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잡혀 왔냐?”
아미가 출근한 노아를 반겼다.
“내 발로 온 거야.”
노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괜히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러나 아미는 듣는 척도 않으며 콧방귀를 픽 뀌었다.
“사표 내는 걸 까먹어서 출근한 거면서 생색은.”
“…….”
설마 내 멍청한 실수가 소문이 퍼졌나? 노아의 푸른 눈이 황망하게 흔들렸다.
“다행히 소문 안 났어.”
레토의 청혼과 노아의 도망에 정신이 팔린 탓에, 당시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외의 사정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했다.
“너는 중장님이 사표 반려하고 데려왔다는 식으로 처리됐어.”
“쓸데없는 짓을….”
“야.”
투덜거리던 노아의 말을 자르고 불쑥 끼어든 아미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너 이번엔 중장님한테 감사해야 해.”
어제 있었던 노아의 도망은 마냥 단순한 소동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는 군인이 근무지를 무단으로 이탈한 탈영이었다.
“물론 사건의 발단은 중장님이지.”
하지만 탈영은 군에선 무척 심각한 범죄였다.
레토는 그 점이 드러나기 전에 도망친 노아가 부대 내에 있는 것처럼 손을 썼다.
그리고 외근을 핑계로 노아가 사는 집까지 찾아가 그녀의 신변을 확인했다.
“어째 요즘 잠잠하댔지.”
둘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함께해 온 절친한 사이였다.
아미는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매사 신중하고, 마지막까지 이성적이려고 노력하는 노아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저 ‘욱’하는 성질머리라는 걸.
그녀가 오케아노스 중장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미친개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
할 말이 없어진 노아는 그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채로 군복을 갈아입었다.
짙은 군청색 재킷과 황금색 단추 두 개, 그리고 깃이 흐물흐물한 바지까지.
마지막으로 흘러내린 금발을 올려 묶으며 깔끔하게 정리한 뒤에야, 노아의 환복이 끝났다.
“그러게….”
노아가 관물함을 살짝 힘줘 닫으며 말했다. 쾅, 닫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누가 대원들 앞에서 그딴 소리 하래?”
“친구니까 하는 말인데….”
아미가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이번엔 네가 너무 예민했어.”
“야, 넌 결혼이 애들 장난…!”
“하지만 중장님이 진지하게 한 것 같지도 않던데?”
복도로 나온 둘은 아침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지나가면서 마주치는 대원들은 노아와 마주치면 각을 잡고 경례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인데, 노아는 유달리 껄끄러웠다. 기분 탓이라 치부하기엔 여전히 레토가 한 짓이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아미가 그런 친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물론 나는 너랑 중장님이 그런 분위기를 잠깐이나마 공유했단 건 아니까 하는 말인데….”
“그런 적 없어.”
“나한테 들켰던 건 기억 안 나냐?”
둘이서 비품실에 몰래 숨어 입 맞출 뻔했던 걸, 모자란 종이 가지러 갔던 아미는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잠깐의 열병이었을 뿐이야.”
기어코 걸음을 멈춘 노아가 아미를 쏘아보며 단호히 말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그 인간이랑 결코 결혼할 생각 없고, 아니, 애초에 이 모든 건 미친개 잘못이라고.”
“넌 참 싫다면서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다.”
“짜증 나잖아.”
노아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러게 왜…!”
친구의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물끄러미 훔쳐본 아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미울 법도 하지.
애당초 이 모든 것은 레토가 한 달 전에 저지른 엄청난 사건 아닌 사건 때문이었다.
‘중장님은 왜….’
그는 왜 노아의 진급을 방해했던 걸까.
***
노아가 불세출의 인재라면, 레토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그는 해군 사관 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아들라보르 역공전에 참전했고, 고작 일주일 만에 제국 수도를 침공하여 황궁의 깃발을 꺾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햇병아리가 제국의 수도를 뚫었고, 황족들을 포위하고 그 깃발을 꺾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승전한 왕국에서도 그의 활약에 감탄보다 경악을 먼저 했을 정도였다.
레토는 이에 대한 공로로 소장으로 특진했다. 왕국군 창설 이래 유례없는 진급이었다.
처음엔 이런 특진을 불편하게 여기는 소리가 많았다. 대부분 레토의 어린 나이로 특진이 성급하다고 주장했다.
하나 이는 결국 저들이 레토에게서 잡을 수 있는 꼬투리가 나이뿐이었음을 방증하는 꼴이었다.
레토가 부임한 이후, 바야흐로 해군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중장으로 진급한 후, 아드벨로 대장과 함께 창설한 ‘특수 함선 부대’는 가히 왕국 최강의 전력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탑에서 신형 무기에 관한 시범 사용을 본 부대에 요청하였습니다.”
“총 몇 대가 들어온다던가?”
“일전에 보고한 것보다 한 대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럼 총 여섯이로군. 시범 인원은 이전처럼 뽑도록….”
아침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
노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쳤어.’
하필 사로잡힌 잡생각이 레토의 화려한 전적들이라니.
“넌 참 싫다면서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다.”
조금 전에 괜한 말을 들어서 그런 거야, 노아는 그리 생각하며 떨어져 앉은 아미를 노려봤다.
회의에 집중하고 있던 아미는 살기 어린 시선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시선을 빠르게 거둔 노아는 소리 없는 한숨을 흘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제 그 난리가 있었음에도 회의는 평화로웠다.
부대원들이 노아에게 인사하는 것도 평소와 다를 게 없고, 레토 역시 회의장에 나타난 뒤엔 딱히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다.
‘…내가 좀 과했나?’
생각해 보니 그랬다.
굳이 예민하게 반응해 도망칠 일이 아니었다. 그냥 무시했으면 다들 ‘미친개가 미친 짓 했구나’라고 넘어갔을 텐데.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손에 들린 애꿎은 펜만 화려하게 돌려졌다.
노아의 옆에 앉은 부대원이 감탄 어린 시선으로 그 묘기를 바라봤다.
그렇게 회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중장님.”
잠시 회의실을 나갔던 파스트 준위가 급한 정보를 전했다.
“오늘 아침에 급히 온 전보입니다만….”
묵묵히 듣고 있던 레토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아, 이거 안 좋은 건데, 노아는 빠르게 직감했다.
“…제군들.”
아니나 다를까.
“수도 깍쟁이들께서 오신다네.”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왕실 기사단, 말입니까?”
레토의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백금발의 사내가 불쾌하단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아이스 중령이었고, 부대 내에서 레토 바로 아래에 있는 계급이었다.
왕국이 보유한 군사 조직은 총 세 집단이었다.
북부를 중심으로 땅을 지키는 육군, 남부를 중심으로 바다를 지키는 해군. 마지막으로 왕실을 수호하는 왕실 기사단.
세 집단은 지키는 영역이 판이한 만큼이나 개성이 강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킨다는 이유로, 교류를 통하여 친목을 다졌다.
‘…그런다고 진짜 친해지겠냐.’
노아가 속으로 비식거렸다.
왜냐하면 그 교류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였다.
누가 누가 더 강할까?
서로를 향한 시기와 질투에 얼룩진 추잡스러운 교류는 최근 해군의 연승으로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나마 육군과는 같은 ‘군’이라는 이유로 뭉칠 때는 뭉친다지만, 왕실 기사단과는 껄끄러운 관계였다.
“델라트 경이 교류 차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온다는군. 그의 직속 부하들도 동행한다고 합니다.”
“델라트 경이라….”
레토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웃어 보였다.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가네?”
하지만 자리에 있는 어떤 이들도 저 말을 진짜로 믿지 않았다.
‘어이구야…!’
‘차라리 해적 소탕이 속 편하지.’
‘힝, 유서 쓰고 올걸…!’
‘여기가 지옥….’
모두 숨소리를 죽이며 레토의 심기를 살폈다.
저 미친개가 싸늘한 시선으로 입꼬리만 올릴 때면 꼭 무슨 사달이 생기곤 했다.
게다가 오늘은 그 예민함이 유난히 더했다.
“…….”
“…….”
대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노아를 향했다.
‘뭐 어쩌라고.’
당황한 노아가 눈을 부릅뜨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미친 대위보다 미친 중장이 훨씬 끔찍했기에, 대원들의 올망졸망한 눈빛은 더욱 반짝거렸다.
‘저 망할 것들이!’
날 제물로 바치려고!
대원들의 치졸한 술수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노아는 저들이 저러는 이유를 잘 알았다.
하물며 레토의 뒤에 있는 피스트 준위도 아기 수달처럼 바들바들 떨며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은가.
‘하아.’
결국 짧은 한숨과 함께.
“중장님.”
노아가 탐탁잖은 목소리로 레토를 불렀다.
굳이 회의실 분위기를 어떻게 해 보려고 부른 건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에겐 저 인간과 진지하게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
“델라트 경의 방문은 추후 논하지.”
레토는 저 말을 끝으로, 회의를 끝냈다.
참석했던 대원들은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노아는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요새 너무 봐줬나.’
한번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노아.”
물론 그런 생각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완전히 사라졌다.
“중장님.”
노아가 못마땅한 듯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아아, 난 네가 그런 눈으로 바라봐 줄 때면 짜릿하더라.”
레토가 싱긋 웃었다.
“…전 중장님이 그러실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노아가 질색하자, 레토는 아예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정말 즐거워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치미는 짜증을 갈무리하며, 노아는 지금껏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저와 그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 이유를.
“왜 저의 진급을 방해하신 겁니까?”
“그건 출근할 때 말한 거로 아는데?”
레토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그건 중장님 개인의 판단이지 않습니까.”
“…….”
이번엔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레토는 처음으로 무안한 감정을 내비쳤다.
노아는 거기에 더 화가 났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럼 넌?”
레토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진급에 목숨을 걸었던 거지?”
“말 돌리지 마십시오. 지금은 중장님의 잘못을…!”
“검 때문에?”
정곡을 찔린 노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어제 대련에서, 검을 보던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한숨을 가볍게 쉰 레토는 서운함을 내비쳤다.
“설마, 진급하려고 나한테 접근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