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탑이 폭발했다.
이는 100여 년 전에 마탑이 주도한 문화 및 산업혁명을 일컫는 어구다.
그전까지만 해도 마법은 자연의 원소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등, 원시적이고 1차원적인 발상에만 머물렀다.
즉,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런 마탑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자가 있었다.
“재미 드럽게 없네.”
“이러니 마법사가 썩은 고인물이니 뭐니 욕 처먹는 거 아니야. 언제까지 원시인처럼 불 지피고 정전기 장난이나 칠래.”
당대 마탑주는 새로운 마법을 발표했다.
바로 마법과 과학기술의 결합이었다.
처음엔 다들 마탑주가 드디어 정신을 놓았구나, 싶었다.
당시 마법은 ‘누가 더 파괴력이 큰 불덩어리를 만들 수 있나?’가 주된 논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탑주가 괴팍하기로 유명한 아드벨로 가문 출신이었기에 더욱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마탑주가 만든 새로운 마법은 그해 흉작이 될 뻔한 농업에 큰 도움을 주었고, 걸핏하면 침략하던 타국의 도적을 타진했다.
마탑주를 비웃었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등신들, 면상들 하곤.”
마탑주는 코를 후비며 다음 연구에 들어갔다.
그날 이후.
마탑은 ‘마법 및 기술 융합 발전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마탑의 거취는 아드벨로 가문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왕국은 아드벨로 가문에 공작위를 내렸으며, 이들 가문과 협력하여 나라를 부흥시켰다.
말 대신에 마동력으로 차가 움직였고, 하수도 정비로 각 지역의 위생 수준이 높아지니 사망률이 현저히 줄었다.
비료를 발명하여 식량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아사가 줄어들었으며, 삶의 질이 윤택해지니 자연히 경제력과 교육 수준이 높아졌다.
그중 가장 눈부신 혁신은 바로 병력이었다.
아드벨로와의 협력으로 왕권이 강화되자, 왕실은 사병제도를 혁파한 뒤에 모든 병권을 왕실로 귀속시켰다.
왕실은 소수 정예의 왕실 기사단을 제외시킨 뒤, 새로운 군사제도를 편성했다.
북부를 중심으로 한 육군.
남부를 중심으로 한 해군.
양질의 군사력을 키우는 각종 사관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지원 시설, 여기에 신식무기까지 더해지니.
열강 사이에 끼여 고생하던 약소국은 빠른 속도로 패권국이 되었다.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정치와 문화가 빠르게 발전하니 모든 면에서 우위를 선점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세력 변화는 주변국의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고, 왕국은 이전 열강들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전쟁은 침략받은 그해, 왕국이 열강 연합국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제국의 깃발을 꺾으며 완벽한 승리를 쟁취했다.
이것이 7년 전에 있었던 ‘아들라보르 역공전’이었다.
***
남부의 아침은 활기찼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부산히 움직이는 선원들, 내리는 선적과 오르는 선적들, 그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생선 훔치는 고양이들.
광장 역시 상인들이 가게 앞을 빗질하며 개업 준비를 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제시간에 전차를 타려고 바삐 발을 움직였다.
이 기분 좋은 분주함은 언덕 위 저택에도 찾아왔다.
“우리는 남부의 햇살들!”
거울 앞에 선 클라레가 교가를 씩씩하게 불렀다.
“푸른 바다를 누비는!”
“자아, 아가씨 만세 해 볼까요?”
“돌고래들!”
클라레가 팔을 번쩍 들자, 아스가 냉큼 잠옷을 벗겨 교복 상의를 입혔다. 그리고 하의도 솜씨 좋게 입혔다.
“앞으로 나아가는!”
남색 교복으로 갈아입은 클라레가 주먹 쥔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마레아 어린이!”
최근 클라레는 교가에 푹 빠져서, 틈만 나면 노래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아스는 진심 어린 칭찬을 듬뿍 해 줬다.
“천상의 목소리는 우리 아가씨를 말하는 건가 봐요.”
“오늘 음악 수업 있는데, 내가 제일 크게 부를 거야! 그러면 아스도 집에서 들을 수 있겠지?”
“아가씨…!”
감동한 아스는 클라레를 꼬옥 끌어안았다.
“우리 아가씨, 기저귀 차고 돌아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스가 눈가를 훔치며 울먹였다.
“언제 이렇게 훌쩍 자라셨을까?”
“그거야….”
말끝을 흐린 클라레가 한숨과 함께 소파를 노려봤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침부터 소파에 드러누운 제 언니였다.
“…나라도 정신 차려야겠다, 싶어서.”
“형제 중 한 사람이 문제면, 다른 한 사람은 멀쩡하다더니….”
아스의 흐느낌이 더욱 커졌다.
“…야.”
듣다못한 노아가 상체를 일으켰다.
“다 들리거든?”
가뜩이나 어제 일로 심란해 죽겠는데, 그런 저를 위로해 주긴커녕 한심한 취급하는 가족들이 심히 원망스러웠다.
“내가 불쌍치도 않아?”
“별로?”
“전혀요.”
이어지는 즉답에 노아는 다시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놈의 집구석….”
그러곤 훌쩍훌쩍 우는 흉내를 냈다.
그러자 조그만 발걸음이 쪼르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숨기고 있던 노아가 코웃음을 쳤다.
역시 애는 애라고, 언니가 울고 있으니 걱정이 된 듯하다.
“언니.”
그러나 똘똘한 클라레는 언니를 동정하는 대신.
“뭘 잘했다고 울어. 할머니가 그랬는데, 잘못한 사람이 흘려야 하는 건 오로지 피뿐이라고 했어.”
인생 선생님인 할머니가 떠나기 전에 남겨 주신 말들을 떠올리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노아는 이제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출근 안 하세요?”
보다 못한 아스가 클라레를 말리며 물었다.
“어제 보니까, 굳이 일을 그만둘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요란스러웠던 어제의 난동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남녀 사이의 사랑 다툼에 불과했다. 정말로 그게 다였다.
“그 아저씨,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아 보이던데.”
클라레가 코를 후비며 말했다.
“그냥 결혼하면 안 돼?”
“너, 이게 네 일 아니라고…!”
울컥한 노아가 클라레의 코 묻은 손을 아이의 입에 집어넣으며 씩씩거렸다. 클라레가 질색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놈이랑은 절대 결혼 안 해!”
노아가 다짐하듯 말했다.
“아, 작은 주인님….”
그런 말을 하면 꼭 반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그럼 전 아가씨 학교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하나 아스는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노아는 말 그대로 정말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아마 본인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다.
“다녀올 동안 아침 꼭 드세요.”
“언니는 이제 백수니까, 아스 말이라도 잘 들어야지.”
“이 집에 정녕 내 편이 없나….”
투덜거리며 일어난 노아는 둘을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 와.”
“언니 이제 일 안 가면, 나 학교 데려다주라!”
“어머, 제가 데려다주는 건 싫나요?”
“애들한테 우리 집에 백수 있다고 자랑하게. 센샤가 어제 자기 집에 이혼한 고모 왔다고 자랑했단 말이야.”
“그래, 내가 우는 게 보고 싶단 거지?”
노아가 메마른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찰나였다.
문을 열기 무섭게, 무언가가 불쑥 내밀어졌다.
노아는 반사적으로 아스와 클라레의 앞을 막아섰다. 아스는 클라레를 등 뒤에 숨겼다.
“어라?”
아스의 어깨너머로 눈만 빼꼼 내민 클라레가 알은척했다.
“중장 아저씨다!”
“안녕, 처제?”
꽃다발 뒤로 숨겨진 얼굴이 나타났다.
햇살에 반짝이는 은발과 둥그스름하게 휜 붉은 눈동자가 이상할 정도로 수상쩍은 미인.
“그리고….”
꽃다발을 노아에게 안기며, 레토가 싱긋 웃었다.
“우린 출근할까?”
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싱그러운 꽃이 무색할 정도였다.
***
안타깝게도, 노아는 부대로 복귀했다.
“사표를 내야 처리를 해 주든지 하지.”
어제 그 난리가 있었음에도 노아가 출근을 해야 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정작 내야 했던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스와 클라레는 어느 때보다 한심하고 실망스럽단 눈으로 노아를 흘겨봤다.
“학교에 가서 자랑도 못하고….”
클라레는 차라리 리리네 아빠가 훨씬 낫다고 꿍얼거리며 아스와 함께 등교했다.
“리리는 누구지?”
레토가 애마의 시동을 걸며 물었다.
그의 애마는 마동력차로 유명한 체티 사에서 올해 소개한 신형이었다.
제국에서 단 다섯 대 중 유일하게 남부에 있는 한 대를, 레토가 능숙하게 운전했다.
“…동생의 학교 친구입니다.”
가족들의 싸늘한 시선에 상처 입은 노아가 안전띠를 매만지며 힘없이 대답했다.
운전은 여전히 부드럽네, 라고 노아가 스치듯이 생각했다.
“우리 처제는 뭐 때문에 그 집 아저씨가 그대보다 낫다는 거지?”
“리리네 부친은 얼마 전에 두 집 살림 시도하다가 들킨 다음 날부터 행방불명입니다.”
“…….”
“걱정 마십시오. 집에서 쫓겨나 이혼소송을 당했을 뿐입니다.”
칭찬이 아니라 욕이었군.
레토가 짧게 웃으며 속도를 늦췄다. 완만한 언덕을 내려온 차는 곧 시가지를 지나 해안도로로 빠져나갔다.
차창 밖으로 푸른 바다가 환히 보였다.
노아는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았고, 레토는 굳이 침묵하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재밌습니까?”
창문에 비친 노아의 시선이 레토를 힐끔거렸다.
“뭐가 말인가?”
“절 가지고 노시는 것 말입니다.”
“가지고 논 적 없는데?”
“제겐 이 모든 것이 중장님의 장난 같습니다.”
“…….”
레토는 대답 대신 운전대를 왼쪽으로 돌렸다. 통제 구역에 진입한 그의 붉은 애마가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해군 기지였다.
입구에 선 경비병들이 레토와 노아를 알아보곤 경례했다.
레토는 늘 그랬듯 무시로 일관했고, 노아는 고생이 많다는 인사와 함께 경례로 답했다.
그리고 차가 안으로 들어선 뒤에야.
“노아.”
레토가 아예 차를 멈췄다.
“노아.”
그리고 한 번 더 그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노아의 얼굴로 자신 있게 향하던 손은 허공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러곤 눈치를 살피듯 내려가더니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았다. 뼈가 도드라진 굵은 손가락에 금발이 얽혀들었다.
“…….”
노아는 그런 레토를 말없이 바라봤다.
새삼 오늘은 머리를 풀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지금 제 귀가 얼마나 붉은지 들통났을 테니까.
“노아 네가, 왜 그렇게 날 미워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야.”
“아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운전대에 쓰러지듯 몸을 기댄 레토가 조용히 웃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고 말하면, 믿어는 주려나?”
“…….”
노아가 눈꼬리를 찡그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 눈앞에 있는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인다니.
‘정말 짜증 나.’
노아는 여전히 레토에게 마음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레토는 그런 노아의 속내를 알기에 눈웃음을 살살 쳤다.