….’
그보다 조금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교복으로 갈아입은 클라레는 등교하기 전에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다.
받는 이는 바다에서 근무 중인 할머니였다.
오동통한 손에 쥔 연필 끝이 아이의 글 따라 삐뚤빼뚤 움직였다.
“…다 썼다!”
후우,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자신이 쓴 편지를 쭈르륵 읽어 내려갔다.
[할머니 두 손에.
할머니 잘 지내? 돈은 많이 벌고 있어? 지금 집이 엉망이야. 언니가 전에 사귀던 남자랑 결혼한다고 군대를 그만둘 뻔했거든.
라디오 방송에서 그랬는데, 헤어진 남자는 안 잡는 게 좋다고 했거든? 나도 사랑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언니는 얼굴을 너무 밝혀서, 그 아저씨를 잡을 거 같아.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 할머니 대신해서 집안을 지키려고 열심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
할머니 그럼 난 학교에 갈게. 할머니도 일 열심히 해! 올 때 선물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사랑해! 쪽쪽!]
야무진 편지 아래엔 추신도 있었다.
[추신. 오빠는 아직 집에 안 왔어. 그래서 할머니가 오빠 잡을 때 쓰라고 준 마취제도 그대로야.
근데 언니가 유통기간 지났다고 버리려는데, 아스가 그 인간은 유통기간 지난 거 써도 팔팔할 거니 괜찮다고 했어.
그 마취제 써도 괜찮을까?]
편지를 다 읽은 클라레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